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은행에 고객이 찾아왔습니다.]
[시스템을 이용하여 고객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자본이 충분치 않아 은행 대부분에 기능이 제한됩니다.]
[자본을 늘려 제한을 푸실 수 있습니다.]
[현재 가능한 부분은 ‘예금’입니다.]
빠르게 시야를 채웠다 사라지는 메시지 가운데 내게 필요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계좌 개설]
지금 내게 필요한 것.
그것을 누르기가 무섭게 창구 앞에 서 있던 궁사에게서 반응이 나타났다.
“헉···!”
뭔가를 본 것인지 궁사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계좌 개설을 위해 고객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이런 식이구나.
따로 서류를 작성하게 하는 게 아닌, 시스템이 서류를 대신했다.
“시스템 뜬 거 있죠?”
“···네.”
“그거 동의하세요.”
“이, 이거요?”
“네. 불만 있습니까?”
궁사가 슬쩍 옆을 돌아본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리치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콰드드득-
그녀의 손이 짓이겨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녀의 찢어진 뼈와 살점이 내 얼굴에 후두둑, 떨어져 달라붙었다.
“···?”
그녀와 내가 멍하니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뒤늦게 자신의 손이 망가졌다는 것을 파악한 그녀가 몰려오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나이트 일행들이 당황하며 급히 창구에서 떨어졌다.
약속과는 다르다며 내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소리친다.
그런데 나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
아주 유능한 일꾼들이 될 이들을 내가 뭣하러 해치겠는가.
쿠우우우웅-
창구에서 나와 리치에게 향하는데, 리치가 급히 스태프를 소환해 땅을 찍는 게 보였다.
“끄아아아아악!”
내 주위로 검은색의 불투명한 막이 생기기가 무섭게 나이트 일행들이 비명을 지르며 땅에 쓰러져 경련을 일으켰다.
“죽었어?”
그것도 잠시 짧은 경련 후 온몸이 축 늘어진 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흘리는 모습이 너무 끔찍해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짤랑, 짤랑짤랑짤랑-
은행 입구 쪽에서 동전이 마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어째서 저런 놈이 여기에 있는 거지?”
입구를 바라보는 리치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 강한 힘을 보이던 엘더 리치가 긴장하고 있었다.
“흥, 흐응~.”
동전 소리가 멎더니 여자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더욱 소름끼쳐 팔에 닭살이 돋아났다.
“이게 은행이라는 거구나··· 흠, 그리 멋있지는 않네.”
품평을 하듯 주위를 둘러보며 다가오는 그 소리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도저히 옆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공포 영화의 주인공처럼 귀신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은행의 구조는 창구에서 입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아무리 나이트 일행들로 인해 살짝 가려져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인기척 없이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적어도 리치라면 그 침입자를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런데 나이트 일행이 죄다 죽을 때까지 그가 할 수 있었던 건 나와 그를 지키는 방어막을 생성한 게 다였다.
‘시스템도 알리지 않았어.’
리치뿐만이 아니다.
나이트 일행이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고객의 출입을 알려줬던 시스템이, 지금은 침입자의 출입을 말하지 않았다.
“뭐야. 은행에 들어왔길래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적네?”
그녀는 나이트 일행의 시체에 다가가더니 실망한 투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손님이 왔는데 접대를 해야지.”
따악-
그녀가 손가락을 튕긴다.
“젠장!”
리치의 거친 고함과 함께.
콰장창.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방어막이 유리에 금이 가듯 균열이 일며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뒤로 피해라.”
리치가 내 어깨를 붙잡아 뒤로 잡아당겼다.
그 힘에 내 몸이 당겨지다 못해 붕 떠 뒤로 날아갔다.
쿵!
묵직한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흐릿해지는 걸 애써 붙잡으며 정신을 차렸다.
“으윽···.”
던질 것까지는 없지 않았냐고 말할 수도 없는 게, 어느샌가 나타난 파충류의 거대한 발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오··· 이걸 막아?”
“개 같은···!”
한손으로 발을 막아내며, 반대손으로 스태프를 들어 휘둘렀다.
{에어 붐.}
스태프 주위로 공기가 빠르게 모이더니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파충류의 발을 튕겨냈다.
{윈즈 블레이드.}
{인페르노}
{파이어 스톰.}
리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마법을 연달아 사용했다.
게임에서나 보던 마법의 향연에 나는 넋을 잃은 채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강력한 그 마법들은 시체들 가운데 있는 한 여자에게 날아갔다.
그녀는 파충류의 것으로 변한 팔을 되돌리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가벼운 행동이고 움직임이었다.
그저 손가락을 튕기는 그 행동 하나로 인해 벌어진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화악-
바람의 칼날과 뜨거운 불길이 한곳에 모이더니, 모닥불에 물방울이 떨어지듯 증발해버렸다.
그 기가 막힌 모습에도 리치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그의 머리 위로 뜨거운 열기가 뭉치더니, 용암을 머금은 거대한 불덩이가 되었다.
신기한 건 그 난장판 가운데에도 은행의 구조물은 부서지거나, 상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헬파이어.}
게임에서도 최고의 마법이라 불리는 마법이 리치의 손에서 펼쳐졌다.
“이건 좀···.”
전까지만 해도 마법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던 그녀가 그 불덩이에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우우웅-
그녀가 손을 휘두르니 은행 안이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점점 거세졌다.
태풍이라도 들이닥친 듯 은행을 가득 채운 바람은 리치가 소환한 헬파이어에서 빠져나온 불꽃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팅, 티티티팅!
