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38화 (38/113)
  • 제38화

    마석 오천 개.

    그 말을 듣고 내가 그의 말을 들으려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환전 업무를 위해서 마석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마석 상점 주인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석들이 전부 내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었다.

    나도 마석을 사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석 오천 개는 큰 메리트를 가지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마석 오천 개가 들어온다.

    코인으로 따지면 오억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내게 도움이 된다.

    그러니 그의 얘기를 듣지도 않고 내쫓기보다는 뭐 때문에 나를 부르려고 하는지 알아볼 필요도 있었다.

    ‘거기다 왕이라고 했으니 그 차원에서 나름 힘을 쓰는 존재일 테고, 내가 그곳에 차원 은행을 건설하는 데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마석을 떠나서 10개의 차원에 차원 은행을 건설해야 하는 나로서는 마냥 나쁜 일이 아니었다.

    지금 내게 따로 움직이게 할 직원도 없었기에 어쨌든 은행을 지으려면 내가 움직여야 했으니까.

    어차피 가야 한다면, 그 차원에 힘이 있는 존재의 도움을 받는 게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너무 위험한 냄새가 나.’

    내 앞에 있는 두 명의 남자들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녹스나, 불멸의 전사처럼 막 강한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 비하면 저승이와 검둥이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사나운 기세도 없었고, 싸울 의지가 있나 싶을 정도로 점잖았다.

    그런 의미에서 위험하다는 게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꺼림칙하단 말이지.’

    그들의 분위기는 너무 음습했다.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 마치 살아있는 시체가 있다면 이러할까.

    그렇다고 그들이 녹스가 부리던 언데드와 같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언데드보다 죽음에 더 가깝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겠지.

    그런데 정말이었다.

    그들은 녹스의 언데드를 봤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죽음이 느껴졌다.

    이름부터가 저승이지 않은가.

    죽음을 관장하는 그 이름.

    그래서인지 더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저 사람이 저승사자라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거기다 그들의 왕이라면···,

    ‘염라대왕이나 저승시왕 같은 존재들이겠지?’

    어찌 됐든 일부로 적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내가 마음대로 행동해도 안전하다고 확신이 들 때가 아니라면, 너무 강하게 나가서 좋을 건 없었다.

    “절대 마석 오천 개 때문에 듣겠다는 게 아닙니다. 사연이 있는 것 같아서 이유를 들어보는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저승이가 기품 있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고객님의 왕이시란 분이 저를 부르시는 이유가 뭔지 말해주시겠습니까.”

    「그전에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를 비밀로 해주시겠다고 약조해주실 수 있습니까?」

    약속을 해줘야 말을 하겠다는 그의 얼굴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고객의 비밀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부탁하지 않아도 나는 그의 말을 다른 곳에 퍼뜨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사실 말할 곳도 없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는 은행장이다. 은행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내 책임이다.

    그러니 나는 문제가 생길 일을 절대 할 생각이 없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저승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합니다. 저희 왕께서는···

    .」

    “잠시만 멈춰보시겠습니까.”

    「···?」

    내가 중간에 그의 말을 끓으니 그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이건 내 개인적인 문제이기는 한데 그와 대화를 하는 데 결정적으로 불편한 게 있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잖아.’

    저승이는 글을 써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그런데 글을 쓰는 속도가 느려도 너무 느렸다.

    고고한 선비처럼 붓이 움직이는 속도고 세월아 네월아였다.

    차를 마시며 한가로이 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군다나 옆에도 고객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느리게 글을 쓰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말을 하면 되는데, 왜 말을 하지 않는 겁니까?”

    「···.」

    저승이가 입을 다물고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불을 쥔 손이 한지 위에서 멈춘 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한지를 손에서 놓았다.

    한지가 주르륵 그의 다리를 타고 땅으로 흘러내렸다.

    “말 안 하실 겁니까? 저는 나름 바쁜 존재라서요.”

    내 말에 그가 입을 달싹인다.

    말을 하고는 싶은데, 차마 하지는 못하겠다는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말을 안 한지 벌써 3분이 지났다.

    언제까지고 그를 기다려줄 수는 없다.

    그가 정말로 말을 하지 못한다면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건 또 아니란다.

    “말을 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면서 여전히 말이 없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차라리 글을 쓰라고 할까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시간이 더 오래 걸릴 확률이 높았다.

    좋든 나쁘든 글이 아닌 직접적으로 말로 하는 게 더 빠르다.

    글 쓰는 거 자체가 그리 느린데, 어찌 말보다 빠르다 할 수 있을까.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알고 있는데 괜찮습니다. 저는 모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을 할 수도 있다.

    내게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의사소통이라는 특성이 생긴 후로 종족 사이에 언어라는 장벽이 허물어졌으니까.

    그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나는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

    한참을 망설이며 머뭇거리던 그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내 말이 들리십니까.」

    “당연··· 윽!”

    당연하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보다 빠르게 끔찍한 두통이 나를 덮쳤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저승이가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이 들으면 안 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특성으로 ‘의사소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의 격이 상승합니다.]

    [‘의사소통’으로 ‘죽음’과 대화하실 수 있습니다.]

    고통은 잠깐이었다.

    수백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영원과도 같았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쉬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저승이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괜찮다며 그에게 손을 저었다.

