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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36화 (36/113)

제36화

고객들은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점심시간이 다 될 때까지 금 등급보다 높은 다이아 등급 이상의 고객들은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너무 할 일이 없으니 심심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일을 하던 사람이 일을 하지 못하니 몸이 배기지 않고 버티는 게 이상하다.

“그래서 저는 이걸···!”

“최소 만 코인 이상은 넣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넣는 금액에 따라 얻으실 수 있는 금액도 달라지시는데, 그래도 최소 만 코인은 넣어야 본전을 찾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맘 같아서는···.”

“에헤이, 아무리 코인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오천 코인이 뭡니까. 못해도 삼만···.”

고객을 상대하는 최동수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업무를 시작할 때만 해도 고객들의 외형에 덜덜 떨던 그가, 지금은 떨지도 않고 화려하게 입을 털고 있었다.

어찌나 조리 있게 말을 잘하는지, 고객들은 듣던 도중에 하겠다고 소리쳤다.

“음···.”

녹스는 고객들의 분류로 무척이나 바빴다.

두 시간 정도 시간이 흐르니, 어느 정도 보고 배운 백예린도 동참해 고객을 분류했다.

그런데 분류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앞에서 막히는 걸 보았기 때문인지, 개중의 몇을 제외하고는 알아서 최동수의 앞에 줄을 섰다.

오히려 줄을 늦게 서면 설수록 늦게 상담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시험 정신과 같은 소모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할 게 없잖아.”

소파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남들은 바쁜데 혼자서만 한가한 현 상황은 느낌이 이상했다.

이게 은행장의 권력이라는 것인가 하는 흥분과 아무것도 하지 않아 따분하다는 기분이 공존했다.

‘하긴, 이제 막 일주일째인데. 벌써부터 다이아 등급 이상이 생겨나는 게 이상한 거지.’

카셀린과 불멸의 전사를 제외하고면 다이아 등급과 그 이상의 등급을 가진 고객들은 시스템의 관리자가 전부였다.

그들을 제외하고는 다이아 등급의 조건을 충족시킨 고객이 나타나지 않았다.

다이아는 그렇다치고, 미스릴 등급의 조건을 충족하는 고객도 없었다.

적금을 3년 채우면 금액과 상관없이 미스릴 등급의 제한이 풀린다.

뭐, 그 등급에 맞는 코인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한 번에 1억 코인을 거래할 수 없는 그들에게는 그것조차 큰 혜택이나 다름없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그들에게 3년이란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닌, 오히려 짧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덕분에 나만 배를 든든하게 채우네.’

고객들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차원 은행의 자금은 빠르게 불어났다.

최소 오천 코인에서 최대 백만 코인까지.

적금을 들기 시작한 그들 덕분에 조만간 보유 자금이 1조를 넘을 것 같았다.

이대로 한 달? 아니,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만한 금액을 모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1조라.

내가 평생 일해도 바라볼 수조차 없는 금액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벌 수 있다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울적한 게 참 묘했다.

‘어차피 오늘은 내 고객이 안 올 것 같으니···.’

이렇게 멍 때리고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좋다.

“저 잠시 어디 좀 갔다 오겠습니다.”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녹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의 얼굴에 ‘또?’라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

그 얼굴을 무시한 채 은행장실로 돌아와 관리자 호출기를 꺼냈다.

새하얀 돌에 볼록 튀어나와 있는 검은색 버튼을 누르자 새하얀 연기가 나를 휘감았다.

그것도 잠시 나는 주위의 공기가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 생각보다 저를 일찍 부르셨네요.”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의 관리자, No. 72가 나를 반겼다.

“예. 저도 이렇게 빨리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몰랐다.

화폐 건이 아니었다면 그를 다시 부를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귀한 손님을 세워둘 수는 없죠. 자, 여기에 앉으세요.”

그가 전처럼 손가락을 튕겨 다과가 올려진 책상과 의자를 만드는 묘기를 펼췄다.

이미 한 번 겪어봤기에 나는 익숙하게 가까이 있는 의자 하나를 당겨 앉았다.

“그래서 저를 무슨 연유로 부르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화폐를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No. 72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며 그가 내 의도를 알기 위해 눈을 굴린다.

“현재 코인 대신 사용되는 게 마석이라 들었습니다. 마석으로 물품을 사고, 마석으로 코인을 거래하며, 심지어 세금조차 마석으로 낸다고 하더군요.”

“음··· 네. 맞습니다. 현재 코인 거래 방식은 대부분 마석으로 이뤄지고 있죠.”

“저는 그 마석 대신 화폐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을 새로 만들려고 합니다.”

“···.”

고운 그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진다.

“마석은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마석은 너무 비싼 가격에 통용되고 있습니다. 마석을 거래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엄청난 손해를 보고···.”

그에게 화폐가 필요한 이유, 화폐를 만드는 과정 등 내가 구상했던 것들을 나열했다.

그는 차분하게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렇게 꽤 긴 시간에 걸쳐 설명을 마친 나에게 턱을 감싸쥐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No. 72가 말했다.

