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그녀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그녀의 눈매가 쭉 찢어지며 파충류의 동공이 드러났다.
내 말의 진위여부를 파악하려는 건지 그녀의 눈이 내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기에, 최대한 담담하게 그녀의 눈빛을 받아냈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녀가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 되나? 이제 막 직업의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면서. 어떻게 빚이 없을 수가 있는 거지?”
아니, 내가 빚이 없는 게 그리도 억울해야 할 일인 건가?
빚이 없으면 좋은 거지, 내가 좋다는 데 뭘 그리 험한 반응을 보이는 건지 도통 이해를 못하겠다.
“아쉽게 됐네.”
나는 하나도 안 아쉽다고 말을 꺼냈다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입을 꼭 다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너무 아쉬워. 내게 빚을 지울 수 있는 기회였는데.”
무슨 그런 섬뜩한 말을. 아무리 내가 급하다고 해도 그녀에게 빌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빌렸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내가 그딴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절대 그녀에게 빌리지 않을 것이다.
“흠···.”
무척이나 아쉽다는 얼굴로 그녀가 입맛을 다실 때였다.
[경고! 경고! 은행이 감당할 수 없는 ‘격’이 들어왔습니다!]
“뭐, 뭐야!”
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와 함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은행 전체가 울리기 시작했다.
쩍, 쩌저적-
카셀린과 리치가 싸울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은행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경고! 경고···!]
메시지는 붉게 물든 채,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격?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처럼 뜬금없게 은행이 붕괴할 것 같은 모습에 당황스러워졌다.
“아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건가?”
카셀린이 볼을 긁적이는 게 보였다.
내 눈이 잘못 된 건지 그녀의 몸이 흐릿해지며, 왠 도마뱀이 보였다.
눈을 비비면 비빌수록 그녀의 몸에서 나타나는 변화가 심해졌다.
이제는 아예 그녀의 몸 전체가 일그러졌다.
“좀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녀의 머리에 기다란 산양의 뿔이 돋아났다.
“더 이상 있기는 힘들겠네. 더 있다가는 아예 부서지겠어. 어떻게 만난 건데, 그러면 안 되지.”
[경고···!]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니야!”
그녀가 신경질을 내며 내 앞에 있는 메시지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콰드드득!
메시지가 부서진다.
“그럼 난 가볼게. 아, 이건 선물이야.”
쿠우웅-
선물이라 내놓은 ‘그것’이 내 앞에 떨어지며 굉음을 냈다.
“그럼 안녕! 죽지 말고, 다음에 보자고!”
파아앗-
그녀가 환한 빛을 뿌리며 사라졌다.
[경··· ‘격’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은행의 붕괴가 중지되며, 복원에 들어갑니다.]
[복원에 필요한 비용, 100,000코인을 사용하셨습니다.]
자, 잠깐! 뭐라고?
막을 시간도 없이,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 황급히 차원 은행을 열었다.
[차원 은행 보유 자금:50,000]
그런데 생각과는 다르게, 보유 자금은 그대로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코인을 가져갔다고 했는데, 은행에 있는 코인은 그대로였다.
뭔가 이상했다.
시스템은 도대체 어디서 코인을 가져간 걸까.
‘어? 잠만, 나 정작 차원 은행은 열어봤으면서 내 상태창은 안 열어봤잖아?’
차원 은행이 내 상태창이라 착각할 수도 있지만, 내 상태창은 따로 있다.
은행을 건설하기 전까지 열 수 없다고 했던 내 상태창을 이제야 떠올렸다.
아마 코인이 빠져나갔다는 얘기만 없었어도 끝까지 몰랐을 수도 있다.
「상태창
이름:한정우 / 직업:은행장
고유 특성
차원 은행 / 은행 건설 / 경비원 고용
보유 자금: 0」
아, 역시. 예상이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은행과 별개로 내 개인 자금에서 코인이 빠져나갔다.
은행 건설 최초의 보상으로 받았던 코인이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은행 오만 코인이 있다는 것과 내 빚이 면제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마냥 좋아할 수 없는 게 내게는 한 달에 내야 할 세금이 있었다.
비록 그게 500코인이라는 적은 양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카셀린에게 코인이 시스템에게 어떤 위치에 있는지 들었다.
시스템에게 사람 취급 받으려면 코인이 많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대우는 못 받아도, 적어도 사람 취급은 받고 싶다.
‘그래도 오만 코인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이거라도 없었으면 좀 힘들어질 뻔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생기면 생길수록 커지는 법이라고.
더 많은 코인을 벌고 싶었다.
“리치씨. 리치씨도 계좌를 좀 만드시죠?”
“계좌?”
“네. 설명은 아까 그분에게 해드렸을 때 같이 들으셨으니까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다. 그런데 굳이 만들어야 하나?”
“네. 그분이 와서 만드신 걸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계좌를 만들지 않으면 여러모로 불편해지실 겁니다.”
계좌를 만드는 것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그가, 카셀린을 언급하자 눈빛이 돌변했다.
그녀가 쳐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던 최강자의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카셀린은 등장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그를 처참히 짓밟은 강자가 계좌를 개설했다.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계좌를 개설할 이유가 되었다.
“궁금하지 않나요? 어째서 이런 누추한 곳에까지 찾아와 계좌를 개설한 건지.”
