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14화 (14/113)
  • 제14화

    혹시 몰라 리치를 먼저 내보내려고 했었다.

    괜히 먼저 나갔다가 던전 앞을 지나가던 몬스터에게 걸려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불상사를 피하려면 뭔들 못할까.

    리치도 불만을 내뱉으면서도 그리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싫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나보고 먼저 나가라고 하려는 낌새가 보일 때 카셀린을 들먹이니,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뒤로 밀쳤다.

    그가 던전의 균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쉽게 밖으로 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던전의 입구가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치지지직-

    그의 손이 닿은 부위에 강렬한 스파크가 일어나며 피부가 벗겨지면서 새카맣게 타기 시작했다.

    “쯧.”

    꽤 고통스러웠는지 그가 인상을 쓰며 뒤로 손을 뺐다.

    그러자 스파크가 가라앉으며, 그 자리에 불길하게도 붉은색의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차원 은행의 경비는 차원 은행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깜빡이는 그 메시지는 내가 아닌 리치에게 향해 있었다.

    절대 경고를 어겨서는 안 된다며 그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아··· 안 되나 보네요.”

    “시스템이란 놈들이 다 그렇지.”

    그는 예상했던 일이라며 가볍게 혀를 찼다.

    “어쩔 수 없네. 너 혼자 가는 수밖에.”

    “음···.”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인데.

    리치가 같이 나가지 않으면 나는 거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와 다름없었다.

    나갔다가 객사할 게 뻔했다.

    ‘그렇다고 안 나갈 수도 없는데···.’

    언제까지 이곳에서 버틸 수는 없다.

    이곳이 휴식의 공간처럼 식량을 제공해주거나, 아니면 소설처럼 시스템에게서 음식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직접 나가서 음식이나, 물 같은 필요한 것들을 구해야 한다.

    “뭘 그리 걱정해. 설마 죽기야 하겠어?”

    “저 혼자는 죽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가? 하긴, 그 몸으로는 어딜 가도 죽기 쉽겠네.”

    내 몸을 스윽 훑어본 그가 스태프를 쥔 손의 검지로 스태프를 톡톡 두드렸다.

    “흠··· 내가 나갈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네.”

    나를 훑어보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설마 나를 언데드라도 만들려는 걸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니,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에 보라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이트 일행을 덮쳤던 언데드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팔로 머리를 가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나를 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거의 본능과도 같았다.

    “받아라.”

    “···?”

    그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왠 반지가 그의 손에 올려져 있었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날개 달린 도마뱀을 타고 있는 기사듯한 반지였다.

    도마뱀의 눈에는 주황색의 보석이, 투구를 눌러쓴 기사의 눈에 붉은색 보석이 달려 있었다.

    “이게 뭡니까?”

    “나를 대신해서 너를 지켜줄 놈이다.”

    “이게 말입니까?”

    “이거라고 하지 마라. 그녀도 들을 수 있으니까.”

    “···!”

    “나의 권속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안에 들 정도로 강한 놈이니, 어지간해서는 네가 위험해질 일은 없을 거다. 그녀가 있는대도 위험해질 정도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애초에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뒷말이 섬뜩하기는 했어도 나는 냉큼 그 반지를 받아들었다.

    이게 어떻게 나를 지켜준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예상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이게 하나의 매개체가 되어 나를 지켜줄 언데드가 소환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거 너무 큰 거 아닙니까?”

    그에게서 받아든 반지는 반지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컸다.

    팔찌보다는 작고, 반지보다 큰 오백원 크기의 동전의 두 배는 되는 크기였다.

    “일단 차고 말해.”

    “알겠습니다.”

    그래도 그가 준 거니 방법이 있겠다 싶어 왼 손 중지에 반지를 꼈다.

    우우웅.

    반지가 옅게 진동을 일으키며 빠른 속도로 작아졌다.

    “아, 맞다 그리고. 그거 처음에···.”

    “네···?”

    그가 내게 뭔가를 경고하려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는 것보다 반지가 손에 딱 들어맞을 정도로 축소되는 게 더 빨랐다.

    푸욱.

    “어?”

    따끔하다 싶더니 몸에 있는 체액이란 체액을 죄다 뽑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거 피를 많이 빨아먹는다고 말하려 했는데 늦었군.”

