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No. 72가 내게 말한 두 가지는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적어도 몇 개월은, 아니 어쩌면 몇 년은 걸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고민할 시간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No. 72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겠다는 모습이었다.
‘하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려나.’
쉽사리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내가 아쉬워서 찾아온 건 맞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그가 말한 두 가지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두 가지 전부가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한 가지는 시간만 있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첫 번째 제안은 보유 자금을 10조 모으는 거다.
이건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소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문제는 두 번째였다.
‘열 개의 차원에 차원 은행 지점을 설립하라니···.’
나보고 지구에만 있지 말고 다른 차원에도 가라고 한다.
심지어 그 차원들에 차원 은행을 건설하라고 했다.
무려 10개나.
은행 지점 하나를 건설하기 위해서 몇 년이 걸린다.
건물을 짓는 것부터, 그 지점에서 일할 직원을 뽑는 것까지.
거대한 은행이라면 본사에서 뽑아 보내면 되겠지만, 이제 막 생겨 직원이 나까지 합 해 네 명이 전부인 차원 은행은 그게 힘들었다.
내가 일일이 돌아다니며 운영을 하기도 힘들뿐더러, 그만한 은행을 지을 돈도 없었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어쨌든 화폐는 필요하니까.’
은행에는 가상화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매개체인 지폐와 동전이 있었다.
현물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 고객들이 더욱 원활하게 은행을 방문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다른 차원으로 가라니.
“으음···.”
머리가 아팠다.
은행 지점을 건설하는 건 시간이며 돈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거기다 나와 같은 경우에는 직원도 일일이 찾아 뽑아야 했기에, 시간이 얼마나 들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골치 아프네.’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지만,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게 너무 어려워 머뭇거릴 뿐이었다.
“기한이 있는 겁니까?”
“아니요. 기한은 없습니다. 애초에 이 일은 단시간에 되는 일이 아니기도 하고,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은행장님께서 편하실 때에 하시면 됩니다.”
“그럼··· 하겠습니다.”
시간제한이 없다는 말에 나는 하기로 했다.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면 하라고 해도 못한다.
코인을 버는 것도 그렇고, 은행은 하루 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제한이 없이 언제라도 상관없다면 말이 달라진다.
내가 확신이 들 때에, 이제 해도 된다고 생각이 될 때에 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위에는 그렇게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습니다.”
“예. 말씀하세요.”
“다른 차원에는 어떻게 가는 겁니까?”
“아. 그렇죠. 그걸 알려드려야죠.”
그가 잊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만남의 광장으로 이관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만남의 광장 중앙으로 가시면 포탈이 하나 있을 겁니다.”
“포탈 말입니까?”
“네. 거기에 접수원이 있을 텐데, 그에게 가고 싶은 차원을 말하면 됩니다. 다만 차원을 이동하는 포탈이니만큼 코인이 들기는 하겠지만, 현재 은행장님이라면 어렵지 않게 내실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게 제 일이니까요.”
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물어볼 게 더 있었는데 까먹고 있었네요.”
“네. 말씀하세요.”
그가 무엇이든 물어보라며 내게 손짓했다.
나는 그에게 녹스가 은행을 나올 수 없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가 보기 드물게 진지한 얼굴을 하며 내 말을 경청했다.
“음··· 그렇군요. 게이트 키퍼가 직원이 되는 경우가 드물어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선 답을 말해드리자면, 그가 은행을 나가는 건 가능합니다.”
“아···!”
다행이다.
그가 방법이 없다고하면 어쩌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법이 있다고 하니 걱정이 사라진다.
“방법이 뭐죠?”
“은행 영업시간이 끝나면 마음대로 나갈 수 있습니다.”
“···?”
“말 그대로입니다. 그가 은행을 나가지 못하는 건, 그의 일이 은행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행을 지켜야 할 이가 은행을 나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죠. 그러니, 반대로 생각하면 은행이 마감되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습니다.”
“···.”
간단했다.
너무도 간단해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어째서 저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던 걸까.
그의 말대로 그는 은행 영업시간에 나가려고 했다.
당연히 그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안 하고 나가려 하니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던 일인데, 내 멍청함에 한숨을 내셨다.
“감사합니다.”
“궁금중은 다 풀리셨습니까? 다른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원래 있던 자리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그가 손가락을 튕긴다.
시야가 햐앟게 변했다가 도로 돌아오며 은행의 내부가 보인다.
[현재 시각 19:32]
은행 마감까지 앞으로 2시간 반이 남았다.
은행은 여전히 고객들로 북적였다.
No. 72와 했던 대화 내용을 복기하고 있을 때.
쿵쿵!
누군가가 문을 부실 듯이 두드렸다.
“···?”
그에 놀라 문을 바라보니, 녹스가 고객 둘을 데리고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고객들이었다.
“네. 들어오세요.”
내가 문 너머로 말하니, 녹스가 문을 열어주며 그 안으로 두 명의 고객을 들여보냈다.
문이 닫히고 그 둘을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다음에는 한 사람씩 보내라고 알려줘야겠네.’
