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52화 (52/113)

제52화

금발의 남자는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이 뭔가를 실수한 건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자신이 실수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 그를 쫓아온 것을 제외하면 잘못한 게 없었다.

그렇다면 저 은행장이라는 자가 어째서 저렇게 나오는 걸까.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 세상이 변했고, 기존에 있었던 법과 규칙들이 사라졌다는 것도 이해했다.

지금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미스터 프레지던트의 말이다. 그것을 한낱 은행 직원이 무시한다니!’

이건 도를 넘어선 행동이다.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통령이다.

그것도 미국의 대통령.

나라가 무너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미국은 나라가 무너지기 전보다 더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강력한 화기를 사용해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신속하게 능력자들을 모아 따로 부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건축과 관련된 능력자들을 찾아내 탄탄한 성벽이 둘러싼 도시를 지었다.

오히려 전에는 전쟁을 일으키려 해도 명분이 있어야 하는 반면 지금은 명분이 차고도 넘치기에 신식 무기들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은행장이라는 남자가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는 평범한 은행 직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은행장도 아니고, 하다못해 부장이나 그에 준하는 직책을 가진 것도 아닌 그저 직원.

평범하디 평범한 은행원이 대통령을 직접 마주하게 되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그게 대통령의 비서가 직접 찾아와 부르는 거라면?

애초부터 그럴 일은 없었고, 당연히 그것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대통령을 만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얼마나 많은 데 거절하겠는가.

그리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대통령을 무시했다는 후폭풍이 두려워서라도 만나야 했다.

‘세상이 변했다. 그건 인정할 수 있어. 힘이 없던 사람에게 힘이 생기고, 힘이 있던 사람에게는 힘이 없어졌다.’

그렇기에 저 남자가 저렇게 나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막강한 힘을 가졌는데 남의 눈치를 왜 보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몸에 일어나는 사소한 반응까지 변한다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힘이 강하고,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람에게는 습관이란 게 있었다.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다면 대통령이라는 말에 놀란 반응이라도 보여야 했다.

‘전혀 놀라지 않았어. 오히려 귀찮다는 얼굴이었지.’

대통령이라는 말에 귀찮아하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봤다.

하다못해 그 사람은 적어도 막대한 부와 권력이라도 있었지, 눈앞에 남자는 그런 게 아니었다.

가진 거란 것은 차 한 대와 낡은 아파트, 통장에 들어있는 몇천만원이 전부였다.

그 사람에 비하면 존재 자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지? 저건 사람 자체가 바뀐 것 같잖아.’

세상이 개변한지 이제 한 달에 가까워졌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다고 하면 길 수 있지만, 사람의 성격이 변하기에는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어떠한가.

저 분위기며, 행동까지 결코 짧은 시간에 보일 수 없는 변화를 보였다.

그러할 경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힘에 취한 것이고.

두 번째는 그가 얻은 힘이 한 나라의 수장조차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할 때였다.

그 두 개가 비슷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엄연히 다르다.

첫 번째는 그저 자신이 얻은 힘만 믿고 까부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고, 두 번째는 그 자체만으로도 폭풍과 같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 않는.

그건 그의 힘이 나라의 수장을 뛰어넘는다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의 비서는 은행장이 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주변만 봐도 그랬다. 자신들에게는 쌀쌀하기 그지없던 상점 주인들이 저 남자에게만큼은 자신들에게 보여주지 않던 환한 미소를 보였다.

거기다 앞다투어 자신을 먼저 생각해달라며 소리치기까지 했다.

그 말은 저 은행장이 가진 능력이 절대 무시할 수 없다는 건데.

‘실수할 뻔했어. 자칫 잘못했으면, 우리의 든든한 힘이 되어줄 이를 적으로 돌릴 뻔했다.’

비서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들이 물러나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괜히 그를 건드렸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애초에 은행장이라고 불리는 것만 봐도 범상치 않잖아.’

미국은 사태를 수습하고 정보를 끌어모았다.

그렇게 정보를 수집한 끝에 몇 가지를 알아냈는데, 그중 한 가지가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코인이 매우 중요해진다는 거였다.

그리고 은행이 많은 지구와는 다르게 시스템에는 차원 은행을 제외하고는 따로 은행이 없다는 것까지.

그런 의미에서 저 남자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본이 가진 힘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뒤돌아선 은행장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

주변이 조용해졌다.

내 행동에 불쾌하다고 소리칠 거라고 생각했다.

미국 대통령의 비서이니, 내 행동이 무례하다고 말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아무리 세상이 망했다고 해도 미국이니.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랐다.

“죄송합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지금 나한테 사과를 한 거지?

무려 미국 대통령의 비서가 나한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이건 또 이거 나름대로 신기한 기분이었다.

대통령 비서가 내게 머릴 숙인다니.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미국 대통령의 비서가 누군가에게 머리를 숙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세계적인 대기업 회장이거나, 다른 나라의 수장이지 않은 이상 그가 머리를 숙일 일은 없었다.

“저희가 생각 없이 은행장님의 시간을 잡아먹었군요. 이 일은 차후에 저희가 보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혹시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제대로 찾아뵐 수 있을까요?”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이 다이아 이상의 계좌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나를 만나지 못할 거다.

