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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44화 (44/113)

제44화

핏줄이 잔뜩 돋아난 벽과 맨살을 밟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바닥을 밟으며 별 세 개를 따라갔다.

그는 복도의 끝에 있는 웅장한 문 앞에서 멈춰섰다.

관자놀이에 뿔이 달린 거대한 해골 병사 두 기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문.

그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말했다.

“왕이시여.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안에서 대답은 없었다.

끼이익-

대답 대신 거대한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탑처럼 높게 쌓여있는 서류들이었다.

방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서류 더미들 사이에서 한 여자가 업무를 보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다.

내가 이곳에 오게 만든 주된 원인이자, 은행장실에서 나와 대화를 나눴던 저승왕이다.

그래도 그때는 나름 지금보다 생기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처럼 폐인이 되어 있지는 않았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줄 알았는데.”

나를 힐끔 올려다본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일을 뒤로 미루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안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둘러봤다.

“좋은 시간 되시길.”

뒤에서 별 세 개 선비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문을 닫았다.

철문이 닫히고 집무실을 가득 채운 침묵에 뻘쭘해졌다.

나를 부른 당사자가 내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이 서류에만 집중하니.

어째서 빨리 왔냐는 말을 끝으로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앉을 의자를 내어준 것도 아니고 철저히 무관심이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마치 내가 급해서 그녀를 찾아온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급할 게 없단 말이지.

바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내 시간을 빼앗을 이유가 되지 못한다.

“바쁘신 것 같은데, 다음에 한가하실 때 오겠습니다.”

10분이나 기다려줬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넘쳐날 정도로 기다려줬다고 볼 수 있었다.

내가 시간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내게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을 붙들고 있을 마음은 없었다.

나야 그녀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다른 차원을 알아보면 된다.

무엇보다 이곳에 차원 은행을 연다고 해서 그리 이득을 얻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온통 불 투성인데다가, 망자들만 가득한 곳인데 고객이 있을 리가 없지.

그녀에게 돌아가겠다고 하며 뒤돌아서니, 등 뒤에서 그녀가 나를 제지했다.

“어딜 가려는 거지?”

내가 돌아가려는 기색을 보이자 입을 열다니 이건 좀 너무한데.

아무리 그래도 나는 손님 그 이상의 대우를 받아야 마땅한데.

이건 뭐 부하 취급만도 못하니.

“돌아가려 합니다.”

“어째서?”

“바쁘신 것 같아서요.”

“여기까지 와놓고서 돌아간다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내가 아주 작은 실수라도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분위기였다.

우리를 빠져나온 호랑이를 마주하고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나한테 아무런 보호책이 없다면 위험했겠지만.

‘코인이 필요한 상황에서 나를 공격할 리가 없지.’

나는 대출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코인이 필요 없어지지 않는 이상 나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코인이 필요없게 될 일은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거다.

내게 코인을 빌린 그 순간부터 나를 더욱 필요로 하게 될 테니까.

“네. 이렇게 직접 찾아뵈었지만, 저승왕께서는 현재 업무에 바쁘시지 않습니까. 저와 대화를 할 시간도 없는 것 같은데, 저는 이렇게 한가롭게 기다려줄 정도로 시간이 여유롭지 않습니다.”

“···.”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은연중에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른 기세가 나를 압박한다.

그 기세에 맞춰 반지에서 보라색 연기가 흘러나와 나를 압박하는 기세를 막아냈다.

“저승왕께서 착각하시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제가 급해서 온 게 아닙니다. 저승왕께서 저를 필요로 부르신 건데. 그런 저를 이렇게 대우하신다면 저로서는 이번 거래를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협박이요? 설마요. 저는 아직 살고 싶습니다. 세상에 죽고 싶은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

“다만 아무리 저승왕이라고 하더라도 제 고객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요. 계속 그렇게 강압적으로 나오시면 저도 제 나름대로 대처를 하겠죠.”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을 곱씹으며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하긴··· 그놈을 데려왔을 정도니···.’하고 중얼거렸다.

뒤에 말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속 그러시겠다면 저는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아,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은 문제 삼지는 않을 겁니다.”

문제 삼는다고 해서 내가 그녀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녀와 적대 관계가 되기는 싫었다.

지금도 충분히 그녀를 자극하기는 했지만, 이건 언제든지 회복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일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

그녀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쉰다.

그녀가 얼굴에서 손을 때기가 무섭게 나를 압박하던 기세가 사라졌다.

“미안하군. 내가 너무 예민해져 있었어.”

“아닙니다. 업무가 이렇게 많으신데 그러실 수도 있죠.”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별 거 아니라고 말하니,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그래, 거래 상대를 이렇게 내버려 두는 건 이치에 맞지 않지.”

따악.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니 겹겹이 쌓여 있던 서류들이 구석으로 밀려났다.

어떻게어떻게 꾸역꾸역 밀려난 서류들 사이로 탁자 하나와 소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걸어갔다.

내게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건넸다.

“흠··· 너는 인간이니···.”

내가 자리에 앉으니 그녀가 나를 슥, 훑어보며 턱을 매만졌다.