원래 은행 일은 은행원 하나가 고객 하나를 담당하는 게 보통이었다.
지금처럼 한 번에 두 명을 상대하는 건 드물었다.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1년의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정도였다.
그래도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최대한 잘 상대해야지.
‘그런데 이 둘 묘하게 닮았단 말이지.’
팔짱을 풀어 책상 위에 손을 올리면서 그 둘을 살펴봤다.
그들의 옷차림이며 얼굴의 외형까지 틀렸지만, 이상하게도 둘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옷차림도 다르고.’
한 사람은 고려 시대에서나 볼 법한 선비 복장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현대의 샐러리맨이랑 비슷한 옷차람이었다.
거기다 선비는 여성스러운 반면, 샐러리맨 쪽은 한없이 남자다워 카리스마가 엿보였다.
그런데 어째서 둘이 닮았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옷 색깔 때문에?’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옷차림이 다르기는 했지만, 그 둘의 옷 색은 똑 같았다.
선비는 새하얀 얼굴을 제외한 한복과 갓이, 샐러리맨도 마찬가지로 새하얀 얼굴롸 다르게 입고 있는 정장이 와이셔츠까지 검은색이었다.
마치 저승사자를 보는 듯한 그 모습과 분위기에···.
어, 잠깐만 그렇네. 분위기가 너무 비슷해.
왜 그렇게 닮았다고 생각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둘은 분위기가 닮아도 너무 닮았다.
어둡고 사람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이끌어내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두 분의 이름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우선 일을 하기 전에 그 둘의 이름을 통해 등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둘은 말이 없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건가 의심이 될 정도로 내가 여러번 물었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름을 말하시지 않으면 상담을 해드리기 어렵습니다.”
10분 가까이를 그들에게 대답을 듣지 못해 나도 모르게 살짝 짜증을 냈다.
아무리 다이아 등급 이상의 고객이 적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얘기할 게 없으면 내보낼 수밖에 없다고 하니, 그제야 그들에게서 반응을 볼 수가 있었다.
선비가 품에서 새하얀 한지와 붓을 꺼냈다.
그 옆에서는 샐러리맨이 현대의 필수품인 스마트폰을 닮은 물건을 꺼냈다.
다만 그 크기가 40인치 컴퓨터 화면에 버금갈 정도로 컸다.
저 정도로 큰 걸 어떻게 품에서 꺼낸 건지 신기했다.
슥, 스윽-
탁, 타다닥-
선비와 샐러리맨이 서로 각자의 방법을 통해 글을 썼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거없이 동시에 자기들이 쓴 것을 내게 보여줬다.
「제 이름은 저승이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검둥이입니다.』
이름이 ‘저승이’, ‘검둥이’라고?
무슨 그런 이름이 다 있지.
마치 애완동물에게 짓는 것과 같은 이름이 아닌가.
차마 그들 앞에서 웃을 수가 없어서 책상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손으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름을 듣고 웃는다면 고객들이 나빠할 수 있다.
애써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시스템에 그 이름을 검색했다.
[‘저승이’님의 등급은 ‘다이아’입니다.]
[‘검둥이’님의 등급은 ‘다이아’입니다.]
둘의 등급은 다이아로, 딱 내가 정한 기준에 들어온 고객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상대하려 입을 열었다.
“계좌가 있으신 걸 보니, 차원 은행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시겠군요. 다른 분에게 계좌를 보내셔도 되고, 새로운 걸 알아보고 싶으시다면 이번에 나온 적···.”
「저는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닙니다.」
선비가 내 말을 중간에 끊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행은 코인을 송금하거나, 저축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 그런 이유 때문에 온 게 아니라니, 그럼 은행에 올 이유가 없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니, 그가 바로 다음 말을 꺼냈다.
「저의 왕께서 당신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와,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본인이 직접 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의 부하를 보내서 찾아오라니.
이런다고 내가 순순히 갈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바빠질 은행에 내가 빠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디를 가란 말인가.
비록 파견 근무가 있기는 하나, 지금은 그걸 쓸 데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관리자와 한 대화로 머리가 아픈데, 거기가 어디라고 가겠는가.
적어도 다른 차원에 갈 거면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은행이 들어서기 알맞은 곳인지 확인한 후에 갈 것이다.
지금처럼 무작정 찾아와 가자고 한다고 갈 내가 아니었다.
“고객님. 안타깝게도 그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현재 은행에 업무가 많아 제가 갈 수도 없을뿐더러,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가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돌려서, 하지만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자 그가 잠시 멈칫했다.
내가 이렇게 바로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얼굴이었다.
그게 참 웃겼다.
날 언제 봤다고 자기들이 오란다고 바로 올 거라고 생각한 건지.
「대가는 충분히 제공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대가가 뭐든 제가 그곳에 갈···.”
「마석 오천 개.」
“···.”
「저와 함께 가주신다면 하나의 가치가 10만 코인이 넘는 마석 오천 개를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또 말이 달라지지.
나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그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