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저승사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포탈을 넘어갔다.
무료로 와서 몰랐는데, 저승과 만남의 광장을 잇는 포탈의 비용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코인을 벌어 히죽히죽, 불쾌하게 웃는 저승의 포탈 관리자를 뒤로한 채 포탈을 타고 만남의 광장에 돌아왔다.
“며칠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왜 이리 진이 빠지냐···.”
지쳤다.
한번에 너무 많은 일을 경험해서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가서 하루종일 푹 자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아직 할 게 남아 있었다.
검둥이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지 물어야 하고, 본사에 게이트를 짓는 등.
그리고 한예림에게 줄 몸하고, 내 수명을 늘릴 수 있는 것도 찾아봐야 한다.
바쁘게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차원 은행으로 향했다.
북적북적.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만남의 광장이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분명 저승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한 두사람만 보일 뿐 엄청 한산했었는데.
하루만에 이 정도로 바뀔 수가 있는지 신기했다.
거기다 바뀐 건 사람들의 수만이 아니었다.
못보던 가게들도 생겨났다.
특히 음식집과 옷가게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자신들의 일거리가 빼앗겨 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거라고 여겼던 것과는 다르게 기존에 있던 상점 주인들은 신입들을 살갑게 대하고 있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그들은 각자의 상점에서 서로를 향해 웃고 떠들며 손님들을 상대했다.
“어, 이게 누구야! 은행장이잖아!”
“어디 갔다 온 거야! 우리한테도 계좌 만들어준다며!”
나를 발견한 상점 주인들이 소리친다.
왜 이제야 왔냐며 말하면서도 그들은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영업시간이기에 상점을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제자리를 지키며 나를 향해 반가움을 표현할 뿐이었다.
그것뿐이라면 좋았을 거다. 그들이 나를 반겨주는 딱 그 정도였다면 크게 상관이 없었겠지만.
“은행장? 지금 은행장이라고 했지?”
“은행장이라면 여기서 가장 자본이 많다고 한 사람이잖아!”
“우리랑 같은 지구인이래!”
“잡아! 어떻게든 잡으라고!”
그들 주위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게 문제였다.
그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사람들으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그들이 그토록 환하게 맞아주는 게 누구인지 궁금함과 은행장이라고 불리는 것 때문에.
“저기다!”
차원 은행으로 향하던 나는 발걸음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몇 명이었다면 이렇게 도망칠 필요는 없었겠지만, 지금 내 시야 안에 들어오는 숫자만 십여 명이 넘는다.
거기에 지금도 계속 불어나는 중이니 저들에게 붙잡혔다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어째서 도망가는 겁니까?”
-처리해드릴까요?
굳이 도망갈 필요는 없었을지 모른다.
내게는 반지가 있었고, 비록 못미덥기는 하지만 경호원인 검둥이가 있었다.
사람 수가 많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게 위협이 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도망쳐야 정상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도망가는 이유는 그들이 내 고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일 때는 크게 영향이 없겠지만, 그들이 열 명, 백 명 그 이상 모이면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나. 그들 중 하나가 성공해서 코인을 왕창 벌어들일지.
코인 많은 고객이 될 수 있는데 함부로 공격할 수야 없지.
‘그런데 나를 왜 쫓아오는 거야?’
도망치면서 문득 그런 의문이 생겨났다.
저들은 어째서 나를 쫓아오는 걸까.
나는 그들과 안면이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인도 아니었다.
나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샐러리맨에 불과했다.
그런 나를 저들이 저렇게까지 악을 쓰고 달라붙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건데.
‘전혀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
내가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도망치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제자리에 멈춰서며 그들을 돌아봤다.
“으악! 밀지마!”
“멈춰, 멈춰라고!”
내가 갑작스럽게 멈춰서니 미친 듯이 달려오던 사람들까지 황급히 멈춰섰다.
그리고 그 반작용은 빠르게 나타났다.
앞에서 멈춰서니 뒤에서 달려오던 사람들이 앞에 있던 사람들과 부딪혀 넘어진다.
그걸 본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이 멈추려 했고, 그 몸을 그 뒤에 있던 사람이 달려와 부딪혔다.
멈추고 부딪치고 넘어지고.
그게 반복된 거리의 풍경은 다른 의미로 장관이었다.
사람들이 일열로 넘어져 있는 모습이라니.
그것도 곱게 넘어진 것도 아니고 서로의 몸에 포개져 있었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엉켜버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만약 현대가 멀쩡했다면 저 모습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 꽤 많은 관심을 받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젠장, 나와!”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들 중 한 사람이 사람들의 틈새를 빠져나왔다.
한국인은 아니었다.
금발의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그는 서양 사람이었다.
‘옷이 제법 좋은데?’
제 옷을 정돈하며 내게 다가오는 그를 살펴봤다.
몬스터가 나타나고 지형이 뒤바뀌어버린 멸망한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깔끔한 옷차람이었다.
거기다 입고 있는 옷은 ‘나 겁나 비싸요!’하고 말하는 것 같을 정도로 세련됐다.
‘저거 X렉스 아니야?’
시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밖에 없는 브랜드의 시계가 그의 손목에 차여있었다.
한 개에 천만원 이상하는 미친 가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저것보다 비싼 시계도 있기는 하다.
