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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26화 (26/113)
  • 제26화

    촤아악.

    머리에 물을 끼얹었다.

    물을 퍼 머리에 붓고 또 부었다.

    끈적한 오물들이 물을 타고 흘러내렸다.

    코를 따갑게 하는 악취를 지우기 위해 500ml짜리 바디워시를 한 통이나 사용했다.

    십여 번이나 샴푸를 했고, 오물을 닦아내기 위해 사용한 샤워 타월이 다섯 개가 넘었다.

    두 시간 넘게 씻고 나서야 겨우 몸에 나는 악취를 지울 수가 있었다.

    이럴 때 엘더 리치가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을 뒤로 한 채 아공간에서 새 옷을 꺼내 입었다.

    향수를 뿌리고, 손목에 찬 메탈 시계를 만지고 있으니 씻으면서 지쳐버린 마음이 위로되는 기분이었다.

    -죄송합니다.

    반지는 말이 없는 내게 사과했다.

    그녀가 몇 번이나 사과를 했는지 모른다.

    나는 내 몸을 더럽힌 것에 화를 내야 할지, 자이언트 스파이더에게서 구해준 것에 감사해야 할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왕 도와줄 거면 좀 깔끔한 방식을 사용할 수는 없었을까.

    그녀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내세의 공기를 맡은 건 무척 오랜만이라.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몸에서 악취가 사라지니 불쾌했던 기분이 사라졌다.

    애초에 그녀에게 화를 내야 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 덕분에 살 수 있었으니까.

    “싸우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괜찮습니다··· 정말로.”

    이미 지나간 일인데 화를 내서 뭐할까.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겠네요.”

    몸을 씻은 강가에서 벗어나 반쯤 무너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몬스터가 나돌아다니는 세상에서 무방비 상태로 잠을 자는 건 자살 행위였다.

    적어도 나라는 인간을 감춰줄 건물 안에서 쉬는 게 더 좋다.

    설령 그 건물이 반쯤 부숴져 있다고 해도.

    심리적으로 안정될 수 있다.

    “하, 첫날부터 이러면 지치는데. 도대체 얼마나 가야 하는 걸까.”

    만남의 광장은 상당히 멀었다.

    걸어서라면 한 달 이상 걸릴 수도 있다.

    벌써부터 이렇게 지치니, 이 여정이 괜찮은 건지 걱정이 들었다.

    “적어도 바이크라도 있으면··· 어?”

    생각해 보니 내가 바이크나 차 등을 끌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전이야 돈이 있어도 기름값이 아까워 잘 끌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런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법이 유지될 리가 없잖아.’

    세상이 이 지경인데 바이크 하나, 기름 한 번 넣었다고 잡혀갈 리가 없었다.

    오히려 걸어다니는 게 멍청한 것이다.

    널린 게 차고 바이크다.

    그중 하나를 골라 탄다고 문제 될 게 전혀 없었다.

    “날이 밝는 대로 바이크 하나 찾아봐야겠어.”

    나는 왜 이런 생각을 진작에 하지 못했을까.

    그랬다면 이렇게 힘들 게 움직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지.”

    괜스레 내일이 기다려졌다.

    *

    아침이 밝기가 무섭게 나는 곧장 바이크를 찾아다녔다.

    차를 몰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바이크에 비해 차는 기동력이 떨어진다.

    차를 몰다 보면 차로는 갈 수 없는 길도 나타날 것이다.

    그런 곳은 바이크가 훨씬 유용하다.

    “아니지. 둘 다 몰면 되잖아.”

    내 생각은 너무 단순했다.

    매일 업무만 보다 보니, 이런 쪽으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좀 더 상상력이 풍부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나는 차와 바이크를 찾을 수가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유명 브랜드의 차와 바이크의 매장이 붙어 있던 것이다.

    전에는 이런 곳이 없었는데, 세상이 변하면서 여기도 변한 것 같다.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예전에 지프차를 타는 꿈이었는데.”

    차를 끌어 산을 타고 싶었었다.

    험난한 곳을 막 달리고 싶었다. 그것을 세상이 망하고 나서야 이룰 수 있다니.

    이 기분을 말로 설명하기도 힘들었다.