그러더니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질거억-

불쾌한 소리가 나며 허공에 균열이 생겨났다.

끈쩍이는 균열에 손을 넣었다가 빠져나온 그녀의 손에는 붉은 집무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화사한 금색의 작은 병이 쥐어져 있었다.

“내가 대접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군. 아무래도 저승이다보니, 생자가 먹을 만한 게 없어.”

“아닙니다. 챙겨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걸 마셔도 되는 걸까.

금색 액체가 탐스럽기는 하지만, 이걸 건네준 존재가 저승왕이기에 꺼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고.

설마 죽이기라도 하겠냐는 심정으로 그 액체를 벌컥벌컥 마셨다.

‘어? 이거 상당히···.’

달짝지근한 게 맛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차가운 냉수를 마신 것처럼 금색 액체에서 나온 차가운 냉기가 몸을 식혔다.

발바닥과 팔, 등의 피부들이 간질간질하더니 투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껍질들이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감출 수 없는 활력이 몸 전체를 가득 채우는 걸 느꼈다.

No. 72가 건네줬던 차와는 다른 느낌으로 몸에 힘을 불어넣어줬다.

그 느낌에 놀라 그녀를 바라보니, 어느새 해골잔을 꺼낸 그녀가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홀짝이며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놀랄 것 없다. 나도 선물을 받은 거니까. 내가 먹어도 아무런 효능이 없는 건데··· 확실히 인간은 인간이란 건가.”

“이거··· 뭡니까?”

“너도 알텐데. 그거 엘릭서다.”

“···?”

엘릭서라면··· 그 만능의 치료제를 말하는 건가.

하긴, 몬스터나 저승도 있는 와중에 그런 물약이 없다고 확신하는 게 더 이상하겠지.

하지만 이런 곳에서 엘릭서를 마시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아는 엘릭서라면 사지가 절된다거나, 죽지만 않는다면 회복시킬 수 있는 만능의 약이다.

거기다 어떤 소설에서는 엘릭서를 불로장생의 비약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만큼 귀한 게 분명한데, 내가 알고 엘릭서와 다른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귀한 걸 이리 쉽게 내줄 리가 없다.

“그걸 다 마셨으니 못해도 수명이 이백년은 늘었겠네.”

그런 내 생각이 바뀌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백년라니. 사람의 최대 수명은 백년이다.

그런데 그에 배는 되는 수명을 추가로 얻었다니.

그 귀한 걸 아무렇지 않게 마셨다는 마른침을 삼켰다.

더 마시면 좋겠지만, 이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너무 큰 충격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크게 심호흡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 엘릭서라는 건 지금 당장은 힘들 더라도 코인을 충분히 모으면 살 수 있는 소모품이 분명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차원을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니, 오히려 엘릭서보다 더한 영약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당장에 할 일에 집중하자.

“그럼 제가 얻을 수 있는 땅에 대해 알려주시겠습니까. 차원 은행이 들어서기 알맞은 땅인지를 먼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코인을 먼저 빌려줄 수는 없나?”

“코인을 빌려드리기 위해서는 은행에 있어야 하는데, 현재 저승왕께서는 저희 은행에 방문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곳에 차원 은행을 개설하면 저승왕께서 멀리 움직이셔야 할 부담감도 줄어드실 겁니다.”

“그런가··· 알겠다. 내가 네게 줄 땅은 여기로 생각하고 있다.”

그녀가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도를 하나 꺼내 탁자에 펼쳤다.

그리고 거대한 성 안에 한 부분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이 터 비어있는 땅.

“여기면··· 정확히 어디있는 거죠?”

“그건 직접 보는 게 낫겠네.”

그녀가 벌떡 일어나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한다.

그녀를 따라 움직이니, 성 곳곳을 돌아다니던 선비들이 저승왕을 발견하고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검둥이는 어딜 간거야? 내가 나왔는데도 얼굴 한 번 안 비치네.’

그녀를 따라가면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검둥이가 보이지 않았다.

나를 호위하는 경호원이 맞나 의심이 될 정도로 무책임한 모습에 한숨이 나온다.

그것도 잠시 그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성문과 가까이 있는 비어있는 공터였다.

딱 봐도 좋은 자리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알맞은 위치였다.

이 정도로 생각해 줄거라고는 몰랐기에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손을 붙잡았다.

“읏···!”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이 느껴진 부위를 보니, 오른손 손등 위로 작은 불길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 땅을 네게 양도한 거다.”

대수롭지 않은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문신 하나쯤이야 땅을 얻을 수 있으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잠깐만··· 그런데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잠시 공터 앞에 서서 차원 은행 상태창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리고 은행 건설을 발견하여 그것을 눌렀다.

[현재 보유 자금이 1조가 넘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땅이 1개 있습니다.]

[차원 은행을 건설하실 수 있습니다.]

[건설하시겠습니까?]

나는 지체하지 않고 ‘예’를 눌렀다.

[차원 은행의 건설 비용 50,000,000,000코인이 소모되었습니다.]

어,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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