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배가 부르고 몸이 가벼웠다.
필요한 것을 다 챙겨서 그런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 정도의 물량이면 은행을 나오지 않고 족히 1년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은행에 샤워실만 있으면 딱 좋았을 텐데.”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은행에는 샤워실과 같은 편의시설이 없다는 것이다.
씻기 위해서는 따로 나와서 페트병을 뚫어 씻어야 한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추가 시설 구매]
코인만 있으면 얼마든지 은행에 원하는 시설을 만들 수가 있었다.
다만 그게 마냥 좋아할 수가 없는 이유는.
[화장실:50,000,000코인]
[샤워실:35,500,000코인]
[수면···.]
시설 하나에 최소 천만 이상의 코인이 필요했다.
지금의 내게는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금액.
세금도 내야하고, 앞으로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지금 코인을 벌기 위해서는 고객을 많이 모아야 했다.
‘나는 사냥으로 코인을 벌 수가 없으니까.’
은행장이라는 직업 특성 때문인지 내가 사냥을 할 때 코인을 벌 수도, 마석을 얻을 수도 없었다.
내가 잡고 나서 그 시체는 1분이 지나면 검은 재로 변해 사라졌다.
오직 고객만이 내가 코인을 벌 수 있는 돈벌이 수단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누가 은행에 찾아올까.’
몬스터가 나타난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여유란 게 사라졌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몸을 숨킬 텐데, 죽고 싶은 자살 희망자나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돌아다니는 건 불가능했다.
그랬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 어느 미친 놈이 그러겠는가.
“음··· 너무 외지야.”
다 떠나서 은행으로 들어가는 던전의 입구가 지날칠 정도로 도시의 외곽이었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세상이 변하기 전에 은행은 도시의 중앙에 있었다.
그것도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위치에 있었다.
“지형이 제대로 바뀌었네.”
지금은 거의 외곽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도시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졌다.
애초에 내가 던전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은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던전으로 갔다.
은행에서 마트까지 5분 거리였고, 그 마트에서 던전까지 1분 거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족히 30분 이상을 걸어야 마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망가지고 변형된 지형지물의 방해까지 합치면 한 시간 이상은 걸렸다.
“주위에 방해물이 너무 많아.”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던전의 입구 주위가 건물의 잔해, 나무 등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이런 곳에 던전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방법이 없나?”
이대로는 고객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 숨겨진 장소이다 보니, 이곳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위협을 무릅 쓰고 들어올 사람들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팻말이라도 만들어 놓을까?”
아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었다.
팻말을 놓았다고 해서 그 팻말이 무사할 거라는 보장도 없고, 그게 함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으음··· 아, 맞다!”
한참을 고민하다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은행을 건설하면서 세금 면제권과 함께 얻은 게 하나 있었다.
‘무료 홍보권.’
무엇을 홍보해주는지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그걸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어떤 걸 홍보해주는지 알 수 있었다.
[‘무료 홍보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나를 유혹하듯 반짝이는 메시지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이걸 사용하면 은행을 홍보할 수 있다는 거지?”
이걸 사용하면 고객을 불러 모을 수가 있다.
‘예’를 향해 나아가던 내 손가락이 그 앞에서 멈췄다.
‘잠깐만. 그런데 또 그 여자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나야 좋지.
괴팍하긴 해도 그로 인해 코인을 많이 벌었다.
오히려 좋아하면 좋아해야지 걱정할 이유는 없다.
‘죽이려면 죽이라지.’
고블린을 상대로 한 번 싸웠던 경험 덕택인지 간이 커진 느낌이다.
[‘무료 홍보권’을 사용하셨습니다.]
[‘차원 은행’의 정보가 전 차원에 퍼집니다.]
이게 다인 건가?
따로 뭐 없나?
[‘대지를 사랑하는 여인’이 ‘차원 은행’에 관심을 보입니다.]
[‘용 학살자’가 ‘차원 은행’에 관심을 보입니다.]
[‘만인의 대장···.
그것도 잠시 끝도 없이 떠오르는 메시지가 시야를 가렸다.
모두가 차원 은행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게 보였다.
그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금을 사랑하는 파괴용’이 당신의 행동에 오묘한 눈빛을 보냅니다.]
지구가 파산 상태가 되었을 때, 내가 은행장이 되는 것과 동시에 내게 관심을 보였던 성좌다.
내 착각인지 그때 보았던 파충류의 눈이 나를 응시하는 듯한 소름 돋는 감각이 내 전신을 간질였다.
[712명의 성좌가 차원 은행에 방문하기를 원합니다.]
[차원 은행에 직원이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들의 방문이 지연됩니다.]
[723명의 성좌들이 차원 은행의 은행장을 재촉합니다.]
[차원 은행이 은행장을 기다립니다.]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시스템이 나를 재촉했다.
어서 은행으로 돌아가라며 메시지가 계속해서 깜빡였다.
“미, 미친··· 이렇게 빠르다고?”
너무도 빠른 반응에 기겁을 했다.
홍보권을 사용한지 1분도 되지 않아 수백 명의 성좌들이 차원 은행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있었고, 그 숫자는 지금도 늘어나고 있었다.
마치 지금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한 그들의 반응에 멍해졌다.
“어, 어씨···!”
이대로 있을 게 아니란 걸 떠올린 나는 급히 은행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갑작스레 고객이 몰려올 줄은 몰랐다.
[은행장님을 귀환을 환영합니다.]
어김없이 떠오르는 메시지를 무시한 채 던전의 통로를 지나쳐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음? 생각보다 빨리 왔군.”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온 나를 보며 엘더 리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게 대답할 시간도 없이 나는 황급히 창구에 앉았다.