    ‘그걸 왜 지금 말해 미친놈아!’

    태연하게 뒷말을 잇는 그에게 소리를 칠 시간도 없이 현기증이 내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아··· x발.”

    암흑이 찾아왔다.

    *

    나흘 만에 돌아온 도시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도시에는 더 이상 높디높은 건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생물들을 제외하고 높은 건물들을 부정하듯, 언제나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처럼 보이던 빌딩들과 아파트들을 무너뜨렸다.

    건물들이 무너진 자리에는 기형적으로 생긴 거대한 나무들이 자랐고, 3, 4층 높이의 건물들에는 남성 허벅지만한 넝쿨들이 칭칭 휘감고 있었다.

    “저건 뭐야?”

    가장 소름 돋는 건 모든 고층 빌딩들이 무너진 가운데 유아독존처럼 홀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하나 보였다.

    아니, 저것을 원래 있던 것이라고 봐도 되는 것일까.

    그것을 멀게 보였고, 또 가깝게 보였다.

    ‘탑?’

    그건 푸른색, 노란색이 뒤섞인 아주 기다란 탑이었다.

    하늘까지 치솟은 그 탑은 현대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형태였다.

    홀로그램처럼 보였으면,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탑이라는 틀 안에서 나무가 되었다가 송곳이 되었다.

    송곳에서 공이 되기도 했으며 살면서 본 적도 없는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만남의 광장]

    그 탑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으니, 시스템 창이 떠오르며 그 탑이 무엇인지 알려줬다.

    [만남의 광장은 특정 장소를 제외하고는 유일한 안전지대입니다.]

    [모든 채무자와 채권자 등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내게 저곳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저기는 안전하다고, 오직 저곳에서만 살 수 있다고 나를 설득하는 메시지를 띄었다.

    만남의 광장이라는 탑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너무 멀어.”

    가고 싶기는 하지만 너무 멀었다.

    예전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까지 걸어가려면 몇 개월은 족히 걸릴 것이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꼬르르르륵-

    휴식의 공간에서 나오기 전에 배가 빵빵해질 정도로 먹었는데, 그새 배가 꺼졌다.

    특히 갈증이 심했다.

    긴장을 많이 해서인지 땀을 너무 많이 흘렸다.

    “씻고 싶기도 한데.”

    땀을 푹 흘려서 그런지 온몸이 끈적하고 냄새가 역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그걸 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우우우우우-

    크아아아아!

    저 멀리 수풀이 우거진 도시에서 불길한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몬스터의 울음소리,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직접 보는 게 아님에도 듣는 것만으로 온몸에 털이란 털이 바짝서는 기분이었다.

    “아니야. 믿자. 리치씨가 이걸 괜히 줬을 리가 없어.”

    중지에 낀 반지를 매만졌다.

    오돌토돌한 뼘의 감촉이 나를 진정시켰다.

    간접적으로 리치의 힘을 목격했기에 그가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되었다.

    그런 그가 내게 준 보호구였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리고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으니까.”

    [은행장은 언제라도 ‘귀환’을 사용하여 은행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12시간이라는 쿨타임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무척 좋은 능력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살 수 있는 절대 보호책이 하나 있는 것이다.

    위험할 것 같다 싶으면 귀환을 사용하면 되니, 걱정할 거 없다.

    “가자.”

    걸음을 옮겼다.

    주위를 샅샅이 살피며 도시 안을 누볐다.

    “뭐야, 여기에 강이 왜 있어?”

    도시는 더 이상 도시라고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지형 자체가 바뀌어 있었다.

    도로가 있던 곳에는 처음 보는 강이 생겨났고, 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마그마가 들끓고 있었다.

    “진짜 세상이 멸망한 거네.”

    그걸 보고 있으니 세상이 망했다는 게 체감이 되었다.

    “저 강은 왠지 위험해 보이고···.”

    강을 건널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징검다리처럼 무너진 건물 자제가 강의 반대편까지 연결되어 있기는 했지만.

    “너무 인위적이야.”

    고층 빌딩이 무너졌다고 해서 저렇게 다리가 만들어지는 건 불가능했다.

    겨우 사람 하나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도 문제였지만, 그 옆에서 간간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거품들이 보였다.

    저 길이 함정이라는 것은 지나가던 개도 알 것이다.

