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AM 6:00.
그 시간이 되면 알람이나 따로 깨워주는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눈이 뜨였다.
내 하루 일과의 시작은 언제나 6시였으니까.
습관으로 굳은 몸은 아무리 피곤하고 졸리다고 해도 그 시간만 되면 나를 깨웠다.
“할 게 많다.”
가장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
엘더 리치에게 부탁해 몸을 깨끗하게 한 뒤 향수를 뿌렸다.
“드르렁···!”
그렇게 한창 준비하고 있으니, 멀지 않은 곳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배를 다 깐 채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나를 믿는 건 좋았지만.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세요. 일할 시간입니다.”
그에게 알려줘야 할 게 무척이나 많아 그가 마냥 자게끔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물 좀 마시고 정신을 차리세요.”
“으어어···.”
그가 힘겨운 신음을 흘리며 페트병을 받아들었다.
그가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줬다.
다른 사람이 이런 나를 보면 답답하다고 할 수 있는데.
나는 나와 같이 일하게 될 사람에게 후한 스타일이다.
그 사람이 먼저 나를 배신하지 않으면 적어도 내가 그를 배신할 일은 없다.
더군다나 그가 나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은행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현대를 살아가면서 통장을 한 번이라도 안 쓴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진짜 외진 곳이 아닌 이상, 아니 외진 곳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이 통장을 사용하고 은행을 방문한다.
심지어 90세에 연로하신 분들도 도우미와 함께 은행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물며 젊은 사람이었다.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살지 않은 이상 은행을 모르기 힘들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은행은 그 돈을 관리해주는 곳이었으니까.
“앞으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고객들을 만나 그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간단하니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간이 좀 커야 한다는 말을 삼켰다.
벌써부터 그를 긴장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건 직접 겪고 이겨내야 하는 문제였다.
“오늘 당장 당신 보고 일을 하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그 정도로 매정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제 옆에서 제가 하는 걸 보고 배우세요.”
“네!”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습니다.”
진지해진 내 얼굴에 그가 마른 침을 삼켰다.
한껏 긴장하여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검지를 들어 보였다.
“절대 놀라서는 안 됩니다. 아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마세요. 오늘은 그거 하나만 지키면 됩니다.”
“···?”
내 말이 생뚱 맞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래 지금은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좌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는 내 말이 무슨 소리인지 깨닫겠지.
그때의 얼굴이 살짝 기대되었다.
‘나도 별반 다를 건 없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나도 제대로 일을 하기 시작한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
그와 별반 다를 게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경력직과 비경력직은 비교가 안 돼지.’
애초에 은행장이 되기 전부터 나는 은행 업무를 해오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이 일에 있어서는 베테랑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몸 사이즈가 어떻게 되시죠? 마법으로 몸은 깨끗해졌지만, 그 옷은 외관상 보기가 안 좋네요.”
“전 90이요.”
작긴 진짜 작구나.
평범한 체구의 내가 105 이상을 입는다는 걸 생각하면 그는 지나치게 왜소했다.
물론 사이즈가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작은 건 아니었다.
90에서 95를 오가는 사람들 중에도 몸이 탄탄한 사람이 많았고, 심지어 운동선수 중에도 수두룩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가 무척 작은 거였다.
키가 170도 안 되었고, 손도 나와 한뼘 차이가 났다.
거기다 마법으로 얼굴에 묻은 먼지들을 지우니, 제법 곱상하게 생긴 외모가 드러났다.
여자들이 꽤나 귀여워했을 상이었다.
‘근육이 보이지가 않아.’
내가 준 정장으로 갈아입으면서 드러난 그의 몸은 정말이지 매끈하기 그지없었다.
아주 살짝 근육의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그가 바지가 아닌 치마를 입었다면 여자라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시계는 평소에 찹니까?”
“아, 아니요.”
“그럼 지금부터라도 차세요.”
“네···.”
시계는 은행원들에게 필수였다.
은행원은 시간에 있어서 철저해야 했다.
시간 문제로 다른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맞춰야 했다.
“향수는 뭘 좋아합니까? 고르세요.”
“어, 저는 이거요···.”
그가 장미향이 나는 향수를 골라 몸에 뿌렸다.
“자, 그럼 동수씨?”
“네.”
“일을 시작하죠. 이제 곧 고객들이 몰려올 건데, 인사 잘 하셔야 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합이 제대로 들어가서 좋네요.”
창구에 앉아, 그를 뒤에 세우며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봤다.
[AM 7:59]
1분, 1분만 지나면 된다.
[8시가 되었습니다.]
[차원 은행의 문이 개방됩니다.]
[212명의 대기자의 출입을 허가합니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대기자가 있었을 줄이야.
홍보의 파급력이 내 생각보다 더 큰 것 같다.
-나부터다!
-무슨 개소리를! 내가 먼저 대기하고 있었다고!
-빌어먹을 놈들아, 새치기하지 마라!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우수수 쏟아져 들어오는 성좌들로 인해 조용하던 은행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뭐, 뭐야 저게···!”
등 뒤로 기겁하여 뒤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정심을 유지하세요. 지금부터 그렇게 놀라면, 앞으로 제 밑에서 일하는 게 힘들어질 겁니다.”
