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지금 저 사람이 뭐라고 한 거지?
아니, 사람이 아니지.
No. 72의 말이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스템이 내 능력을 사고 싶다는 건, 즉 나라는 사람을 고용하고 싶다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거의 일평생을 남의 밑에서 돈을 받아 일을 하며 살았다.
이제 막 고용주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하는데, 그걸 버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굳이 다른 곳에 고용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성좌들의 반응을 보고 그들이 이번 한 번만 은행을 이용할 것이 아님을 느꼈다.
은행의 편리함을 처음부터 몰랐으면 모를까, 그것을 아는 사람은 벗어나기가 힘들다.
벗어날 이유도 없다.
“싫습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들이 무슨 제안을 하든 그들의 밑에 들어가지 않을 건 확실하기에, 오히려 그들의 말을 들으면 흔들리기만 한다.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군요. 저희는 은행장님을 고용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그러니까, 협력 관계가 되자는 겁니다.”
“그런 거라면···.”
말이 달라지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지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면 기겁을 하고 거절할 이유가 없다.
‘시스템과 협력 관계라···.’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더 자세히 제안을 들어야 하기는 하겠지만, 시스템 자체만으로도 큰 메리트가 있었다.
시스템은 모든 차원을 조율하는 세계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었다.
게임으로 따지면 운영자라고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그들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상당할 거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시겠습니까?”
이건 돈이 된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No. 72는 내 반응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경쾌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다과가 올려져 있는 책상과 소파가 생겨났다.
“일단 앉아서 차라도 좀 즐기며 대화를 나누시죠. 저로 인해 낭비된 시간은 그에 맞는 합당한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꺼내는 보상 얘기에 나는 흔쾌히, 냉큼 그 자리에 앉았다.
“이건 정신력과 면역력, 그리고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해주는 찻잎으로 우려낸 차입니다. 여성분들이 즐겨 마시죠.”
찻잔에 하얀색 액체가 따라졌다.
달짝지근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음···.”
한입 입에 머금고 나니 차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확 사라졌다.
끈적하고 질척한 그 식감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입맛 자체가 사라져 버려 차는커녕 쿠키조차 마시고 싶지 않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의 거기에 무척 좋다고 하더군요. 이건 정확히 밝혀지지 않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효과를 봤다고 합니다.”
“···!”
먹기 싫다는 생각이 확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차를 원샷 해버렸다.
남자에게는 그런 욕구가 있다. 딱히 사용할 데가 없음에도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설마하니 내게도 그런 욕구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지금 그것을 알게 되었다.
“어···?”
차를 한잔 원샷 때려 버린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불쾌한 입안의 느낌이 사라지고, 머리가 상쾌해졌다.
몸 안에 활력이 생겨나고, 지금은 무슨 일을 하든 엄청난 집중력을 보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좋죠?”
“네···.”
이걸 좋다라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마음 같으면 은행으로 싸가지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이것만 있으면 일을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남자에게도 좋다고 했으니.’
물론 그것 때문에 가지고 가고 싶다는 건 아니었다.
정신력을 높이는 건 물론 면역력과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해준다고 하니, 누구라도 탐낼만 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건지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은행장님도 사실 수 있습니다.”
“아, 그런가요?”
“네. 은행장님의 고향에도 만남의 광장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곳에 대장간과 상점등이 있습니다. 비록 높은 등급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코인이 들기는 하지만, 은행장님이라면 빠르게 그 코인을 모으시겠죠.”
그 말에 만남의 광장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아주, 아아주 나중에나 가보려 했지만.
이걸 포함해 다양한 물품들을 사러 가야겠다.
“그럼 이 차는 얼마인가요?”
“아. 이천만 코인입니다.”
“···?”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이천 코인을 이천만 코인이라고 말한 건 아닌지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말실수 하지 않았다며 빙긋 미소 지었다.
‘미친, 이거 하나에 이천만 코인이나 한다고?!’
아무리 바로 효과를 보일 정도로 좋은 찻잎이라고 하지만, 그 정도로 비싸야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시죠.”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사업 등록서]
회사나 공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나라에 사업 등록을 해야 하는데, 그게 시스템에도 적용될 줄은 몰랐다.
그러면 나는 불법을 저질렀던 걸까.
사업 등록을 하지 않고서 고객들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을 보며 딱딱하게 굳은 나를 보며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는데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이건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니까요. 이 사업은 우리 시스템과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진짜는 이겁니다.”
그가 품에서 다른 종이를 하나 꺼냈다.
「계약서
-시스템(이하 “을” 이라 한다)과 차원 은행의 은행장(이하 “갑” 이라 한다)는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하여 이를 성실히 이해할 것을 약정한다.
제 1 조[계약의 목적]
“을”은···
사업 등록서가 머릿속에서 사라질 정도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계약서였다.
어쩌며 지금의 선택으로 차원 은행의 앞날이 결정된다고 해도 다름이 없을 정도로 중요했다.
계약서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내게 유리했다.
나를 ‘갑’이라고 한 부분에서 그 점을 알 수 있었다.