[현재 843의 대기자가 있습니다.]
[은행의 출입을 허가하시겠습니까?]
잠시 크게 심호흡했다.
이렇게 많은 고객을 한 번에 상대해본 경험은 없었다.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스렸다.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리치씨, 잘 부탁드립니다.”
“뭐를?”
“지금부터 고객이 들어올 겁니다. 그들을 순차적으로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뭐?”
그가 인상을 찌푸리다 허공을 노려봤다.
그러디니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 일이라면··· 알았다.”
나 혼자라면 모를까, 고객들을 정리해줄 리치가 있으니 조금은 괜찮을 것이다.
‘나, 지금 너무 꾀죄죄하지 않나?’
적어도 보이는 외관 정도는 깨끗하게 하고 고객을 맞이하고 싶었다.
카셀린이야 갑작스런 방문이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지금은 달랐다.
내가 준비를 마치고 그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리치씨, 혹시 클린 마법 사용하실 수 있나요?”
“가능하다. 그런데 왜?”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급히 말했다.
“혹시 제 몸에도 사용 가능합니까?”
“어렵지 않지만··· 아,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내 몸을 스윽, 훑더니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깨끗해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냄새까지 바뀌는 건 없다. 네 몸에 클린을 사용하면 냄새까지 사라진다. 그래도 괜찮은가?”
“네.”
“알았다. 그럼···.”
“자, 잠시만요!”
내게 스태프를 뻗는 그를 황급히 막고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트에서 챙겨온 정장을 꺼냈다.
흙먼지가 묻기는 했지만, 그걸 제외하고 보면 아주 비싼 브랜드의 세련된 정장임은 분명했다.
사이즈를 보고 가져온 것이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갈아입었다.
그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봐도 상관하지 않았다.
시계까지 손목에 찬 채, 그에게 클린 마법을 사용해 달라 부탁했다.
{클린}
끈적한 마나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끈적함 다음으로 상쾌함이 찾아왔다.
“와···.”
손에 묻은 오물과 때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걸 보는 건 묘한 느낌이었다.
‘진짜 냄새가 안 나네?’
땀 냄새등이 사라지고 내 몸에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딱 좋았다.
원래 뭔가 섞여 있는 물하고 그렇지 않은 물 중에, 더 잘 섞이는 건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깨끗한 물이다.
내 몸을 물과 비교하기 힘들기는 했지만, 사람 몸도 그와 비슷했다.
백지 상태에 있을 때에 무언가를 받아들이기가 더 쉬웠다.
예를 들어.
‘향수를 챙기길 잘했지.’
내가 챙긴 물품 중에는 향수도 있었다.
회사 상사에게 선물을 받고 난 후 마음에 들어 쓰기 시작한 향수와 같은 부류의 향수였다.
칙, 치익-
은은한 라벤더 향이 손목과 목 언저리에 맴돌았다.
습관처럼 시계를 만지작거리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 상태로 창구에 앉으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남들은 죽네 사네 하는 마당에 나는 혼자 앉아서 코인을 벌려 하고 있었다.
물론 이게 위험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것도 하나의 전쟁이야.’
지금부터 천 명에 가까운 고객들을 상대해야 했다.
인간과는 다른 그들을 내가 잘 상대할 수 있는지 걱정이 들기 보다는, 어떻게 해야 그들에게서 코인을 더 뜯어낼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출입을 허가한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의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904의 대기자의 출입을 허가합니다.]
그 사이 60명 가까이가 더 늘었다.
아니 그들에게 ‘명’이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 걸까.
은행의 입구를 통해 들어온 그들의 모습은 절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촉수가 수십 개인 점액 덩어리부터, 손가락만한 크기의 요정까지.
무수히 많은 이들이 은행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전부 계좌를 만들게만 해도 벌어들일 수 있는 코인이 수천 만이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건 은근히 짜릿했다.
더군다나 나는 은행장이다.
은행이 내 것인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쿠륵, 쿠르륵,
질처억-
비록 그들과 대화가 통할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에게 코인이 있기만 하면 된다.
“순서를 지켜라. 새치기 할 생각하지 마라!”
엘더 리치는 은근히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카셀린이 터무니없이 강한 거였지, 그가 강하지 않은 건 아니였다.
그가 기세를 뿌리기만 해도 어지간한 이들은 전부 제 자리를 지켰다.
엘더 리치를 바라보고 있으니, 내 앞에 한 남자가 앉았다.
고블린보다 약간 큰 키의 남자였다.
“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됐고, 여기서 뭘 할 수 있는 거지?
미소를 지으며 한 내 말에 그가 거친 목소리를 냈다.
내 환영 인사는 필요 없다면 용건부터 말하라고 그가 노려봤다.
그에게서 숨길 수 없는 강자의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카셀린이 먼저 왔다가지 않았으면 좀 힘들 뻔 했다.
‘고객이다, 고객. 아주 돈이 많은 고객이야.’
나 자신을 세뇌하며 입을 열었다.
“저희 은행에서는 계좌를 개설하실 수 있습니다. 이 계좌를 통해서 상대방과 코인을 거래할 수 있으며···.”
-그게 다야? 생각했던 것보다 별 거 없군.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의 몸을 빠르게 훑었다.
두터운 팔과 작업복, 그리고 망치가 그의 허리에 걸려 있었다.
그런 것을 볼 때 그가 무언가를 만드는 직업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가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은근히 간단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떤가요? 정가로 물품을 판매할 수 있다고···.”
-그런 게 가능하다는 건가?!
그가 창구를 탕 내려치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