“화폐를 만든다고 하셨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

“현재 전 차원에서 98%의 거주민들이 마석으로 거래하고 있습니다. 비록 차원 은행이라는 코인을 관장하는 곳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그건 은행장님이 계시는 지구에 불과하죠. 아무리 다른 차원에서 성좌들이 방문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전체적으로 따지면 1%에 포함되지도 않습니다.”

“···.”

“시스템에 귀속된 차원이 총 몇 개인지 아십니까?”

“많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총 378,934,231개입니다.”

“···!”

“아, 방금 두 곳이 더 귀속되었네요.”

많은 차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성좌들이 끝도 없이 찾아오는 것을 보며 그 정도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억 단위로 떨어진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나라 하나로 따져도 지구에 다 담지 못할 정도다.

차원 하나에 백 명이 있다고 쳐도 무려 삼백억 명이다.

실제로는 그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거주민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조를 가뿐하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지구만 해도 70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거기다 심지어 시스템에 넘어오는 차원은 지금도 늘어나고 있었다.

“그 많은 거주민이 마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갑자기 마석 대신 새로운 화폐를 사용하라고 한다면, 그들이 과연 좋아할까요? 저는 왠지 그 반대라고 생각되는군요. 차원들에는 생각보다 대부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금이라 생각하고, 시간을 사기 위해서 코인도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는 이들이죠. 그런 이들이 있기에 화폐의 개혁은 더욱 힘듭니다.”

“···.”

“그건 은행장님도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의 변화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손실과 시간이 낭비되는지.”

“···네.”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나라에서 화폐를 새로 만들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화폐를 디자인하는 것부터 만드는 것.

그리고 기존에 있던 화폐를 새로운 화폐와 교환하는 것까지 몇 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무엇보다 마석을 환전해주는 것도 문제다.’

마석을 살 때와 팔 때의 가격이 확연히 차이가 났다.

살 때 100코인에 샀다면 팔 때는 70코인에 팔아야 한다.

무려 30%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전 차원에 있는 이들에게서 마석을 환전해주려면 파산에 이르는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거기다 대부들이 많다고 한다.

그들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마석을 대거 사용한다는 걸 보면, 그들이 새로 만들어진 화폐를 대거 소요하고 있을 거란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새로 만드는 화폐도 어지간한 양으로는 부족해질 수 있다.

“그 부분은 몰랐네요···.”

그와 대화를 나누니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그와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이건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무작정할 수 있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설마 이리도 어려울 줄이야.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싶었을 때, No. 72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장님의 구상은 나쁘지 않습니다.”

“···?”

뭐지, 이건.

이게 그 병 주고 약 준다는 건가.

한창 부정적인 얘기를 하다가 대뜸 긍정적인 말을 꺼내니 그걸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전체적인 면을 보자면··· 저는 개인적으로 그 의견이 좋다고 봅니다. 확실히 은행장님의 말대로 현재 마석의 거래 방식은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무익하죠. 일한 것에 비해 버는 것은 적으니, 불만이 많은 이들도 있고요. 저희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으나, 어쩔 수 없습니다. 코인과 마석의 차이는 너무 커서요.”

“···.”

“그런 의미에서 은행장님이 낸 의견은 좋았습니다. 은행장님의 말처럼 화폐가 만들어지면 지금처럼 불필요한 손실은 대거 사라지겠죠. 그로 인해 불법적인 이득을 보려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런 놈들을 관리하는 게 저희 일이니까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가능성이 극도로 낮은 내 의견을 이리도 좋게 반응해주는 것에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를 놀린다고 생각하기에는 그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했다.

“저는 은행장님을 지지하겠습니다. 애초에 제 일은 은행장님을 돕는 것이기도 하고, 시스템은 은행장님을 배척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은행장님이 계속해서 성장했으면 하고 있죠. 그리고 이 일이 성장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면 못할 건 없죠.”

“그럼···?”

“예. 저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은행장님의 옆에 설 것입니다.”

두리뭉술한 대답이기는 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시스템은 내 의견을, 화폐 제조 겸 유통을 수락했다.

“단, 바로 가능하다는 건 아닙니다. 저희에게도 준비 기간이 필요하고 그건 은행장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그렇죠.”

우선 화폐로 이용할 자원부터 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디자인을 할지, 얼마나 만들어야 할 지도 정해야 한다.

어떤 걸로 만들지는 대략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외에 준비할 게 많았다.

자원 조달자와 화폐를 만들 장인도 구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No. 72가 아직 자신의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며 이어 말했다.

“은행장님의 차원 은행은 분명 저희의 예상보다 빠르게 커가고 있습니다. 자금도 빠르게 불어나고 있을 테고요.”

“네.”

“하지만 이번 일을 하기에는 은행장님의 영향력은 너무, 너무 적습니다.”

그가 ‘너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나도 그건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내가 상대하는 고객의 수가 얼마나 적은지 깨달았다.

“그러니 은행장님은 지금부터 두 가지 일을 같이해주셔야 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내 얼굴도 점점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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