    “이쯤에 마트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강에서 벗어나 기억을 토대로 움직였다.

    지형이 바뀐 곳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존재했다.

    “찾았다!”

    그래, 이런 곳.

    강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대형 마트가 있었다.

    유명 브랜드인 만큼 그 마트에는 온갖 생필품들이 가득했다.

    “언제 다시 나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

    잔해들을 돌아다니며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다녔다.

    대형마트여서 그런지 잔해들 속에는 캔으로 되어 있는 음식들이 상당히 많았다.

    다만 문제는.

    “아, 젠장.”

    음식들이 모여 있는 곳에 초록색 괴물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다.

    크기는 내 허리까지 올 정도로 작았지만, 그 생김새가 무척이나 흉악스러웠다.

    쭉 삐져나온 주둥이와 주둥이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들,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는 근육들까지.

    무엇보다 놈들의 손에 조악하지만, 위험한 무기가 들려있었다.

    날이 빠지고 녹이 슨 단도.

    ‘그냥 가기에는 언제 이런 곳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

    지금이 아니면 마트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놈들이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이다.

    키엑, 키에엑.

    이따금 거친 잠꼬대를 하며 놈들이 몸을 뒤척였다.

    “하, 씨. 어떡하지?”

    내게 무기라도 들려있다면 모를까, 나이트 일행처럼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놈들을 상대하기에는 버거웠다.

    더군다나 놈들은 셋인 반면, 나는 혼자였다.

    “돌겠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은데.”

    쭈구려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반지의 촉감이 내 얼굴을 간질였다.

    “어···?”

    생각해 보니 이렇게까지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내게는 엘더 리치가 준 반지가 있지 않은가.

    이게 있는데 내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놈들이 무슨 몬스터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고블린을 닮았다.

    엘더 리치가 얼마나 강한데 겨우 고블린에게 질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감이 무럭무럭 솟아 올랐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잔해들을 뒤적여 철근을 하나 찾아 들었다.

    1m가 조금 안 되기는 했지만, 무기는 무기라고 철근을 들고 있으니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철근을 굳게 쥐고 놈들에게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갔다.

    놈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눈치채지 못한 채 잠을 퍼질러 자고 있었다.

    ‘와··· 저게 다 얼마야.’

    놈들의 가운데 쌓여있는 음식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저걸 다사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계산했다.

    못해도 백만원은 넘게 깨질 게 분명할 정도로, 그것들의 양은 많았고 그 중에는 팩에 쌓인 고기들도 있었다.

    그것만 봐도 놈들이 얼마나 식탐이 많은지 알 수 있었다.

    저걸 다 먹을 때까지 놈들을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

    “후우···.”

    가장 가까이 있는 몬스터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더 소름끼치는 외형이었다.

    진짜 못생겨도 너무 못생겼다.

    신기한 건 엘더 리치의 언데드들 봐서 그럴까,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지금은 크게 두렵지 않았다.

    반지가 나를 지켜줄 것이다. 그 세뇌에 가까운 생각이 도움이 된 것처럼 보였다.

    크게 심호흡하며 철근을 높이 들었다.

    ‘내가 죽일 수 있을까?’

    철근을 높이 든 채 몸이 덜컥 굳어졌다.

    생각해 보니 나는 생명을 죽인 적이 없었다.

    벌레처럼 징그럽다며 죽이지 못했다.

    그런 내가 다짜고짜 생명을 해할 수 있을까.

    아무리 몬스터라고 해도 그게 가능할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생명을 죽이면 그 죄책감에 무척 힘들어했다.

    나라고 그들과 다르지 않을까.

    ‘그냥 음식만 챙겨서 도망쳐도 되지 않을까?’

    답답하기는 했지만, 생명을 죽이는 것보다 그게 더 낫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뭐라고.’

    철근을 내리려고 할 때였다.

    -답답한 놈.

    “···?”

    어딘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아닌 뇌에 바로 때려 박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것도 못 죽여서. 주인님께서는 이런 놈이 뭐라고 나를 보내신 건지···.

    여성의 목소리였다.

    상당히 듣기 좋은 그 목소리가 나를 신랄하게 욕했다.

    -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도와주지.

    그 목소리와 함께 내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즉-

    분수처럼 솟구친 오물이 내 얼굴에 달라붙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