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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53화 (53/113)

제53화

정신이 혼미해진다.

본체로 돌아간 카셀린을 마주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카셀린은 위압적이기는 했지만, 목숨이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때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그녀가 물러날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의 이름은 발포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거인은 그게 아니었다.

시스템의 경고를 무시한 채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불의 거인은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들 게 했다.

검둥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평범하지 않음이 내 예상을 많이 벗어났다.

악마나 마족, 아니면 그에 준하는 종족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거인은 그게 아니었다.

마신.

무려 신이란다. 많은 성좌들을 만났지만 그처럼 위험한 위압감을 보이는 성좌는 처음이었다.

아니, 저 모습이기에 신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럼 나 이때까지 신을 부리고 있었던···.’

저승에서 그에게 했던 독설들이 떠올랐다.

욕을 하고 또 했다.

그러고선 그와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강짜를 놓기도 했다.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마른침을 삼키며 거인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메시지가 더욱 붉어지며 검은색 공간에 금이 가기 시작할 때, 나를 빤히 바라보던 거인의 몸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의 그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보며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내가 지금 본 게 꿈이었으면 할 정도로 그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들은 내게 강렬하게 남았다.

검둥이, 아니 발포스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저런 존재에게 제약을 건다고 해서 의미가 있을까.

시스템조차 경고를 하는 게 다인데.

그런 회의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시, 시스템 관리자다!”

“저자를 잡으러 왔나 봐!”

상점 주인들이 입을 모아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기다란 탑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탑에서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크기부터 생김새까지 모두 다른 그들이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붐을 뿜고, 번개를 쏘며, 물을 부리며 다가온 그들이 나와 발포스를 둘러쌌다.

“마신 발포스.”

관리자들.

그들은 저마다 무기를 든 채 사나운 눈초리로 발포스를 노려봤다.

“차원 은행의 은행장, 한정우.”

그리고 그를 지나쳐 나를 노려보는 그들의 눈빛에 적의와 살기가 가득했다.

대놓고 나를 대적하는 눈빛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내가 그런 것도 아니고 저기 태평하게 있는 발포스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왜 나를 노려본다는 말인가.

그런 내 의문은 이어지는 그들의 말에 바로 해소되었다.

“마신 발포스는 시스템의 동의 없이 강제적으로 격을 드러냈다. 그로 인해 입은 피해는 엄청나다. 차원 은행의 은행장 한정우는 그의 고용주로서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내가 그를 고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책임을 져야 했다.

무슨 그딴 빌어먹을 일이 다 있냐만은··· 어찌보면 이 일어난 것도 나로 인해 일어난 거니 내가 할 말은 없었다.

억을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기에 나는 그들에게 적당히 보상을 하려고 했다.

시스템과 척을 질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내 고용주에게 무기를 들이미는 건가? 감히 네놈들이?”

‘아니, 미친 잠깐만.’

무슨 생각인 건지 가만히 있는 나를 내버려 두고 발포스가 그들을 향해 살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발포스의 살기에 관리자들이 몸을 움찔 떨며 뒤로 물러선다.

그것도 잠시 그들은 얼굴을 굳히며 각자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삼지창, 톤파, 검 등등.

그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겨눴다.

“하, 내가 요즘 잠잠히 있기는 했나 보군. 두 자릿수 관리자도 아니고 세자릿수 관리자들이 내 앞에서 무기를 꺼내는 걸 보면.”

‘아니 그만하라고.’

“마신 발포스.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곳은 우리의 본진이다. 네 힘의 상당 부분이 억제된 지금 네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푸하하하하하!”

‘웃지마, 미친 놈아!’

관리자의 말에 발포스가 광포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서 웃는 거지?”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겠어. 자기들 입으로 자신들의 눈이 옹이구멍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왜 도발을 하는 건데.’

관리자들을 향해 한심하다며 한숨을 내쉬는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되는 일이었다.

그들이 보상을 바란다면 해주면 되는 거였다.

물론 그 과정에 흥정이 조금 섞여있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았다.

어째서 발포스는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이렇게 되면 내가 위험해질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하는 건가.

“겨우 그딴 것으로 내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한 번 해봐. 대신 내게 그것을 휘두르는 즉시 목이 떨어지겠지만.”

‘아, 이제 끝났어.’

발포스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여기 있는 이들도 이길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관리자들을 때려 눕힌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당장에 때려눕힐 수 있다고 해도 그 이후에는 어떡한단 말인가.

저들이 끝이 아니었다.

관리자들의 수는 세자리가 넘는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발포스도 감당하기 힘든 강자도 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멸의 전사나 카셀린이 시스템을 경계할 리가 없었다.

시스템이 그 정도의 힘이 있지 않았다면, 격을 드러낸 카셀린이 시스템의 경고를 무시했겠지.

자신보다 약한자의 말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으니까.

