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엘더 리치는 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체를 되찾은 건 좋았다.
리치가 되기 전보다 월등히 빼어난 육체를 가지게 되었으니까.
‘이제 맛을 느낄 수 있어!’
무엇보다 그를 가장 크게 기쁘게 해준 것은 인간의 몸을 가지게 됨으로, 후각과 미각까지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언제나 맛을 느끼지 못해 아쉬웠었다.
만약 맛을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다면, 그리 오랜 시간을 살았다고 이렇게까지 절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맛에 대한 즐거움에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겠지.
“이건 또 뭐야?”
살아생전의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던 그가 얼굴을 굳히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부터 시스템의 종말까지 은행장 ‘한정우’에게 봉사를 해야 합니다.]
[게이트 키퍼에게 시스템이 적용되는 이례적인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시스템은 이 일을 심각히 검토할 것입니다.]
[당신의 직업은 ‘경비원’입니다.]
[충실하게 업무를 수행하여 직업의 등급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경비원’의 월급은 1,500코인입니다.]
[상태창을 말하거나 떠올려 보유 금액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말하던 시스템이 자신에게도 적용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그건 둘째치고서도 자신이 인간의 부하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입으로 이런 말을 하면 자뻑이기는 하지만, 그는 엘더 리치다.
모든 리치들의 장로 격이며, 마왕과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고용이 되는 것을 수락했다고 하지만, 시스템이 자신에게까지 힘을 쓸 수 있을 줄이야.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지?’
그나마 말이 잘 통하는 인간의 밑에 들어간 것에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에게 강제적으로 힘을 행사한 시스템에 화를 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는 거겠군.’
이건 자신의 안일함에 탓을 해야 한다.
던전의 핵이 부셔저도 신체를 유지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설령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간섭할 수 없다는 자만을 하고 있던 게 실수였다.
자만하지 않고 조금만 더 조심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흐음···.”
그리고 마냥 나쁜 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그가 육체를 가지게 되었으니까.
그것도 힘이 넘쳐나며 미각과 후각 그 모든 게 예민할 정도로 잘 느끼는 신체를.
그것에만 만족해도 충분했다.
‘이 은행이라는 것은 처음 들어 봐. 은행, 은행이라··· 돈을 이용하는 기관인 건 독특하군.’
그가 살던 시대에도 돈을 관리하는 곳이 있었다.
다만 그게 왕국에서 관리했고, 시스템이 알려주는 것처럼 체계적이지 않았다.
특히 저금과 계좌라는 것이 신기했다.
가상화폐를 만들다니, 이 어찌 참신한 방법이란 말인가.
이런 체계면 충분히 돈을 관리하기 용이하겠지.
[‘경비원’은 은행 최고 권위자인 은행장의 말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단, 그 명령이 시스템이 보기에 부당하다면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시스템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그걸로 충분했다. 필요한 정보는 다 들었으니까.
“저··· 리치님?”
“···?”
막 상태창을 확인하려는 그의 귀로 묘하게 흥분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첫 명령을 해도 되겠습니까?”
웃는 그 얼굴이 왠지 모르게 불길해졌다.
*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가지각색의 감정 표현을 하는 리치를 바라봤다.
‘정말로 내 말을 들을까?’
시스템이 엘더 리치가 내 부하가 되었다고 말해주었지만, 그의 위용을 보았던 나는 쉽사리 그 말에 따라 그를 대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내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면 우유부단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게 소설이었다면, 내 행동에 답답하다고 고구마 몇 개는 먹은 것 같다고 독자들이 욕할 수도 있다.
나도 안다. 내 행동이 얼마나 답답한지.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이건 내가 조심성이 많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모 아니면 도라고 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시스템은 내게 답을 제시하고 있다.
시스템을 믿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까지의 일을 보면 내가 의심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의심을 할 시간에 시스템을 받아들여 이익을 챙기는 게 나았다.
“저기··· 리치님?”
“···?”
“그럼 첫 명령을 해도 되겠습니까?”
“뭐···?”
리치가 그 고운 눈매를 찡그렸다.
명령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는지 그가 불편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불길한 오오라가 그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지금 내게 명령을 하겠다는 거냐?”
그의 살벌한 기세에 절로 몸이 떨렸다.
뼈만 있던 몸과는 다르게 근육과 피부가 생겨난 그는 전보다 더 생생한 감정 표현을 할 수 있어서 그런지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그가 인상을 쓰면서 생겨난 주름까지 생생하게 보였다.
그가 얼마나 심기가 불편하지 자세히 알 수 있는 게 되려 불편해졌다.
‘지면 안 돼. 시스템을 믿는 거야.’
던전의 보스방을 은행으로 만들었을뿐더러 리치를 사람으로 만든 시스템이다.
아무런 힘이 없는 내게 모순적이게도 믿을 건 시스템 밖에 없었다.
“네. 명령이요.”
“···하. 그래, 한번 지껄여봐라.”
리치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봤다.
허튼 소리를 하면 공격하겠다는 분위기를 잔뜩 풍기는 그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와 함께 은행을 돌아다녀 주실 수 있습니까?”
“뭐?”