    “계속 얘기하세요.”

    「이, 이게 어떻게···.」

    처음만 힘들었지 이제는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듣기 좋은 그의 목소리에 감탄했다.

    얼굴만큼이나 목소리도 좋다고 해야 하나, 과장 조금 보태면 붙잡아다가 평생 옆에서 노래만 부르게 하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는 저승이의 반응이 이상했다.

    마치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찌 생자가 망자의 말을 들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 놀라는 부분이 그쪽인가.

    하긴 놀랄 만도 하다.

    원래였다면 내가 그의 말을 알아듣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도 의사소통이라는 특성을 얻지 않았다면 그의 말을 알아듣기는커녕, 이렇게 살아 움직일 수도 없었겠지.

    ‘녹스의 말도 알아들었는데 이런 걸로 놀랄 것도 없지.’

    언데드도 어떻게 보면 망자가 말하는 것과 같다.

    죽음이나 언데드나 거기서 거기인데, 무슨 차이가 있다고 이러는 건지.

    「크, 크흠.」

    그것도 잠시 그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급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의 새하얀 손이 자신의 가슴을 매만진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왕께선 은행장님을 뵙고 싶어하십니다.」

    “그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했던 얘기 말고, 어째서 저를 부르는지 말해주시면 됩니다.”

    「왕께서···.」

    “또 왕께서 모시라 하셨습니다. 이런 소리 같은 걸 하면 바로 쫓아낼 겁니다.”

    「···.」

    그 말을 하려고 했었는지 그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눈을 데구르르 굴려 어떤 말을 해야 될지 고민했다.

    그것도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입을 열었다.

    「저희 왕께서는 현재 움직이실 수 없는 상황이십니다.」

    “어째서죠?”

    「밑에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반란? 지금 그 위험한 곳에 저보고 오라는 겁니까.”

    누굴 죽일 일 있나.

    아무리 급하다 해도 그렇지 전쟁터에 사람을 데려가려고 하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그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황당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 내 말에 그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바, 반란은 현재 진압되었습니다. 왕께서는 반란으로 인해 생겨난 업무에 발이 묶이신 상태이십니다.」

    “아. 그런가요.”

    「원래 반란은 자주 일어나기도 했고···.」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야 뭐···.

    뭔가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잘 듣지도 못했을뿐더러 굳이 설명하지 않는 걸 보니 내가 알지 않아도 되는 내용 같아 그냥 넘어갔다.

    「왕께서는 은행장님을 꼭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음··· 정 제가 보고 싶으시다면 나중에 일을 끝마치고 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저희 왕께서는 남들부터 뒤처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보시다시피 저희를 먼저 보내 계좌를 만들게 하셨죠.」

    “음···.”

    성격이 급하기는 급한가 보다. 저렇게 직원을 먼저 보내는 걸 보면.

    내가 그를 불쌍하게 바라보니, 그가 그렇게 볼 거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저도 이 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백 년 살아오면서 차원 은행은 처음이라. 돌아가면 동료들에게 말해줄 게 많겠군요.“

    새하얀 볼 위에 홍조가 띄었다.

    자신이 이곳에 와서 얼마나 좋았는지 일일이 나열하려는 그의 모습에 나는 급히 손을 저어 본론으로 넘어가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찾아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업무를 다 처리하고 오면 되니까요.“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저희의 왕께서는 20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겠다고 하시더군요. 영겁의 생을 살아오신 분이 그 정도도···.」

    ”자, 잠깐만요. 지금 20년이라고 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20년.」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손을 들어 이마를 덮었다.

    20년 동안 안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니··· 나로서는 절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어째서 나를 부르려고 하는지도 조금은 이해되었다.

    20년 동안 업무를 주야장천 봐야 하니, 답답할 수밖에.

    ”지금은 반란을 완전히 잠재운 건가요?“

    「네.」

    그의 대답을 들으며 곰곰이 고민했다.

    어차피 나는 차원을 돌아다녀야 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이의 차원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쪽에서 초대를 한다면, 그게 왕이라면 나는 제법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은행을 건설할 수도 있었다.

    거기다 반란도 빠르게 진압한 걸 보면 그 왕이란 사람이 나름 힘 좀 쓰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간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가 꼭 가야 할 명분.

    내가 움직임을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확실해야 했다.

    ”제가 감으로서 얻을 수 있는 마석 오천 개가 다입니까?“

    「어··· 그건.」

    ”설마 달랑 마석 오천 개를 주고 끝입니까? 그렇다면 실망인데, 아무리 저희가 신생기업이라해도 그렇지 겨우 오억 가지고 한 기업의 장을 움직이려 한 겁니까?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모르겠네요. 저를 어떻게 봤는지 모르겠지만 이러면 곤란합니다. 마석을 주려면 적어도 오십 만개 이상을 주던가. 아니면 다른 것을 더 준더가 해야지요. 설마 진짜로 그게 끝은 아니겠죠?“

    「음···.」

    내 물음에 그가 당황한다.

    그 이상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에 나는 왠지 얻을 수 있는 게 많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당황하면 내 페이스에 휘말리기 쉬우니까.

    ‘아, 이거 간만에 제대로 한 건 물겠네.’

    냄새가 났다.

    그것도 엄청난 돈 냄새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