협박이 아니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야 미지의 것을 접했으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지속되면 안 된다.
빠르게 평정심을 찾고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저들은 그저 외형이 조금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나아질 겁니다. 정 안 되겠으면, 뒤에 가서 진정될 때까지 있어도 좋습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참아보겠다는 그의 말에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그러겠다는데 내가 뭔 말을 하겠는가.
부디 표정 관리만 잘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만약 그걸 못한다면, 앞으로 그에게 이 일을 맡기기가 함들어진다.
-계좌, 계좌를 내놔라!
-그 빌어먹을 점액 새끼가, 나한테 얼마나 자랑했는지 알아? 나보다 조금 빨리 왔다고 유세를 부리고 말이야!
-그 계좌란 건 어떻게 쓰는 거지? 먹는 건가? 은행은 뭐하는 곳이냐.
일은 어제와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성좌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제 말을 꺼냈고, 그런 그들을 리치가 정리하려 골머리를 쌓았다.
그들에게 한 명씩 찾아오라고 하려고 할 때였다.
“···?”
세상이 변했다.
정확히는 내가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
은행의 창구에서 왠 백색의 공간으로 눈 깜짝할 새에 끌려왔다.
“뭔데···?”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제 막 성좌를 상대하려고 했었다.
아, 오늘도 돈을 번다는 생각에 힘이 나려고 했는데.
그 기분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도대체 여기는 뭐지.”
내가 이곳에 끌려왔다는 건, 나를 끌고 온 누군가가 있다는 건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건 새하얀 벽벽벽벽, 벽뿐이었다.
“아, 일해야 되는데.”
손목시계의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었다.
소설에서 보면 주인공이 미지의 공간에 들어올 때 그 외에 공간의 시간은 멈춘던데.
여기는 그런 건 아닌 걸로 보였다.
시간은 지금도 잘 흘러가고,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내가 갑자기 없어져 은행 내부가 많이 어수선해졌을 게 눈에 훤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1분 1초가 아쉬운 지금, 이런 곳에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저기요, 누구 없어요?”
없어요, 어요, 요요요요~
내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에서 도대체 얼마나 갇혀 있어야 하는 걸까.
나를 이곳에 끌고 온 존재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빨리 나와서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나를 돌려 보내주면 좋을 텐데.
“도대체 뭐 때문인지 모르지만, 바쁜 사람을 데려와 놓고 뭐하자는 겁니까!”
주위를 둘러보며 누구라도 들으라는 식으로 소리쳤다.
이건 예의가 한참이나 없는 행동이었다.
사전 동의도 없이 갑작스럽게 사람을 끌고 왔으면서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다니, 이게 납치와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초상권 침해, 인권 침해, 불법 감금 등으로 고소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한참을 소리치고 있으니 등 뒤로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따라 몸을 돌리니,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남자 맞아?’
바지를 입고 얼굴의 반을 가리는 오페라 가면을 쓰고 있어 순간 남자라 착각했는데, 여리여리한 체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그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렸다.
그런데 목소리 진짜 좋다.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본론은 따로 있었다.
순간 그의 묘한 분위기에 말을 하는 것 자체를 까먹고 멍하니 바라볼 뻔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를 사납게 노려봤다.
내가 화났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려 했다.
“도대체 당신이 뭐라고 바쁜 저를 끌고 온 겁니까. 제 고객들이, 성좌들의 분노가 두렵지 않은 겁니까?”
“아, 그건 좀 놀랐습니다. 제대로 영업을 시작한 게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그만한 성좌들을 모아들이다니, 아무리 홍보권을 줬다고 하지만··· 이건 예상외였습니다.”
그의 말에 그에게 화를 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라면, 그의 말 중에 홍보권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시스템이 내게 줬다는 걸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건데.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세계를 조율하는 시스템의 72번째 관리자입니다. 편하게 No.72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시스템의 관리자.
나를 이곳에 불러들인 건 다름 아닌 시스템이었다.
내게 힘을 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불만이 입안으로 쏙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본래 이렇게 불러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제대로 초청장을 보내 정중하게 모실 생각이었는데··· 저희의 예상보다 너무 빠른 발전을 보이셔서.”
그가 나를 흘겨봤다.
그 말에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불평은 간단하게 말해서 내 능력이 좋다는 거였다.
그들의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은행이란 거 자체가 처음 만들어졌으니, 궁금해서라도 찾아올 수밖에 없지.’
더군다나 그게 코인과 관련된 업종이니 성좌들이 가만히 있기 힘들었던 거다.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니, 이 일에 대한 보상은 확실하게 드리겠습니다.”
“예.”
손해 배상을 해주겠다는데, 내가 그에게 따질 이유가 없었다.
내게 고개를 숙이는 그에게 손사래를 치며 물었다.
“저를 부른 이유가 뭡니까?”
“아, 그렇죠. 계속 본론에서 빠지는군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 제가 너무 정신이 없었네요.”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행장님을 이렇게 모시게 된 이유는 은행장님의 능력을 저희 시스템이 사고 싶어서입니다.”
가면 속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호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