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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25화 (25/113)
  • 제25화

    미친 듯이 달렸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대로 죽을 것 같았다.

    -제 자식들을 죽여 화난 것 같군요.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는 나와는 다르게, 반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태연했다.

    어찌나 태연한지, 내가 괜히 다 약이 오를 정도였다.

    누구는 고생하는데, 누구는 그저 관망하듯 지켜보고만 있으니.

    “허억··· 무슨··· 허억···! 방법 없습니까?”

    -방법은 많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죠.

    “그럼 어째서···!”

    -예를 들어, 당신을 죽일 뻔한 그 남자의 돌을 사용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입니다.

    돌? 아, 그 발키리를 소환할 수 있다는 돌 말인가.

    안 된다. 그건 아직 사용할 수가 없다.

    그건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얻어낸 보상이다.

    그걸 이런 곳에서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그럴 줄 알았다며 반지가 다른 방법을 말했다.

    -그건 사용하지 않을 것 같으니,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겠죠. 그런데 이건 제가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 그게 도대체 허억··· 뭔데···!”

    -당신이 직접 싸우는 겁니다.

    “뭐?”

    내가 싸우라니. 저것을 상대로?

    그건 자살 행위가 아닌가.

    -아니요. 당신은 이길 수 있습니다. 오히려 못 이기는 게 이상하죠.

    반지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고블린을 상대로 나는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정신을 잡아먹힐 뻔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나는 무척이나 안전했다.

    -비록 육체를 꺼내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드래곤을 죽였던 제가 고작 저놈을 상대로 상처를 입는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상대하는 건 난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도망치던 걸음이 저도 모르게 느려졌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굳이 내가 이렇게까지 도망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습니다. 그저 편하게 제게 몸을 맡기시면 됩니다. 주인님의 계약자이신 당신은 그저 구경을 해도 좋습니다.

    그녀가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했다.

    고블린을 상대했을 때처럼 자신에게 몸을 맡기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목소리.

    다만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내 몸을 맡겨도 되찾을 수 있는 안전이 보장되어 있었다.

    -저에게 맡기세요. 그러면 주인님이 어째서 저를 붙이신 건지 알게 될 겁니다.

    “확실한 거지?”

    -네. 확실합니다.

    잠시 고민했다. 그녀가 내 몸을 사용한다는 건, 즉 내가 저 거미와 싸우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내 몸을 차지해 싸운다고 하지만, 연약한 내 몸으로 저 괴수를 이길 수 있을까.

    ‘아니다. 의심하지 말자. 그때도 분명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모조리 처리했잖아.’

    고블린을 상대했던 그때를 믿으면 된다.

    “할게요. 제 몸을 맡기겠습니다.”

    -좋은 선택이십니다.

    선택을 하기가 무섭게 현기증이 찾아왔다.

    공허함과 부유감이 동시에 찾아오며, 정신이 붕 떠올랐다.

    -제가 하는 걸 편히 지켜보세요.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내 입이 열리는데, 내 목소리가 아닌 여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내 눈이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거미와 대치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하아··· 육체를 가지고 숨을 쉬는 건 정말로, 정말이지 최고군.”

    내 몸에 변화가 찾아왔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의 근육들이 재배치되고 어긋나있던 몸의 관절들이 맞춰졌다.

    살짝 기울어 있던 몸의 균형이 수평으로 맞춰지며, 그 잠깐 사이에 내 몸이 많은 게 변했다.

    “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대인가.”

    몸에 보라색 연기를 두르며 그녀가 턱을 매만졌다.

    내 몸을 보는 데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좀 더 잘생겨졌다고 해야 하나, 매혹적이라고 해야 하나.

    왠지 모르게 평범하던 내 얼굴이 매력적이라고 느껴졌다.

    스화아악-

    그녀 주위로 보라색 연기가 맴돌더니, 그녀의 앞으로 솟구쳤다.