시스템이 내게 내민 계약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차원 은행을 시스템이 기용한다는 건데, 어떠한 터치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이 부분.
-“을”은 앞으로 코인과 관련된 부분을 전부 “갑”에게 맡기며···.
현재 어떤 차원이든 코인을 거래하기 위해서는 마석을 사용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부분에 있어서 시스템이 주도적으로 움직여 차원 은행에 계좌를 이용하게 한다고 한다.
나로서는 그로 인해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이 엄청났다.
거기다.
-“을”은 코인을 지급하는 방식에 있어서 차원 은행의 계좌를 사용할 것임을···.
시스템이 하는 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퀘스트라고 특정 이들에게 임무를 내려 그들에게 코인을 주는 것도 있었다.
다만 코인을 주는 방식이 마석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제부터 온전히 ‘계좌’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약속했다.
비록 수수료가 최대 1,000코인이라고 하지만 그게 쌓이면 무시 못할 정도가 된다.
-“을”은 차원 은행에 어떠한 세금도 매기지 않을 것이고, 만남의 광장에 차원 은행을 이관할 수 있도록 모든 비용을 책임질 것임을 약속한다.
내가 가장 놀란 부분은 이것이었다.
차원 은행을 이용하는 고객들에게 세금을 매긴다면 벌어드릴 수 있는 금액이 엄청날 것이다.
시스템은 그 수입을 포기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파격적인 혜택이나 다름없었다.
세금을 어떡해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리고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가 생겨났다.
거기다 차원 은행을 만남의 광장이라는 곳에 이동시켜준단다.
거기에 드는 비용은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성좌들만 상대할 때에도 꽤 힘들었다.
은근히 진상 고객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건 한국인들에 비하면 세발의 피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는 어마어마한 진상들이 많았다.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진상도 있었다.
만남의 광장으로 옮기게 되면 필시 그들을 상대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세상이 멸망하면서 생겨난 안전지대는 만남의 광장이 유일했으니까.
전 세계에서 살기 위해 만남의 광장으로 모여들 테고, 그 과정에서 그 사람들과 충격이 생겨날 텐데.
지금부터 그것을 생각하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계약을 하시겠습니까?”
벌써부터 진상들의 대처법을 떠올리는 내게 No. 72가 말을 걸었다.
계약을 할 건지 말 건지.
당연히 이 계약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하나같이 내게 유리한 내용들뿐이다.
내가 못본 게 있나 꼼꼼이 살펴봤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내게 유리한 것뿐이었다.
여기에서 조금 더 욕심을 부리겠다고 조항을 추가하는 것 자체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하겠습니다.”
“그럼 거기에 피를 떨어뜨리시면 됩니다.”
계약서 맨 밑부분에 파여 있는 흠에 피를 떨어뜨리라며 그가 바늘을 건넸다.
나는 주저하지 앉고 손가락을 찔러 계약서와 사업 등록서까지 총 네 장에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은행장님의 담당자가 되었으니 혹시라도 궁금한 게 있으시거나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이걸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계약서와 사업 등록서를 하나씩 챙기며 그가 품에서 둥그런 호출기를 내밀었다.
그리고 나를 바로 은행으로 돌려 보내려는 그를 황급히 붙잡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 얘기하시죠.”
“차원 은행을 만남의 광장으로 이관할 때 그 안에 있던 것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 혼자라면 만남의 광장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겠지만, 차원 은행에 있는 최동수는 그렇지 않았다.
그를 데리고 갈 수 있을지 문제였다.
무엇보다 위험속을 헤치며 이동할 때는 여럿이 있는 것보다는 혼자가 더 나았다.
다만 그렇게 나 혼자 가서 차원 은행을 이관하면, 그 안에 있던 엘더 리치나 최동수는 어떻게 될 지가 문제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이 이관이지, 실제로는 입구만을 바꾸는 것이라 보면 됩니다. 안에 있는 무엇이 있든 그대로 유지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 외에도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
“아니요. 지금은 딱히 없네요.”
“네. 그러시다면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필요하시다면 호출기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네.”
따악.
그가 미소를 지은 채 손가락을 튕겼다.
백색의 공간에 끌려 왔을 때처럼 어느 순간 시야가 반전되며 나는 창구에 앉아 있었다.
-어, 돌아왔다!
-아이씨, 왜 이제오는 거야! 답답해 죽는 줄 알았잖아!
-지금이 시간이 몇시야!
-도대체 지금이 시기가 어느 때인데 이렇게 함부로 막 데리고 가는 거야? 하여튼 관리자라는 놈들은 이래서 안 돼!
은행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내 앞에서 성좌들이 미쳐 날뛰었다.
“흐어어어엉! 도대체 어딜 갔다 오신 거에요!”
옆에서 최동수가 주저앉은 채 내 팔을 늘어지게 붙잡으며 울음을 터뜨렸고.
“네가 없어져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나?”
나를 노려보는 엘더 리치의 눈빛 속에 걱정, 짜증, 분노 등이 뒤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