파X필립이라거나 오데마 피X라거나.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억소리나니 꿈에도 꾸지 못하고, 내 연봉으로 꿈이라도 꿀 수 있는 게 저 시계였다.
저걸 사려고 돈을 모으려 했지만, 막상 돈을 모으고도 사지 못했다.
내게 있어 천만원은 너무도 큰 돈이었기에, 그 돈을 시계 하나 사는데 낭비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시장이나, 지하상가에서 파는 싸구려 시계만 차던 내가 그런 비싼 시계를 차는 것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기도 했다.
‘저건 아무리 봐도 궁핍한 생활을 한 모습이 아니잖아.’
비록 세상이 멸망해 시계와 같은 물건의 가치가 바뀌었다고 해도 저런 비싼 시계를 아무나 차고 다닐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저런 걸 사려면 전문 매장에 가야 하기도 하고, 저런 시계를 찾느니 식량과 식수 같은 실용적인 걸 찾는 게 정상적인 행동이었다.
저런 건 삶이 여유로운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 남자는 내 생각과 많이 벗어났다.
물론 세상이 멸망했다고 해서 모두가 힘들 게 사는 건 아니었다.
나처럼 특이한 직업을 가졌거나, 잘 살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가지면 사치야 얼마든지 부릴 수 있다.
하지만 저건 아무리 봐도 세계의 멸망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은 것 같았다.
“후우··· 이거 추태를 보였군요. 초면에 죄송하지만, 어느 분이 은행장이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가 중지로 금테 안경을 들어올리며 말을 걸어왔다.
나와 검둥이를 살펴보며 눈살이 살짝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그의 눈은 나를 한번 훑어봤다가 검둥이에게로 향했다.
나처럼 평범하게 생긴 사람보다는 신비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검둥이가 은행장 같다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상점 주인들만 해도 수인, 마족, 천족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평범한 상점 주인들이 그럴 진데, 시스템과 직접적인 계약을 맺고 단기간에 급성장한 차원 은행의 주인이 평범하게 생겼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겠지.
사람들은 그런 게 있었다.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에 걸맞은 외모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는 한다.
아쉽게도 나는 그의 기대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제가 은행장입니다.”
“음···.”
내 말에 그가 침음을 흘렸다.
실망한 것 같으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행장은 인간이라고 했으니···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평범한데···.”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렇게 말하면 상당히 기분이 나쁜데.
아예 들리지 않게 말하던가, 안 들리게 말할 자신이 없으면 속으로 생각하던가.
검둥이도 그렇고 나를 물로 보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았다.
이거 인상을 험악하게 해주거나 위압감을 주는 아이템을 사든가 해야지.
아니면 옷이라도 휘황찬란한 것으로 입어야 하나.
“그래서 저를 쫓아온 이유가 뭡니까?”
그들이 나를 쫓아오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힘들게 뛰어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 지금도 뛰라고 하면 더 뛸 수 있을 것 같아.’
엘릭서를 마신 덕분인지 몰라도 내 몸이 예전과는 다르게 더 강인해진 느낌이었다.
지금도 배를 만져보면, 밋밋했던 내 배에 빨래판 같은 탄탄한 복근이 만져졌다.
“찾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저를 따라와주실 수 있습니까?”
“아, 또야?”
“네?”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승왕도 그러더니 요즘 들어 나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없던 인기가 이제야 폭발한 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내가 관심을 받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기는 하지만, 내 직업상 관심은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무슨 부르면 졸졸 쫓아오는 애완견도 아니고.
도대체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걸까.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아,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가 실수했다는 얼굴로 황급히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그 명함에는 그의 이름과 직업이 적혀 있는 것 같은데, 그걸 흘깃 확인하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지금 중요한 건 이런 명함이 아닌, 나를 데려가려는 이유가 무엇인가였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높으신 분을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요?”
“예?”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그가 모시는 높으신 분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나 높은 사람이지 내게 높은 사람은 아니었다.
내게 먼저 머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 명함을 보지 못하신 겁니까?”
“봤습니다.”
“어···.”
봤는데 뭐 어쩌라고.
“이게, 음···.”
내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가 당황한다.
그러더니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명함을 보셨다면···.”
“제가 가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미스터 프레지던트께서 은행장님을 만나 뵙고자 합니다.”
“···.”
이제는 미국 대통령인가.
세상이 이렇게 되면서 정부도 망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정부는 정부라는 건가.
무엇보다 미국은 강대국이었으니,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유지가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지.
예전이었으면 미국 대통령이 나를 찾는다는 말에 흥분하여 미쳐 날뛰었을 것이다.
일개 은행원이 미국 대통령을 볼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저승왕을 만나고 난 후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미국 대통령이라는 단어는 내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귀찮기만 하다.
높은 관직에 있는 인물은 여러모로 상대하기 힘들다.
권력자이기 때문인지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간이나 쓸개를 빼놓고 상대해야 했다.
‘아니다. 아니야. 오히려 다르게 생각하자. 미국 대통령이니 그만큼 코인도 많겠지. 코인이 많은 고객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승왕이든 미국 대통령이든 내게는 모두가 똑같은 은행원이다.
하나하나 크게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
단,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은행에 찾아왔을 때다.
나를 이렇게 개인적으로 부르는 건 다른 일이었다.
“직접 오라고 하세요.”
“예?”
“직접 오지 않으면 저를 만나실 수 없습니다.”
“어···.”
당황하는 그를 뒤로한 채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