    “이게 가장 멀쩡하네. 차를 튼튼하게 만들기로 유명하다더니.”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차와 바이크는 있는데 기름이 없었다.

    “아···.”

    바이크와 차를 한군데 두고, 기름을 찾아나섰다.

    오늘은 행운이 나를 찾아왔는지, 주유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기름이 쫄쫄쫄 흘러내리는 게 위험해 보였지만,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마트에서 챙긴 병들에 기름을 가득 담았다.

    기름을 얻는 게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음··· 그런데 저건 뭐야?”

    20L 병에 기름이 담으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니 문득 눈에 띄는 게 있었다.

    피인지 락카인지 모를 붉은색 액체로 글이 쓰여 있는 게 보였다.

    세상에 종말이 찾아왔다.

    구원자이신 시스템을 섬기라!

    죽음으로서 우리를···

    주유소를 빙 둘러싸며 쓰여진 그 글들에는 언뜻 광기마저 보였다.

    “···.”

    군데군데에는 해골 모양과, 만남의 광장의 밑으로 사람들이 엎드려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도 보였다.

    삼일, 삼일이라는 시간 동안 시스템을 믿는 광신도들이 생긴 모양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주위에서 주워온 모든 병에 기름을 가득 채웠다.

    족해도 수십 병은 되는 그 기름들은 1년 이상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릴 수도 있지만, 저 붉은 글씨들을 보고 있자니 그런 마음이 확 사라졌다.

    괜스레 불안해졌다.

    당장 여기를 떠야겠다는 생각과 위험하다는 경종이 머리를 울렸다.

    부르릉!

    바이크를 트럭 칸에 싣고 기름을 가득 채운 차에 시동을 걸어봤다.

    새 차라 그런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시동이 들어왔다.

    “내가 살다살다 이런 차를 다 끌어볼 줄이야.”

    이걸 돈으로 사려고 했으면 못해도 천 단위로 깨졌을 텐데.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내 모습에 애써 시선을 돌리며 액셀을 밟았다.

    부우웅-

    시트가 나를 감싸 안으며 차가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최대한 평평한 땅을 찾아 움직였다.

    차를 몰며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해진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퀘에에엑!

    조용한 도시에 커다란 소리를 내며 차가 움직이니, 몬스터들이 관심을 갖고 머리를 내밀었다.

    그것들을 보고 있어도 그리 위협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것들보다 배는 크고, 배는 흉악한 자이언트 스파이더를 잡았다.

    그보다 약한 것들을 못 잡을 리가 없었다.

    ‘적당히 작은 것들은 이걸로 충분해.’

    절반이 밀림되어 버린 도시에는 곤충형 몬스터들도 많았다.

    맨몸으로 돌아다니면 위험했겠지만, 나는 지금 차를 타고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벌레들은 차로 밀어버릴 수 있었다.

    우지끈- 콰직!

    바퀴에 무언가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 덜컹거린다.

    ‘이 정도 속도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겠어.’

    시속 90km로 달리니 주위가 빠르게 지나쳐갔다.

    -이 철마차는 뭡니까? 신기하군요. 따로 모는 짐승이 없는데도 이런 속도가 나다니.

    차를 처음보는 건지,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수백 년을 갇혀 살았으니, 궁금한 게 많은 거겠지.

    그러다 문득 그녀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궁금해졌다.

    그녀는 반지의 형태였기에 자의로 세상을 볼 수도 없었다.

    설마 내가 그녀에게 몸을 내어줬을 때라 같은 건가.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세상을 보는 거죠? 제가 봤던 거랑 같은 겁니까?”

    -아니요. 그때는 상황이 그랬을 뿐 평소에는 그렇게 보지 못합니다.

    그녀는 부정했다.

    자신은 내가 봤던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가 없다며.

    -저는 당신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당신이 보는 것만 볼 수 있고, 냄새를 맡고 귀로 듣는 것만 느낄 수 있습니다.

    아, 그 말을 들은 나는 그녀가 참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고 듣는 것만 느낄 수 있다니.

    자의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 아닌가.

    그게 온몸을 결박당한 채 보여주는 영화만을 보는 것과 뭐가 다를까.

    “어? 그러면 제가 목욕할 때도···.”

