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지금까지 은행에 찾아온 이들은 전부 다른 차원의 성좌들이었다.
입구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지구에 있는 던전의 균열을 통해서 들어온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시스템의 허가가 필요했다.
시스템의 허가 없이는 들어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균열을 통해서 들어오는 거라면···.’
남자는 지구 출신이었다.
그것도 나와 같은 대한민국 출신.
이런 우연이 있는 게 신기하기는 했지만, 그는 괴물들에게서 도망치다 잔해들 속에 숨겨져 있는 던전을 발견했고.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몸을 던졌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균열의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봐야겠네.”
균열은 시스템도 어찌할 수 없는 활짝 열린 대문이었다.
애초에 균열이라는 것 자체가 던전에 들어오라고 생겨난 것이다.
그걸 막는다는 게 더 이상하겠지.
“하아, 이걸 어떡해야 하지.”
움찔.
내 작은 읊조림에 몸을 떠는 그를 바라보며 볼을 긁었다.
마냥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뜬금없이 찾아온 불청객들에게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가 찾아온 덕분에 균열을 처리해야 한다는 걸 알았으니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문제는 이 모든 걸 말해준 그 남자를 처리하는 데에 있었다.
죽이자니 그는 너무 순수하게 모든 걸 말해줬다.
하다못해 내가 묻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직업이 뭔지 먼저 불어버렸다.
‘일꾼이라···.’
이름부터가 자기를 부려줍쇼! 하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거기다 직업이 가진 능력 또한 심플했는데.
모든 일에 대한 능동력이 5% 상승한다는 것이다.
딱, 일을 시키기 좋은 능력이 아니지 않은가.
거기다 들어보니 그는 갈 데도 없었다.
가족도 다 죽어 밖에 나가야 할 이유도 없었고.
은행의 업무를 보게 하는 데 딱 좋은 사람이었다.
“죽이기에는 아까운데.”
내 말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를 보며,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죽이기에는 아깝고, 그렇다고 죽이지 않으려 하니 그가 내 밑에서 일하지도 의문이었다.
‘노예로 부릴 수 있다는 것도 안 뜨고.’
경비원 고용 특성이 노예를 사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도 보이지 않았다.
나이트 일행을 대할 때와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그들은 엘더 리치로 인해 몸도 마음도 굴복했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상태.
그런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죽여서 언데드로 부려 일을 시킬 수도 있지만.
‘저, 능동력 5% 상승이 무척 탐난단 말이지.’
그게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몰라도,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큰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는 건 안 봐도 뻔했다.
죽이기에 아깝고, 안 죽이려니 불안하고 참 계륵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
“살고 싶으세요?”
내 말에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입을 헤- 하니 벌린 게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대답을 안 하시는 걸 보니 죽고 싶은 건가 보네요?”
“아, 아니에요! 살고 싶습니다!”
이어지는 내 말에 그가 황급히 소리쳤다.
살고 싶다고, 살려만 달라고.
그가 엎드린 채 벌벌 떨며 말했다.
그런 그를 보며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생각을 정리시켜주는 것 같았다.
내 습관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뭔가 고민이 많을 때 이렇게 시계를 만지면 생각을 정리하기가 쉬워진다.
은행원에서 과장이 될 때까지 굳혀진 습관.
‘직업을 얻을 때 그 사람이 인생 전체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영향을 준다고 했었지.’
그것을 봤을 때 그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가 살인을 저지르거나, 범죄 행위를 저질렀으면 직업도 달라졌을 수도 있다.
아니면 직업의 능력이 다르거나.
그런데 그는 그게 아니었다.
일꾼이라는 직업을 얻었고, 그 능력은 일을 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유추해보면, 그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기보다는 착실하게 일을 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어림짐작해 볼 수 있었다.
‘거짓말을 한 걸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걸 아예 믿기도 힘들었다.
그가 직업을 속이는 것일 수도 있었으니까.
절레절레.
하지만 그 부면에 있어서는 믿는 게 있었다.
엘더 리치.
마법에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마법사가 내 옆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저 남자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고 알려줬다.
“그럼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될까요?”
최대한 다정하게 그에게 말했다.
“갈 곳이 없다면 저와 일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
내 말에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가 눈이 데구르르 굴러 옆에 있는 엘더 리치에게로 향했다.
엘더 리치가 뭔가 했는지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다급하게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하, 할게요! 하고 싶습니다!”
제발 자신을 살려달라는 표정이 역력한 그를 보며 나는 해맑게 웃었다.
그의 얼굴 앞에 떠오른 메시지가 나를 기쁘게 했다.
[특정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은행장 고유 특성 ‘은행원 고용’이 개방되었습니다.]
엘더 리치를 얻었을 때와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경비원이 아닌 은행원이었다.
그게 나를 더 기쁘게 했다.
‘경비원과 은행원은 명백히 다르다.’
하는 일도,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달랐다.
경비원은 회사를 지킨다면, 은행원은 회사의 일을 한다.
그를 고용하겠다는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일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고민이 되었었다.
시스템은 그런 내 고민을 말끔히 해결해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럼 제가 보낸 것에 동의를 하세요.”
은행원 고용을 누르니, 상대의 동의를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
눈앞에 떠오른 것을 보고 있는지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간간히 그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비록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은행 일을 하는 데에는 무슨 일을 하든 꼼꼼하게 확인하고 수행하는 성격도 필수적이었다.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일을 시켰다 사고를 칠 수도 있는 거였고, 나는 그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다 읽으셨으면 동의하시겠습니까?”