리치가 무슨 개소리냐는 듯이 인상을 팍 썼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은행의 입구를 바라봤다.
보스방에 들어와 나를 미끼로 던지고 도망친 나이트 일행.
던전이 은행으로 변하고,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육체의 재구성이 있었던 리치와 휴식의 공간에 있었던 나와는 다르게, 그들은 은행이 만들어지는 그 삼일 동안 던전에 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던전에서 삼일을 갇혀 있어야 했을 텐데.
그들이 살아 있을 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 그렇다고 혼자 움직이기는 무서웠다.
내가 무슨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게 악감정을 가진 그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엘더 리치가 함께 한다면 다르다.
한 번의 손짓으로 나이트 일행을 물리친 그의 힘이라면,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왜 그래야···.”
거절을 하려던 그가 무언가를 봤는지 입을 다물었다.
“이건 부당한 명령이다! 내가 왜 그딴 명령을 들어야 하지?”
“빌어먹을! 그딴 일을 내가 하란 말이냐?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나는 모든 리치의 지배자, 엘더리치다! 그런 건 내 아이들을 사용하면 충분하다!”
“애초에 날 이곳에서 나가지도 못하게 했던 놈들이 이제와서 나가라고?”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내가 싫다고 하지 않나! 그딴 협박에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나?”
허공을 향해 버럭 소리지르는 그의 몸이 돌연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꽈득, 꾸드득-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피부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그에 그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아, 알았다! 알았다고! 이 미친놈아! 하면 될 거 아니야!”
다급히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 마구 쪼그라들던 그의 몸이 다시 탱탱해지며 생기를 찾았다.
“후욱··· 후욱··· 젠장. 어떻게 얻은 몸인데, 이렇게 잃을 수는 없지.”
거칠 게 숨을 몰아쉬며 그가 내게 다가왔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이를 갈았다.
“으득··· 가지.”
“···네.”
소름끼치는 그의 눈빛에 닭살이 돋은 팔뚝을 벅벅 긁으며 은행의 출구로 걸어갔다.
그 앞에서서 가만히 출구를 바라봤다.
입구겸 출구인 그곳을 통해 나가려니, 괜히 망설여졌다.
나가도 되는 걸까. 나가면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무사할 수 있을까.
은행이 된 보스방을 나가는 것 하나만으로도 온갖 잡생각이 들었다.
나조차 이런 내가 짜증날 정도로 답답했다.
“멍하니 서서 뭐하고 있어? 나갈 거야, 말 거야?”
일을 할 거면 빨리 끝내자며 그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살살 친 것 같은데, 배구 선수가 등짝을 때린 것처럼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악!”
“뭐가 아프다고, 비명이야?”
눈물이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니, 그가 나를 어쩌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프긴 했지만,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부터가 의미없는 행동이었다.
고민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내 모습이 참 한심하다.
“나가면 절 최우선적으로 지켜주셔야 합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하지 말라고 해도 그러려고 했어.”
같은 소리 반복하면 한 대 더 때리겠다며 그가 인상을 썼다.
그에 크게 심호흡하며 문에 손을 뻗었다.
은행을 나가기 무섭게 습한 동굴의 냄새가 났다.
“흠··· 밖이 이렇게 생겼었군.”
리치는 뭐가 그리 신기한 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마치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사람 같았다.
“그럼, 갈까요?”
“가지.”
수백년을 보스방에 갇혀 있었기 때문인지, 리치는 툴툴거리면서도 묘하게 기뻐보였다.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옆을 지나쳐 선두에 섰다.
“젠장!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되냐고!”
“벌써 삼일이야! 삼일을 여기서 갇혀 있었단 말이야!”
“젠장!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돼?”
“그럼, 그놈을 상대할 자신은 있고?”
“없지···.”
한참을 걸어가니 남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함께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나를 미끼로 버렸던 놈들이다. 그놈들에게 어떤 복수를 할까라는 생각보다는 나를 굳이 버리고 가야 했는지 물어보고 싶다.
내가 살인에 미친 것도 아니고, 이유도 듣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일 필요가 없지. 죽이지 않고도 괴롭히는 방법은 많으니까.’
일단은 그들의 변명을 들어보고 싶다.
“배고파···.”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고 싶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살펴봤다.
던전에 들어올 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챙겨오지 않았는지, 그들은 그사이에 엄청나게 핼쑥해져 있었다.
삼일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으니, 오히려 그들이 지금까지 제정신으로 버티고 있는 게 신기했다.
굶는 건 그렇다 쳐도, 물은 삼일 이상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고 들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생각만 해도 더러운 방법이 한 가지가 있다.
자신의 소변을 받아 마시는 것.
소변을 마시면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다.
“저번에 그놈들이군. 저놈들을 처리하면 되는 건가?”
“아니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스태프를 소환해 당장이라도 언데드를 소환할 것 같은 그를 진정시키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뭐, 뭐야!”
“너,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나를 발견한 나이트 일행이 기겁하며 벌떡 일어났다.
“으윽···.”
“정신차려. 저딴 놈한테 당할 거야?”
“너, 이 새끼.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체력이 없는지 일어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그들은 나를 노려보는 눈빛 하나만큼은 살벌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그들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리치의 등장에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