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그녀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 제안은 그리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오히려 좋다고 볼 수 있었다.
위험하게 일하지 않아도 되고, 전공을 살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이유는 그녀가 일해야 하는 곳이 저승이고, 무엇보다 나를 믿을 수 있냐는 거였다.
망설이는 그녀에게 나는 바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말을 꺼냈다.
“저승왕께서 보시기에 그녀가 언제쯤 재판을 끝낼 것 같습니까?”
“음··· 평소 같았으면 한 달, 그 정도면 끝났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그녀가 한예림을 불쌍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반란으로 인해서 현재 모든 재판이 미뤄졌다. 새로운 왕들을 다시 뽑으려면 못해도 몇 년은 걸릴 거고, 그리고 왕을 임명한다고 해도 적응 기간이 필요하니 제대로 재판을 이으려면 최소 5년은 필요하겠군.”
“···!”
저승왕의 말에 한예림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일주일 있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대로 빠진 그녀였다.
세 번의 재판은 그녀에게 하루가 일년처럼 긴 최악의 나날이었다.
애초에 저승에 있는 건데 어찌 괜찮다고 할 수가 있을까.
“어차피 5년 동안 여기 있어야 한다면, 차라리 제 밑에 들어와서 편하게 일하다가 육체를 얻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제 밑에서 3년. 딱 3년 동안 열실히 일하시면 제가 육체를 얻게 해드리죠. 하시겠습니까?”
“···한 가지 더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보세요.”
“3년 뒤에 저를 저승에서 꺼내주겠다고요.”
“그건···.”
대답을 하기보다 저승왕을 돌아봤다.
육체를 얻는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지만, 저승에서 꺼내주는 건 내게서 벗어난 일이었다.
망자의 주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저승왕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
“네가 3년 동안 열심히 일한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저승왕이 동의했다.
한예림은 그렇다면 바로 일을 하겠다고 한다.
나는 그에 만족하며 그녀를 은행원으로 임명했다.
[‘망자 한예림’을 은행원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저승왕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저승왕의 사전 동의가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망자 한예림’의 소속이 ‘저승 3계’에서 ‘차원 은행’으로 이양됩니다.]
순간적으로 붉은 실이 보였다.
한예림의 목을 목줄로 묶고 있던 그 실은 저 멀리 어딘가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실이 끊어지면서 차원 은행과 연결되었다.
한예림의 대한 모든 권한이 내게로 넘어온 것이다.
그것을 저승왕도 느꼈는지 경악서린 눈으로 나와 한예림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 이건···!”
“비밀로 하죠.”
그녀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건 밝혀져서는 안 되는 거였다.
단순히 은행원으로 받아들였을 뿐인데, 그에 관한 뭐든 권한이 내게로 넘어오다니.
어쩌면 시스템 전체를 흔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한예림을 가지면서 크게 손해를 본 것도 없었다.
저승왕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그녀를 뒤로한 채 이제는 내 사람이 된 한예림을 바라봤다.
“앞으로 잘 해봅시다. 한예림 은행원.”
“잘 부탁드립니다.”
한예림이 내게 고개를 숙인다.
나는 그녀를 내 뒤로 보내며 다른 망자들의 면접을 진행했다.
이번 면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별로 없었다.
한예림을 제외하고는 내게 도움이 될 사람이 없었다.
내가 면접을 보는 동안 한예림은 내가 주입 시켜준 지식을 빠르게 습득했다.
원래 은행 일을 해서인지 그녀는 최동수와 다르게 큰 고통을 느끼지도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지식이기도 하고, 시스템의 대한 이해만 하면 되니 큰 어려움도 없었다.
‘그녀를 얻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려나.’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은 그녀로 충분했다.
저승에 고객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하나뿐인 창구에는 그녀 하나만 있어도 충분히 잘 돌아갔다.
나중에 은행이 더 커졌을 때 은행원을 늘리고, 지점장을 임명해야 겠지.
지금은 그녀 혼자서 지점장 겸, 은행원으로 충분했다.
‘그나저나 저승에는 고객이 없어도 너무 없을 것 같은데.’
애초에 코인 자체를 잘 쓰지도 않는 저승이었다.
망자들은 시스템을 사용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손님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저승은 손님이 찾아오기에는 여러모로 메리트가 없었다.
그 말은 곧 이곳에서 내가 벌 수 있는 코인도 별로 없다는 것.
저승왕에게 코인을 빌려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기는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저승을 어떻게 잘 다듬어 보면 코인을 쓸어담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이제 코인을 빌려드리겠습니다.”
망자들을 전부 내보내고, 코인을 빌려준다는 내 말에 저승왕이 바짝 긴장을 했다.
그녀의 등급에 맞는 대출 창을 떠올리며 코인을 빌려주려 하는데, 이걸로 만족해도 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좀 더 코인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안 빌려주나?”
내가 머뭇거리고 있으니 저승왕이 나를 재촉한다.
빌려주면 되는데 잠시 망설여졌다.
이대로면 충분할까. 방법이 더 없을까.
차원 은행을 건설했고, 직원을 고용했다.
그리고 저승왕에게 대출을 해준다.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여기서 좀 더 뭔가를 추가할 수 있지 않을까.
이대로 돌아간다면 저승 9계 지점 차원 은행은 발전 가능성이 없었다.