“하, 한가지만 물어도 되나요?”
“얼마든지.”
내 개인적인 신상정보를 묻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든 기껍게 대답해줄 의향이 있었다.
유능한 일꾼을 얻을 수도 있는 일인데 그 정도도 못해 줄 게 뭐람.
“그, 이거 월급 말입니다.”
“월급이요?”
“네. 이거 월급을 주는 게 사실입니까?”
월급?
그러고 보니 엘더 리치에게도 월급을 줘야 한다고 했었는데.
이왕 말 나온 거 지금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은행원 계약직 월급:100코인]
[경비원 월급:1,500코인]
시스템을 확인하고.
“···.”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월급이 이렇게 적다고?’
경비원에게 주는 1,500코인도 적은데, 은행원에게 주는 코인은 경비원 월급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계약직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지, 이건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금액에 아무런 흠집도 나지 않는다.
오히려 겨우 그 정도의 금액을 주고 한 달 동안 부려 먹는 게 더 미안해질 지경이다.
‘이거 개꿀인데?’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그 정도의 금액을 주고 사람을 부릴 수 있다니 좋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무척 적은 금액이었다.
빛을 면제받기 전에도, 면제를 받은 후에도 그 정도의 금액으로는 살아가기 힘들다
[당신은 한 달에 500코인의 세금을 내야 합니다.]
[세금의 수금 방식은 마석입니다.]
[500코인의 가치와 상응하는 마석을 구매하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된 게 내 한 달 세금이 그의 월급보다 몇 배는 많다.
그게 이상했다.
나만 세금을 내야 하는 게 아닐 터였다.
지구에 사는 이들이라면 전부 빚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시스템에게 귀속되면서 세금이란 게 생겨났다.
내가 500코인인데 그라고 다를까.
‘100코인으로는 세금을 내기도 힘들 텐데’
그걸 모르지 않고서야 저리도 얼굴이 밝아질 수가 없다.
뭔가가 이상했다. 100코인이지만 월급을 받는 것에 기뻐하는 그에게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빚하고 세금을 얼마내야 하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 제 빚은 10,000코인에 세금은 20코인인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나를 힐끔 보며 눈치를 보는 그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세금이 겨우 이십 코인이라고? 내 세금에 비하면 발가락 때만큼이라고 여길 정도로 적은 금액이었다.
아니 세금은 그렇다치자, 그런데 어째서 빚이 만 코인밖에 되지 않는 거지?
나는 천만 코인이었는데··· 비록 면제를 받았다고 하지만, 이건 모든 걸 떠나서 차별 행위가 아닌가.
“마, 만코인이요?”
“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고, 내 눈치를 보는 그에 이마를 짚었다.
그에게 뭐라고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닐뿐더러, 빚이 있는 것도 아니 큰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뒤통수 거하게 한 대 맞은 느낌이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사람에게 빚을 주고, 세금을 정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분명 나를 평가했을 때는 ‘지나친 성실’이라는 후한 평가를 했다.
그런데 그 평가의 대가가 이거라니.
내가 뭐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지.
“월급은··· 맞습니다. 그 계약서에 나오는 것처럼 100코인의 월급을 드릴 겁니다. 거기에 나오지는 않지만, 잠은 이곳에서 주무시면 되고, 먹을 것과 입을 건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숙식 제공은 해줄 수 있다.
의식이야 내가 언제든지 나가서 찾아올 수 있다.
정 안 되면 만남의 광장에 가보면 되겠지.
잠을 자는 곳도 은행 아무데나 이불을 펴주면 되고.
1년치가 절반으로 줄었으니, 중간에 한 번 나갔다 와야겠네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갑작스럽게 내 앞에 엎드렸다.
“아···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다며,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았다며 그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당황해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이게 그렇게 감사할 일이었나, 어떻게 보면 그를 부려먹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아닙니다. 그만 우시고 계약에 동의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이 분위기를 유지한 채 계약까지 밀어붙였다.
[은행원(계약직) ‘최동수’를 고용하셨습니다.]
[은행원은 은행장에게 아무런 해도 가할 수 없으며, 부당한 명령이 아닐 시 반드시 수행할 것입니다.]
무사히 계약이 만료되었고, 나는 여러 의미의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네, 네!”
그가 황급히 일어나 내게 머리를 숙였다.
그 빠릿빠릿한 행동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항상 부려지기만 했지, 남을 내 돈으로 부려 먹는 건 처음이라 묘하게 흥분되었다.
“오늘은 자고, 내일 일어나서 마저 이야기하죠.”
벌써 시간은 두 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지금 자도 겨우 네 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미리 일어나서 준비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에게도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알려줘야 하고.
“푹 쉬세요. 내일부터는 힘든 하루가 될 테니까.”
한쪽에 이불을 펴주며 그를 다독였다.
그가 이불 속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창구 뒤로 가 이불을 깔았다.
“리치씨는 안 자도 됩니까?”
“나는 너처럼 잠을 필요로 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
“아, 그렇군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아공간에서 수면 안대를 꺼냈다.
은행은 낮이나 밤이나 너무 환해 안대가 없으면 자기 힘들다.
포근한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동수씨, 빨리 일어나세요!”
아침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