그리고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달라지겠지.

차원 은행이 커지고 직원들이 늘어나면 나를 만날 수 있는 등급도 점점 높아질 거다.

나를 만나려면 당장에 다이아 등급이 되지 않는 이상 힘들 텐데··· 이제 막 시스템에 적응되어 가는 그들이 다이아 등급의 계좌를 만들기는 힘들거다.

그렇다면 그들이 나를 만나는 시기는 자꾸 밀어질 테고, 결국에는 VIP 등급을 얻지 않은 이상 힘들 텐데 그들이 VIP가 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한번에 대규모의 자금을 움직여야 하는데 그들이 가능할 리가 없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비서와 비서와 함께 온 사람들이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한 사람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장면은 쉬이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그들이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친다···.”

아무리 은행 일을 했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저 많은 사람을 보고나니 이제부터 차원 은행이 복잡해질 것이라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만남의 광장에 들어왔다는 건 어느 정도 자본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으니까.

고객이 느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그게 진상이 생겨나도 좋다는 건 아니었다.

지구에는 사람이 많은 만큼 진상도 또라이도 많다.

은행에 들어와 어떤 미친 짓을 할지 모른다는 거였다.

‘녹스가 힘을 더 키워야겠네.’

지금이야 녹스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사람들의 잠재력은 엄청나다. 특히 게임 같은 시스템을 얻은 지금, 게임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잠재력과 집념을 가진 한국인들이라면 충분히 녹스가 있는 위치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특히 처음부터 직업을 얻고 시작하는 지금에야··· 말을 해 무얼할까.

그러니 녹스가 더 강해져야 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해져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녹스를 데리고 상점에 한 번 들어야지. 그리고···.’

검둥이에 대한 처분을 어떻게 할지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

차원 은행에 걸어가면서 검둥이에게 말을 걸었다.

“생각을 좀 하셨습니까?”

“네?”

“이제 어떻게 할 건지 묻는 겁니다. 만약 당신이 제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면 저는 얼마든지 당신을 보내줄 마음이 있습니다.”

“음···.”

“하지만 계속 저와 일을 하겠다고 하신다면··· 예전과는 달라지겠죠. 제한이 많아질 겁니다.”

나랑 계속 일을 하겠다고 하면, 나는 그를 철저히 내 말에 복종하게 할 것이다.

자신의 목숨보다 내 목숨을 우선하게.

나 혼자서 그게 불가능할지 몰라도 시스템이 있다면 가능하다.

[은행장은 직원들의 행동을 일부 제한할 수 있습니다.]

내 직업이, 시스템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검둥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그가 떠나간다 해도 흔쾌히 떠나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를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

이번 일로 내게 악감정을 품을 수도 있으니까.

그를 막을 방법이 내게 몇 개 있기도 했다.

우선 당장에 불멸의 전사가 준 발키리를 소환하는 돌만 해도 그랬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차원 은행 앞에 도착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이 무척이나 짧았다는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조금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도 인정하겠습니다.”

‘많이 짧았지. 가벼워도 너무 가벼웠고.’

“은행장님의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애초에 제게 이런 말을 할 존재도 없었기에 제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진지한 말에 나는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만둔다고 하려는 거면 빨리 말해주면 좋을 텐데.

“아무도 제게 잔소리를 한 적이 없었는데··· 이건 참 신기한 기분이군요. 처음에는 기분이 나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맞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게 참 묘하네요. 제가 이때까지 얼마나 무책임하게 살았는지도 알게 되었고”

“···.”

“무엇보다 당신은 너무 재미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저승왕과 맞먹고, 제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흥미롭네요. 좋습니다. 재미를 추구하는 제게 책임감을 가지란 말은 다소 이상하기는 하지만··· 알겠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소멸하는 그날까지 당신을 지켜보겠습니다.”

‘이거 지금 나랑 일을 하겠다는 걸 돌려 말하는 거지?’

그냥 계속 일을 하겠다고 하면 되지 뭘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는지.

“그럼 검둥이씨는···.”

“제 이름은 검둥이가 아닙니다.”

그를 부르려고 한 그때, 그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깨지기 시작했다. 땅이 갈라지며 검붉은 불길이 치솟고, 세상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가득 찼다.

[경고! 감당할 수 없는 격을 확인합니다!]

[관리자들은 신속히 움직여 격을 달래 돌려보내시기 바랍니다!]

[차원 은행장의 신변 위협이···!

메시지가 떠오른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걸 알려주듯이, 시스템은 내게 도망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메시지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인 검둥이가 입을 열었다.

{모든 마족과 마왕의 지배자.}

{세상을 불로 가득 채우고, 절망과 피로 뒤덮는 파괴의 신.}

{나는 모든 죽음의 선봉장이며 어둠과 불을 다스리는 자.}

{내 이름은 발포스. 내 이름을 듣는 자, 내 이름을 듣는 세계는 절망과 공포로 가득 차리라.}

불로 뒤덮인 거대한 산양의 뿔을 가진 거인.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눈으로 거인이 나를 내려다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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