푸른색의 불투명한 막이 불꽃과 바람 사이에서 나를 보호해줬다.
그 덕분에 나는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처럼 그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와··· 쩐다.’
그 둘이 싸우는 모습의 감상평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평범한 인간에게 있어서 비현실적으로 보이기에, 오히려 감흥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그저 대박이다, 저게 가능한가? 이런 기분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대단하기에 그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엘더 리치는 엘더 리치라는 건가. 제법이네.”
한참을 싸우던 그녀가 작게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짝.
박수 한 번에 은행을 가득 채우던 마법들이 사라지고.
짝.
두 번에 리치가 거대한 충격을 받아 뒤로 날았다.
“커헉!”
고통스러워하는 그에게 여자가 가까이 다가가 가슴을 발로 지긋이 밟았다.
리치가 고통스러워하며 벗어나기 위해 몸을 꿈틀거렸지만, 여자의 발은 그 위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이제 좀 진정하는 게 어때? 나는 너희들을 해칠 생각이 없거든.”
“그런 놈이 다짜고짜 살수를 날려?”
“너희들을 공격하려던 건 아니였거든? 그리고 결과적으로 너희들은 무사하잖아.”
그게 뭐 대수냐는 듯이 그녀가 웃으며 발을 내렸다.
발이 떨어지기 무섭게 벌떡 일어난 리치가 제 옷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냈다.
“이야. 근데 대단하네. 이렇게 날뛰었는데도 흔적 하나 없다니. 도대체 코인을 얼마나 쏟아부은 거야?”
은행을 둘러보며 그녀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리치가 일어나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무형의 힘에 짓눌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오랜만이야. 그때는 제대로 인사를 못해서 많이 아쉬웠어.”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내게 손을 뻗었다.
불투명한 보호막은 어느샌가 사라져 나와 그녀를 가로 막는 장애물 없이 그녀의 손이 내 볼에 닿았다.
‘오랜만이라고? 나는 처음 보는데···.’
아니, 그런 걸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내 볼에 닿은 그녀의 손이 뱀의 혀처럼 내 볼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탐욕스러운 과실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그녀의 금빛 눈이 내 몸 전체를 훑었다.
무서웠다. 리치와의 결전을 보고난 후이기 때문인지 그녀가 나를 매만지고 있음에도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아주 작은 움직임만 보여도 그녀에게 잡아먹힐 것 같았다.
“은행··· 은행이라···.”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흥분과 광기가 공존해 있었다.
리치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었다.
그는 지금도 무형의 기운에 저항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설령 그가 풀려났다고 해도 그녀를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 이 향긋한 돈 냄새···.”
그녀가 몽롱한 눈을 한 채 내 목에 코를 들이밀었다.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쉰 그녀가 마약에 취한 얼굴을 한 채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눈에 띄는 미인이기는 했지만, 그런 외모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 있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
그녀의 말에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리치를 짓뭉게던 손이 내 목 언저리를 쓰다듬고 있는데 살겠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음··· 반응이 재미있기는 하지만, 내 목적은 이게 아니니까.”
한참을 내 몸을 어루만지던 그녀가 아쉬운 눈을 하며 내게서 떨어졌다.
“허억··· 허억···!”
그제야 막혔던 숨통이 트이며, 그녀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숨을 격하게 몰아쉬었다.
조금만 숨을 쉬는 게 늦었어도 그대로 죽을 뻔했다.
“일단 대화를 하기 전에 지저분한 것부터 치우는 게 좋겠네.”
그녀가 시체들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 뿜어져 나온 불길이 시체 전부를 불태워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에 만족한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돌아봤다.
“손님 안 받을 거야?”
‘손님?’
“뭘 그리 멍하니 있어. 나 손님이라니까.”
“아···.”
그녀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님, 그 말은 그녀가 내 고객이라는 것인데.
그녀의 첫인상이 너무 과격해 그녀를 대하는 면에서 모든 게 조심스러워진다.
조금만 잘못한 게 있어도 그녀에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른 침을 삼키며 창구로 걸어갔다.
그녀가 나를 따라 걸어와 창구 앞에 섰다.
“자, 그래서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지?”
“어, 그게···.”
나이트 일행을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잘 돌아가던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 돌이 된 것처럼 멍해졌다.
똑똑.
그녀가 창구를 두드린다.
“나는 그리 인내심이 좋지 않아서, 빨리 해줬으면 하는데.”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거짓말이 아닌 듯 그녀의 전신에 기세가 들끓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해달라는 거야!’
막상 그녀를 앞에 두고 있었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가 뭘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는데 무턱대고 뭔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야.’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었다.
그녀의 계좌를 개설해주는 것.
다만 그 계좌에도 여러 가지가 존재했다.
통장도 급여 통장, 외화 통장, 청약 통장 등등···.
쓰기에 따라서 다양한 통장을 만들 수 있다.
계좌도 그와 마찬가지다.
청약이나 외화와 같은 것들은 없지만. 계좌의 한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석탄 등급의 통장이 있다. 이건 최대 10만 코인까지 거래가 가능한 통장이고 개설하기 위한 비용이 2,000코인이다.
그런데 그것과는 반대로 백금 등급의 통장은 5,000만 코인까지 거래가 가능하며 개설비 또한 50,000코인이나 되었다.
그녀에게 코인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도, 잘하면 그녀에게서 많은 코인을 받아낼 수도 있다.
“음··· 그래서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코인을 벌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은행에 다니던 버릇이 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