    -···좀 컸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녀의 뒷말이 점점 작아지더니 마지막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고는 완전히 입을 다무는 그녀.

    나도 그녀를 따라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녀가 반지 형태가 아니었을 때의 모습을 봤다.

    엘더 리치가 나타났을 때 보인 그녀의 모습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결혼은커녕, 남중, 남고를 나오고 대학에서도 여자의 손을 잡아보지 못했다.

    그런 내가 맨몸을 여자에게 보인 꼴이다.

    그걸 지금 와서 한탄을 해서 뭐할까.

    그나마 그녀가 지금 반지의 형태라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겠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제가 맛보는 것도 느낄 수 있는 겁니까?”

    -아, 네! 맞아요. 정말 맛있어요. 제가 맛보지 못한 것들도 많아서.

    언제 조용해졌냐는 듯이 그녀의 목소리가 밝아지며, 내가 먹었던 음식들에 대한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생동감이 넘쳐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맛보고 싶은 게 또 있습니까?”

    나야 뭘 먹어도 상관없었다.

    가리는 음식이 따로 없었기에, 인간으로서 먹지 못하는 게 아니라면 뭐든 먹어줄 수 있었다.

    이왕 배를 채울 거라면 서로가 만족스러운 음식으로 채우는 게 낫지 않겠는가.

    -음··· 저는 그, 소고기라는 게 먹어보고 싶습니다. 햄버거도. 그걸 말할 때의 당신 표정이 무척이나 밝아 보여서 궁금합니다.

    음··· 소고기는 그렇다 쳐도 햄버거는 지금으로서는 힘들 것 같은데.

    “소고기는 가능합니다. 이따 저녁에 먹도록 하죠. 햄버거는 재료가 있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나중에 기회가 될 때 먹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짓는 걸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런데, 끝이 안 보이네.”

    한참을 달린 것 같은데 만남의 광장과 가까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만남의 광장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해야겠네.”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도시에 전력이 들어오지 않아서 일까, 원래는 밤에도 환했어야 할 도시가 무척이나 캄캄했다.

    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곳을 제외하면 보이지도 않았다.

    “다음에는 캠핑 도구를 챙겨야지. 그 생각을 못했네.”

    주변에 나뭇가지들을 주워 한데 모은 채, 기름을 살짝 붓고 라이터를 사용해 불을 피웠다.

    마트를 찾지 못했으면 불을 피우려 끙끙 앓았을 게 분명했다.

    불 옆으로 나뭇가지를 세워 석쇠를 올렸다.

    바람에 쓰러지지 않게 탄탄하게 한 뒤 그 위에 소고기를 꺼내 올렸다.

    치이이익-

    맛있는 소리가 귀를 자극하며 입안에 침이 고였다.

    소고기는 살짝 구워야 한다.

    다 구운 소고기를 자르지 않고, 소금 없이 입에 물었다.

    우물우물.

    뜨겁지만 맛있다.

    소금과 쌈장을 꺼내 맛있게 배를 채웠다.

    -정말 맛있었습니다.

    반지의 그녀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두둑해진 배를 두드리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불이 닿지 않는 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처럼 편하게 살지는 못하리라.

    “슬슬 잘까.”

    내일을 위해 차에 들어가 잠을 자려 했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 그녀가 살벌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목소리에 나는 차를 타고 뛸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야밤에 움직이는 건 무척이나 위험하다.

    뭐가 다가오는지 모르지만, 차라리 이곳에서 상대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정 안되면 차가 아깝기는 하지만, 귀환을 사용하면 된다.

    언제라도 그녀에게 몸을 맡길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 불이다!”

    “우린 살았어!”

    처참한 몰골의 사람들이었다.

    같은 인간이었지만, 나는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세상일수록 인간이 더 위험한 법이었다.

    불을 향해 뛰어오려던 그들이 나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다가오는 것을 망설였다.

    그들에게 말을 걸어 찾아온 의도를 알아내려고 할 때였다.

    “왜 온···.”

    띠링.

    [특정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차원 은행의 ‘파견 근무’가 개방됩니다.]

    파견··· 근무?

    저 사람들이 내 고객이라는 거야?

    초라한 행색에 그들을 보는 내 기분이 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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