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1.갑은 을에게 350억을 빌려준다.
2.을은 갑에게 매월 1억 코인 혹은 1억 코인에 달하는 물품들을 350억을 갚을 때까지 지급한다.
3.갑은 을에게 저승 관광지 개발에 대한 자금을 조달한다.
4.갑은 자금을 조달하는 조건으로 저승에서 매월 나오는 모든 수입의 10%를 받는다.
(중요)5.만약 을이 6개월간 코인을 미지급, 혹은 2개월 분량의 수익을 내지 않을 시 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권리를 갑에게 이양한다.」
나와 저승왕이 계약한 내용이었다.
이것 말고도 더 있기는 하지만, 다른 것들은 자잘한 거지 가장 중요한 건 저 다섯 가지였다.
특히 맨 마지막의 것은 저승왕이 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였다.
자신의 모든 권리를 줘야 한다는 말은, 간단하게 말해서 그가 내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그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모르지 않을 터.
누가봐도 그녀에게 불리한 내용이었지만, 슬프게도 그녀는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저승왕이 입술을 깨물며 나를 노려봤다.
이 계약서를 만들기 위해서 그녀와 나는 제법 오래 말다툼을 했다.
나는 조건을 높이기 위해서,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낮추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게 저거였다.
나로서는 처음에 조금 손해를 봐야 했다.
당장에 그녀에게 줘야 하는 금액만 천억에 가까웠다.
그것만 보면 내가 얻는 게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그녀에게 투자를 하는 이유는 미래를 봤기 때문이다.
‘적어도 저승 관광 사업이 원활하게 돌아가면, 그만큼 은행을 찾는 고객도 많아질 테고.’
저승을 어떻게 바꿀지 뼈대는 잡아뒀다.
손님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그리고 저승에서는 오직 저승에서만 생겨나는 마석으로 영업을 할 거다.
코인으로 직접적인 거래를 하지 않고, 마석을 이용해 관광지를 이용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저승에 찾아온 이들은 저승 마석을 얻기 위해서라도 은행으로 찾아올 터.
환전을 할 때마다 수수료를 받을 테니, 고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코인도 늘어난다.
그리고 이건 저승왕과 관리자와 이야기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원래라면 생자가 저승을 찾아오는 건 있을 수 없지만, 시스템이 도움을 준다면 가능해진다.
더군다나 No. 72는 내 이야기를 듣고 큰 흥미를 가졌다.
“이건··· 확실히 성공할 수밖에 없겠군요. 저희도 투자를 하고 싶은데, 받아주시겠습니까.”
오죽했으면 그조차, 시스템조차 성공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투자를 했을까.
코인에 미쳐 있는 시스템이 투자하는 경우는 하나다.
그 사업이 흥할 거라고 확신할 때.
그것만 봐도 이 사업으로 내가 본전을 뽑고도 남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차원 은행에 10%, 시스템에 10%··· 빚도 갚아야 되니까···.”
계약을 무사히 끝마치고 나니, 저승왕이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멍하니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그녀가 힘이 있었다면, 아니 코인이 많거나 충분한 양의 코인을 벌 방법이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건 그녀가 밑에 사람들을 온전히 억누르고 있을 힘이 없었다는 거고.
미리 모아 놓은 코인이 없었기에 빚이 생긴 거였다.
그리고 빚을 쉽게 갚지 못한 건 그녀에게 제대로 된 수입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만 있었어도 그녀가 이렇게 비참해지지는 않았겠지.
“이 정도면 얼추 끝난 것 같네요. 나머지는 시스템이 도와준다고 하니, 제가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죠. 자금도 다 들였으니까.”
천억 코인.
나는 딱 떨어지게 맞춰 그녀의 계좌에 바로 쏴주었다.
한도 제한이 있는 다른 계좌들과는 다르게 나는 은행장 전용 계좌이기 때문인지 송금 금액 제한이 없었다.
그래서 번거롭게 나눠서 주지 않아도 되어 편했다.
“처, 천억··· 이런 금액을 이렇게 쉽게 주다니··· 대단하군.”
자신의 계좌에 들어온 코인을 본 저승왕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녀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한번도 만져보지 못한 금액이었다.
눈이 돌아가지 않는 게 이상하지.
저걸 횡령할 수도 있지만··· 시스템의 관리를 받으니 미치지 않고서야 횡령을 할 리가 없다.
시스템에서 500억 코인을 지원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자본을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라 너무 쪼잔한 거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500억 코인이 남의집 아들 이름도 아니고, 500억이란 숫자는 한 사람이 평생을 펑펑 놀고 먹어도 남을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무엇보다 시스템은 코인에 있어서 무척이나 깐깐했다.
그 정도의 금액을 지원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야 한다.
가능성이 없는 곳에는 1코인도 사용하지 않는 게 시스템이니까.
“관광지 개발은 시스템이 도와준다고 했으니 내가 할 건 따로 없고···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여기서 뭔가를 더 받아내는 것도 무섭군.”
그 잠깐 사이에 내가 공짜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더 이상 내게 손을 빌리기 싫다고 했다.
지금 받은 것만으로도 평생을 갚아야 한다며.
“그럼 이제 나가주시겠습니까. 저도 영업 준비를 해야 해서요.”
“아, 그러지.”
저승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엉덩이를 털어냈다.
그리고는 No. 72가 새로이 불러낸 또 다른 관리자와 함께 차원 은행을 빠져나갔다.
그 발걸음이 무척이나 잽싸다.
아무래도 내게 당한 게 있으니, 여기 더 있기 싫은 거겠지.
“자, 그럼 한예림씨?”
“네.”
가만히 대기석에 앉아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내 부름에 일어나 다가왔다.
그녀의 발밑으로 물줄기가 흐른다.