자신이 지내던 곳을 누추하다고 표현했음에도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치의 다른 이름은 지식을 탐구하는 망자.’
강해지기 위해서,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마법사들은 리치가 된다.
설령 수백 년을 산 리치라고 해도 그건 다르지 않았다.
카셀린이 어째서 계좌를 만든 건지 궁금할 것이다.
리치란 그런 존재다. 자신이 모르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하는 이들.
특히 자신보다 강한 이들이 관심있어 하는 것에는 사족을 못 쓴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확실히 궁금하군. 그 계좌라는 게 정확히 뭔지.”
그가 관심을 가졌다.
팔짱을 낀 채 거만한 몸짓으로 내게 턱짓을 했다.
“그럼 나도 그 계좌라는 걸 만들어보지.”
“잘 생각했습니다. 계좌의 등급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석탄이 가장 낮고, 백금이 지금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높죠.”
“알지도 못하는 것에 내 것을 많이 쓸 필요는 없지. 나는 석···.”
“설마 석탄 등급으로 하시겠다는 건 아니겠죠? 그분은 바로 가장 높은 것을 원했는데.”
“다이아로 내놔라.”
풋.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그의 사용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계좌 개설비 50,000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차원 은행 보유 자금:100,000]
한 번의 개설로 두 배로 불어난 코인이 배를 부르게 했다.
물론 그에게는 이 정도 개설비 가지고는 흠집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코인은 ‘억’소리가 나니까.
그럼에도 기쁜 건 기쁜 거였다. 본사에서 일할 때 억대 연봉의 소유자를 만나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의 코인이 부럽기는 해도, 탐나지는 않았다.
내가 넘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코인을 내놓으라 명령을 할 수도 없었다.
[은행장은 합당한 명령만 할 수 있습니다.]
강제로 코인을 뜯어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괜찮다. 그만한 코인의 소유자가 내 직원이었으니까.
‘노예를 잃은 건 많이 아쉽네.’
무보수 노동의 가치는 크다.
어쩌면 내가 가진 것에 가장 큰 가치를 가졌을 이들이 한순간에 죽어버려 무척이나 아쉽다.
‘그러고 보니 리치는 언데드도 부릴 수 있잖아?’
그 언데드를 좀 빌려 쓸 수는 없을까.
“뭘 그렇게 바라봐. 네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순순히 해줄 생각은 없다.”
“알고 있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아, 그러고 보니 그에게도 월급을 줘야 하잖아.’
억대 자본가에게 월급을 주는 입장이라니.
내가 코인이라도 많으면 모를까, 입맛이 무척이나 썼다.
“그런데 은행을 비워둬도 되는 건가?”
“그게 무슨 소리지? 또 어딜 나갈 생각인가?”
“네. 저는 당신과는 다르게 인간이라 음식을 먹어야 하거든요.”
“아, 음식···.”
내 한 마디에 그가 이해하며 수긍했다.
“너는 인간이었지.”
“그래서 그런데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뭐?”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밖이 어떻게 생겼는지. 수백 년을 이곳에 갇혀 지냈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으드득, 그의 이를 가는 소리가 은행 전체를 섬뜩하게 울렸다.
“이제 더 이상 리치씨를 구속하는 건 없습니다. 그러니 저와 같이 세상을 구경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네가 나를 이용해 먹을 생각이라는 걸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거냐? 밖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도, 네 반응을 보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렇다고 계속 여기에만 있을 실 생각입니까? 그리고 제가 죽으면 이곳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그가 스태프를 들어 땅을 찍었다.
쿠우우웅-
땅이 울리며, 돌을 깨부수는 소리와 함께 언데드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섭다. 무섭지만 태연함을 가장했다.
시스템을 통해서 그가 내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주변의 풍경이 무섭기는 해도 그게 날 걱정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 저건 영화다. 공포 영화라고 생각하면 돼. CG에 온 예산을 때려 밖은 좀비 영화.’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 정도 두근거리던 가슴이 진정되었다.
“호오··· 이렇게 빨리 적응을 한다고? 이건 실험해 볼 가치가 있겠는데···.”
애써 진정하고 있는데, 그가 섬뜩한 소리를 해왔다.
이대로 있다가는 과학실 개구리가 될 것 같아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가실 겁니까, 말 겁니까!”
“간다.”
“간··· 다고요?”
“그래. 네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확실히 네 말대로 너무 오래 갇혀 있기는 했어.”
그는 너무 쉽게 내 의견에 수락했다.
오히려 좋다는 듯이, 어서 나가보자며 나를 재촉했다.
“그리고, 너 혼자 나갔다가 죽으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곤란하겠지.”
그의 말에 나는 살짝 감동을 받았다.
아닌 척 하지만 나를 걱정한다는 말이 아닌가.
“아직 내가 못 알아낸 게 많다. 그리고 네가 있어야 그년이 다시 돌아오겠지. 다음에는 결코 쉽게···!”
철회다.
그는 나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카셀린을 끌어들이는 미끼로 보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쨌든 그가 함께 움직여 준다고 했고, 그로 인해 나의 안전성은 대폭 상승되었으니까.
“그럼 어서 나가시죠!”
기쁜 마음으로 그와 함께 은행을 나왔다.
아니, 나오려고 했다.
[차원 은행의 경비는 차원 은행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