저승에 놀러오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승에 거주하는 거주민들이 은행을 자주 이용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이대로 방치될 것 같은 불안감이 나를 휘감았다.
기껏 만든 지점이 제대로 수익도 내지 못하면 상당히 슬플 것 같다.
‘저승, 저승에서만 자라는 것들··· 관광객, 테마파크···.’
불현 듯 한가지가 떠올랐다.
저승에 가장 어울리는 방법.
“저와 사업을 하나 하지 않겠습니까?”
“사업?”
의문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말하기 전에 방금 떠올린 것을 정리했다.
“네. 사업이요. 저승왕께서는 현 상황에 만족하십니까? 오로지 마석으로만 코인을 벌 방법이 있는 지금의 상태가요.”
“아니. 내가 미쳤나?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방법을 찾고 싶다.”
저승왕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코인을 마다할 미친놈이 어디있겠냐며, 한번 빚을 지고 나니 어떻게 해서든 코인을 벌고 싶다고 한다.
주먹을 불끈 쥐면서까지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내가 생각한 건 나 혼자서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저승의 주인인 그녀가 추진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저승왕께서 그러셨죠. 시스템이 마석을 제외한 다른 요소들을 막아서 코인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제한되었다고.”
“그랬지.”
“그렇다면 안에서 밖이 아닌, 밖에서 안에 들어와 코인을 쓰게 하면 어떻습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무언가를 팔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되잖습니까.”
“그 말은 물품을 팔지 않는데 코인을 벌 수가 있다는 건가?”
“그렇죠. 아니 이것도 어떻게 보면 파는 거긴 한데, 간단하게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겠나.”
코인을 벌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빛이 났다.
뭐든 수용할 수 있다며 자세를 다잡는 그녀에게 나는 머릿속에 정리했던 것들을 하나씩 꺼냈다.
“시스템에 귀속되어 있는 차원들 중에는 저승왕께서 다스리는 저승이 유일하다시피 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마계나 천계가 아니라면 시스템에 귀속된 생물들은 죽으면 전부 이곳으로 온다.”
“그걸 이용하는 겁니다.”
“···?”
내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광 사업을 하는 겁니다.”
“관광 사업···?”
“네. 제가 보기에 저승에는 구경할 거리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본 건 많지 않지만, 가볍게 생각만 해도 그 정도는 떠올릴 수 있었다.
저승에 대한 것들은 현대에서도 종교나, 소설 등등의 것들로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될 때도 있다.
하다못해 저승과 관련된 영화들마저 나오지 않았던가.
그때 봤던 걸 생각하면 대충 저승이 어떤지는 유추할 수 있다.
“삼도천, 지옥불, 얼음감옥 등등··· 구경할 거리가 많아도 너무 많죠.”
“음···.”
“관광 사업이라고 해서 막 거창한 걸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음··· 놀이공원을 아십니까? 아니면 놀이터라던지.”
“안다. 오락거리가 많은 곳이라는 것 정도는.”
“그러면 설명이 빠르겠네요. 저승을 그렇게 만들면 됩니다. 수입 거리가 없다? 그러면 저승을 관광지로 만들면 됩니다. 그러면 수입이 없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죠.”
“저승을 관광지로 만든다···.”
그녀가 제 턱을 매만진다.
한번도 저승을 관광지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누가 죄의 벌을 받는 곳에 관광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한 내가 이상한 거지.
그런데 이건 의외로 가능성이 있었다.
저승 테마파크.
이름만 들어도 좋지 않은가.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요. 만약 하시겠다고 하면 저는 충분히 투자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녀가 하겠다고 한다면, 나랑 계약만 한다면 얼마든지 투자를 할 마음이 있었다.
생각해 봐라. 무려 저승이다.
어지간한 귀신의 집 가지고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곳이다.
저승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 많고 많은 차원에서 괴짜들이 없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이들이 분명 있을 거다.
그리고 굳이 그런 이들이 아니더라도 성좌들이 올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면 된다.
예를 들어 지옥불과 삼도천을 합쳐 만든 온천이라거나, 저승 하나하나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체험장이라거나.
잘만 다듬어 보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내가 그것을 말하니 저승왕도 혹한 듯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건 시스템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금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현재 내게는 그러한 것들을 만들 자본도 없을뿐더러 빚을 갚아야 한다.”
“제가 대신 빚을 갚아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더해 자금도 어느 정도 보태드리죠.”
“정말인가?”
“네.”
놀라 눈을 부릅뜬 그녀에게 부드러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단 계약서를 쓰셔야죠.”
아주 좋은 내용의 계약서를.
*
“은행장님께서는 언제나 제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을 하시는군요.”
내 호출에 불려 나온 No. 72가 나를 바라보며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저승왕과 계약을 하기 전, 나는 관리자를 불러냈다.
그리고 저승왕과 했던 얘기들을 그에게도 똑같이 했다.
“···그래서 관리자님의 의견을 묻고자 합니다.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라서요.”
“우선 저희 대답은 ‘괜찮다’입니다. 저희야 기존에 납품받기로 한 마석만 제때 받을 수 있다면 상관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저승왕이 이 계약 조건을 받아들이겠답니까? 이건 아무리 봐도···.”
No. 72가 이건 노예 계약이지 않냐는 말을 하려다 황급히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