그걸 보고 있으니 예전 공포 영화에서 봤던 물귀신이 떠오른다.
만약 그녀가 이 상태로 파산되지 않은 지구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귀신이 나타났다고 사람들이 혼비백산 도망가겠지.
그리고 그들 중에는 나도 마찬가지일거다.
초자연현상 자체를 경험해 보지 못한 내게 그녀는 두려움의 대상일 테니까.
하지만 이미 고블린, 자이언트 스파이더, 성좌들, 그리고 기괴하고 오싹한 모습의 망자들까지.
이미 그런 것들을 보고 또 본 내게 그녀는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졌다.
팔이 잘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이 파인 것도 아니다.
곤충의 몸을 한 것도 아니고 훼손되어 있지 않은 몸에 그저 물이 잔뜩 묻어 있고, 창백하다뿐인 그녀는 오히려 다른 고객들보다 나았다.
“제가 알려드린 건 다 습득하셨겠죠?”
“네.”
그녀가 어려운 건 없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입에 담았다.
“아, 그리고 저 직업으로 은행원이 되었다면서 특성을 얻었는데요.”
“···특성 말입니까?”
“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건 처음 본다며 신기해하는 눈초리였다.
그러면서 작게 ‘게임하는 것 같네’라고 중얼거렸다.
하긴 처음 보면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시스템이 떠오른 거니 당황할 법도 한데, 이미 망자가 된 상태이기 때문인지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 상태창이 보이네하는 반응이 전부였다.
이미 죽은 마당에 뭐가 더 신기할까.
무덤덤한 그녀와 다르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최동수를 통해서 특성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했다.
특성은 있으면 좋다. 그리고 직업이 은행원이라면 그 특성 또한 은행과 관련된 능력일 터.
“무슨 특성이죠?”
“수수료 5% 상승이라고 하네요.”
“···!”
그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수료 5% 상승은 엄청난 거였다.
대부분 계좌 이체를 할 때나, 현금을 뽑을 때 수수료는 금액과 상관없이 정해져 있었다.
1000원에서 500원 정도.
그런데 수수료 5%라는 건, 금액에 맞춰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것도 늘어난다는 거였다.
‘아쉽다. 그녀는 본사로 데려갈 수만 있었으면 떼 돈을 벌었을 텐데.’
하지만 그녀를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내 소속이 되기는 했지만, 그녀는 망자다.
망자가 저승을 벗어나면 안 되기에, 그리고 저승왕과 약속을 한 게 있었기에 당장에 그녀를 데려갈 수가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구해봐야겠어.’
그녀의 육체를 구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그녀의 능력은 내게 큰 힘이 되어줄 텐데, 그런 그녀를 이곳에 썩힐 수는 없었다.
“당장에는 크게 할 일이 없을 겁니다. 아마,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면 못해도 반년 정도는 걸리겠죠. 그때까지는 편하게 있을 수 있을 겁니다.”
“네.”
“망자는 잠을 자지도 뭔가를 먹지도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24간 내내 영업을 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죠?”
“···.”
그녀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야간 작업도 하라는 것이다.
아니지 이게 야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 쉬지 않고 매일매일을 일하라고 하는 거니까, 그것보다 더 심한 거네.
쉬는 시간이 없으니까.
그래도 당장에는 고객이 없기도 하고, 그녀는 자지 않아도 되는 망자니까 딱히 상관없잖아.
“싫습니까?”
“아니요. 알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잠이 오지 않는다며 상관없다고 한다.
이제 이 은행은 그녀에게 맡기면 된다.
가끔 내가 들려야 하겠지만, 어지간히 큰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내가 여기 올 일은 별로 없겠지.
굳이 있다면 저승왕이 돈을 갚지 않는 것 정도.
“그러면···.”
주변을 슥, 둘러보다가 창구 뒤로 향했다.
그리고 구석에 위치한 벽 앞에서 시스템을 불러왔다.
「화장실:25,000,000
수면실······
······
······
······
게이트:25,000,000」
절대 보여주기 싫은 것처럼 맨 마지막 줄에 있는 게이트 건설을 눌렀다.
지점을 건설하고, 한예림을 은행원으로 받아들였을 때 메시지가 하나 떴다.
게이트를 건설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했다고.
오직 은행장과 은행장의 허락을 받은 자만이 이용할 수 있는 본사와 지점을 오가게 하는 입구이자 출구였다.
물론 여기에만 건설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본사에 가서도 게이트를 지어야 이곳과 연결이 된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앞으로 이 게이트가 유용하게 쓰일 것임은 변하지 않았다.
굳이 포탈을 이용하지 않아도, 포탈을 이용하기 위해 코인을 지불하지 않아도 이것만 있으면 지점에 마음대로 오고갈 수 있다.
정말 차원 은행은 까도까도 계속 무언가 나오는 양파 같았다.
그것도 내게 꼭 필요한 것들만 나오는.
[게이트 건설을 위해 25,000,000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메시지가 파들파들 떨리는 건 내 착각인 걸까.
꾸득, 꾸드득.
벽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구겨지고 계속 구겨지더니 거대한 입구를 하나 만들어냈다.
그건 다소 특이하게 생긴 문이었다.
신전의 입구처럼 생긴 문에 황금색 바탕에 푸른색 입자들이 마구 뭉쳐 있는 균열을 우겨 넣은 듯한 모습.
이걸로 본사로 돌아갈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끝까지 안 나타나네.”
이제 돌아가야 하는데, 검둥이가 모습을 보이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냥 자를까. 이건 데려온 게 의미가 없···.”
“그건 안 됩니다.”
“아이씨, 깜짝이야!”
“컥!”
퍽!
반사적으로 휘두른 주먹에 둔탁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