    그것은 하나의 형태를 만들었다.

    연기가 뭉치고 농축되어 기다란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절그럭-

    땅에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러펴졌다.

    “오랜만이구나. 너를 못 든지 벌써 백 년이 넘게 흘렀어.”

    우우웅-

    그녀의 말에 공감하듯 ‘그것’이 진동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것’을 쓸어내렸다.

    키에에에엑-

    저 멀리 살기 가득하게 달려오던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돌연 움직임을 멈추더니, 그녀를 유심히 바라봤다.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휩쌓이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고 해도, 모든 마물의 정점이었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게 이상하겠지.”

    그녀가 ‘그것’을 손에 휘감았다.

    ‘그것’의 정체는 사슬낫이었다. 보라색의 사슬에 검은색의 낫이 달려 있었다.

    “자, 어디··· 다리가 총 8개고, 더듬이까지 합치면 10개인가. 하나 하나 뜯는 맛이 있겠어.”

    그녀가 사슬을 칭칭 감은 손으로 낫을 붙잡았다.

    반대손으로는 추가 달린 사슬을 붙잡은 채 빙빙 돌렸다.

    키에에에엑-

    포식자에서 피식자로 바뀐 것처럼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몸을 덜덜 떨었다.

    그것도 잠시, 자신이 겁먹은 것을 인정하기 싫다는 듯이,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하하하하. 좋네.”

    그녀는 그 사나운 기세에도 그저 웃으며 바라보기만 했다.

    자이언트 스파이더의 기다랗고 날카로운 다리가 그녀를 향해 찍었다.

    “우선, 다리 하나.”

    후우웅.

    그녀가 왼손에 돌리고 있던 추가 날아가 자이언트 스파이더의 다리를 휘감았다.

    푸직.

    무척이나 가벼운 소리였다.

    옛날 회사 상사가 사준 킹크랩을 먹었을 때, 다리 한쪽을 부러뜨릴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키에에에엑!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비명을 질렀다.

    쇠사슬로 휘감겨 있던 놈의 다리가 너무나도 쉽게 뜯겨져 땅을 뒹굴고 있었다.

    “흠, 역시 좋군.”

    땅을 나뒹구는 거대한 다리를 보며 그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며 초록색 피를 뚝뚝 흘리는 자이언트 스파이더를 훑어봤다.

    “이제 9개밖에 안 남았군.”

    겨우 그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이었다.

    다리가 조금만 더 있었으면 더욱 확실히 즐길 수 있었을 거라는 그의 중얼거림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

    “천천히 즐겨보자고.”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잔뜩 고통스러워하던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괴성을 지르며 그녀를 향해 산성독을 뱉어냈다.

    촤아악!

    그녀가 있던 자리가 산성독으로 녹아들었다.

    어느새 자이언트 스파이더의 몸 위로 뛰어오른 그녀의 사슬낫이 오른쪽 다리를 찔렀다.

    서걱.

    사슬낫이 두부를 자르듯, 자이어트 스파이더의 다리를 주욱 갈랐다.

    푸화악-

    갈라진 틈새로 초록색 피가 튀었다.

    그녀는 온몸에 피와 오물이 묻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몸에 묻은 그 피를, 손가락을 들어 핥으며 몽롱한 눈빛을 했다.

    ‘그건 내 몸이라고!’

    싸우는 건 좋다. 그래, 싸우다 보면 상처도 생기고, 피를 덮어쓸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피를 핥는 건 내 상식선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피도 아니고 몬스터의 피를 핥아 먹는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몸이 했다.

    ‘다행인 건 그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가.’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맛이 느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오감들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쿵, 쿠쿵!

    자신의 다리 두 짝을 못 쓰게 만든 그녀에 분노한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나머지 다리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워낙 길고 두껍다 보니까, 느린 속도에도 불구하고 그 공격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쾅, 콰콰콰쾅!