‘시스템은 내 중요 거래처란 말이야.’

내가 가장 크게 반응한 이유는 시스템이 내 거래처라는 것이었다.

내가 저승왕을 만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시스템이 특전으로 무료 건설권을 주지 않았다면 내가 차원 은행을 지을 수도 없었고, 홍보권이 없었다면 성좌들이 찾아올 리도 없었다.

그리고 저승에서의 사업으로 인해 시스템은 내게서 때어낼래야 때어낼 수 없는 중요한 곳이었다.

친절하게 대해줘도 모자랄 판에, 일을 벌인 놈이 되려 언성을 높이는 꼴이라니.

이대로 그를 자르고 나는 관계 없다고 말하고는 싶었지만, 이미 그의 본모습을 보고난 후라 그런 도박성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래처가 중요하기는 해도 내 목숨만큼 중요하지는 않았으니까.

“어리석은 놈들. 네놈들이 죽는 이유는 장식보다 못한 네놈들의 눈 때문이다.”

내가 좌절하고 있을 때 관리자들을 노려보던 발포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관리자들이 반사적으로 무기를 들어 올리기 무섭게 거대한 운석들이 그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콰아앙- 콰앙!

세상이 떠나가라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운석 폭풍 가운데서 발포스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다.

나를 보호하는 것을 보며 경호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해야 할지, 왜 일을 크게 벌이는 거냐고 소리를 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관리자들을 향해 떨어지던 운석들이 돌연 허공에서 멈췄다.

“이건 위험하군요. 자칫 잘못하면 기껏 공을 들여 만들어놓은 만남의 광장이 무너지겠어요.”

운석 가운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을 찰랑거리며 등장한 그 남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보다는 존재라고 하는 게 맞,을려나.

손을 들어 운석을 여유로이 막아내며 등장한 그는 다름 아닌 No. 72였다.

내 담당 관리자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반대로 이런 일이 일어났기에 그가 나선 것이라고 납득이 되었다.

내가 관련된 일인데 그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는가.

“안녕하세요. 은행장님을 이렇게 뵙게되다니, 이걸 좋아해야 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일은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설마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은행장님은 이렇게 대놓고 일을 벌이시는 분이 아니죠. 은밀하게라면 모를까.”

저거 칭찬이겠지? 그래 그럴 거야.

“그런데 이건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은행장님의 길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신을 그것도 발포스님을 직원으로 두실 줄이야.”

“하하하.”

그의 말에 나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나라고 검둥이가 마신 발포스인 것을 알았겠는가.

만약 알았다면 그를 순순히 내 경호원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위협이 되는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어쩌면 발포스도 그것을 알기에 자신의 정체를 숨긴 것일 수도 있었다.

“으음, 70번대에 관리자라···”

다른 관리자들을 상대로 자신만만하던 발포스가, No 72를 보더니 침음을 흘렸다.

상대하기 껄끄러운 존재를 만난 듯한 모습이었다.

“발포스님. 아무리 저라도 이건 상당히 힘들어서 말이죠. 좀 치워주실 수 있습니까?”

No. 72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발포스에게 말을 걸었다.

힘들다는 말치고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발포스도 그의 말을 쉬이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힐끗 나를 바라봤다.

‘지금 내 눈치를 보는 거야?’

내 눈치를 보는 듯한 그의 모습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내 눈치를 볼 거였으면 사고를 치기 전에 물어보지.

나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손을 휘저어 운석을 가루로 만들었다.

땅에 수북히 쌓이는 가루들을 훑어본 No. 72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가루들이 뭉쳐져 만남의 광장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감사합니다.”

운석의 잔해들을 처리한 No. 72가 미소를 유지한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발포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No. 72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그의 뒤에서 주저앉아 있는 다른 관리자들을 향해 말했다.

“제가 없는 사이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맡을 테니, 여러분들은 돌아가셔서 할 일 보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잠시 나와 발포스를 노려보던 관리자들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모두가 떠난 자리, No. 72는 손가락을 한번 더 튕겨 발포스가 격을 드러내면서 생겨난 흔적들을 지웠다.

그가 놀람, 공포 등의 감정이 섞인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상점 주인들에게 방긋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그의 손짓에 상점 주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중얼거리면서 제 할 일을 보기 시작했다.

“그럼 저희는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아무래도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으니.”

그의 말에 동의했다.

발포스 때문이더라도 자리를 옮길 필요가 있었다.

No. 72는 격한 내 반응에 웃음을 흘리며 손을 휘저었다.

파아앗-

환한 빛이 시야를 가렸다.

부유감이 느껴지더니 이내 엉덩이에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에 감았던 눈을 뜨니, No. 72를 호출할 때마다 방문했던 예의 그 장소가 보였다.

“그럼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차를 내오기 무섭게 No. 72가 입을 열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매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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