    자이언트 스파이더의 다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그 형태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다리에 실수로라도 걸렸다가는 몸이 형태도 남기지 못하고 짓이겨지리라.

    그 속에서 그녀는 두려움 한점 없는 얼굴로 경쾌하게 웃음··· 웃, 고 있다고?

    “꺄하하하하하하!”

    그녀는 죽을 수도 있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겨우 그 정도의 공격으로 나를 맞출 수야 있겠어? 이거 내가 알고 있는 그놈이 맞나 몰라.”

    키에에에엑!

    “아, 화나? 화나면 제대로 공격을 해보던가. 쯧쯧. 슬슬 흥이 식기 시작하는데 이거 어떡해 할 거야.”

    촤르르륵!

    그녀의 손에서 던져진 사슬의 추가 그녀의 어깨를 스쳐가는 다리를 휘감았다.

    그녀는 사슬을 잡아당기면서 생기는 반동력으로 높이 뛰어올라 다리를 타고 몸통으로 뛰어 올라갔다.

    살아있는 뱀처럼 저절로 풀린 추가 그녀를 향해 쏘아진 산성독을 막아내며, 자이언트 스파이더의 눈에 적중했다.

    퍼석-

    눈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이리저리 뛰어오르는 놈의 몸 위에 올라간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균형을 잡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군.”

    그녀의 몸에 서려있던 보라색 연기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에 그녀는 몹시도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낫을 높이 들었다.

    “이제, 그만 끝내자.”

    푹.

    딱딱한 껍질에 너무 쉽게 박힌 낫을 두고 그녀가 머리에서 꼬리쪽으로 뛰어갔다.

    사슬을 마구 휘두르며 추가 돌기들을 부수고, 몸통과 다리를 연결하고 있는 관절들을 부쉈다.

    콰득, 콰지직-

    그녀가 몸통에 꽂아둔 낫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저절로 움직여 몸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뚫고 또 뚫고 들어간 낫은 기어이 심장에까지 도달해 제 날카로운 이빨을 쑤셨다.

    키에에에엑-

    제 심장이 꿰뚫린 충격에 자이언 트 스파이더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몸통이 주저앉으면서 높이 솟아오른 다리들을 부수며, 꼬리쪽에 선 그녀가 낫이 달려 있는 사슬을 손목에 휘감았다.

    “흠··· 제대로 물었어.”

    내 착각인 걸까. 낫이 연결되어 있는 부위부터 그녀의 손목에 감겨 있는 사슬까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그 모습이 마치 수혈 팩을 맞는 것처럼 보였다.

    “하아··· 이건 언제라도 황홀하군.”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더니, 사슬을 휘감은 팔에 있는 힘껏 힘을 줘 잡아당겼다.

    팽, 패앵-

    사슬이 뻣뻣하게 당겨지며,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사슬이 끌어올려졌다.

    마치 낙시를 하듯, 사슬은 그녀의 팔에 휘감겼다.

    우지끈- 푸화아악!

    몸통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낫이 엄청난 크기의 심장을 물고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그 심장은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그녀가 다시 한 번 팔을 잡아당기니, 낫이 뽑히며 심장이 산산조각났다.

    피와 살점들의 무수한 소나기 속에서 그녀가 그것들을 맞으려 양 팔을 벌린다.

    -어?

    “···어?”

    그때 의식이 빨려 들어가며, 답답하리만치 느껴지지 않던 오감의 향연이 나를 덮쳤다.

    아니 그건 향연이 아니었다.

    차라리 끝까지 느껴지지 않았으면 모를까.

    그건 악취였고, 몸을 움직이기 싫게 만드는 최악의 감촉이었다.

    후두둑-

    몸 위로 피와 오물들이 떨어지고, 그 냄새에 의식이 흐릿해졌다.

    ‘아··· x발. 나는 왜 맨날 끝이 좋지 못하냐.’

    암흑이 나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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