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은행이 건설되는 시간이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무려 3일의 시간이 걸리다니.
아무리 무료로 건설이 된다고는 하지만, 걸리는 시간이 너무했다.
‘아니지. 달리 말하면 3일 동안 안전해질 수 있다는 거잖아.’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어찌됐든 은행이 건설되는 그 3일 동안은 이 새하얀 공간에서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거였으니까.
거기다.
[이곳에서 지원되는 모든 용품들은 무료로 제공됩니다.]
이게 가장 컸다.
배가 고프다 생각을 하면 무인 주문 시스템처럼 허공에 수천 가지의 음식들을 고를 수 있는 메뉴판이 등장했고.
심심하다 생각을 하면 게임기부터 소설책까지 하루 종일 즐길 수 있는 오락 거리들이 생겨났다.
자고 싶을 때는 포근하고 아늑한 침대가, 운동하고 싶을 때는 수십 개의 운동 기구들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필요한 것들이 알아서 나타나는 이 새하얀 공간은 얼핏 보면 정신 병원 같지만, 실상은 사람들이 꿈에 그리던 지상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내가 하고자 하는 걸 전부 할 수 있었다.
세상이 멸망의 길을 걸으면서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는 세계에서, 이것들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축복이라 말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리치는 어디로 간 거지?’
은행을 건설하기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던 엘더 리치가 보이지 않았다.
그와 나는 개별적인 존재라며 강제로 다른 공간으로 떨어뜨려 놓은 기분이었다.
“아니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오히려 생명에 위협을 받지 않아 무척이나 편안했다.
엘더 리치의 앞에서는 숨소리 하나도 그에게 거슬리지 않을지 신경을 써야 했다.
모든 행동에 조심하며 눈치를 보는 그 시간은 수억을 준다고 해도 다시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최악의 시간이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
엘더 리치에게 느껴지는 그 위압감과 공포심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할 정도로 끔찍했다.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르며, 악몽을 꾸게 했다.
그를 고용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뭐든지 말해주십시오.]
휴식의 공간에서의 시간은 무척이나 평화롭고 편안했다.
시스템은 날 졸졸 쫓아다니며 내게 필요한 게 없는지 물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대령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요. 지금은 없습니다.”
이미 충분한 휴식을 취했기에 시스템에게 바라는 게 없었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그런데 시스템이 집요할 정도로 달라붙었다.
5분에 한 번씩 내게 필요한 게 없는지 물었다.
“없습니다. 저를 좀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없다고 몇 번이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났다 싶으면.
띠링.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어김없이 시스템이 내게 물어왔다.
작은 메시지에 불과한 데, 그 메시지에서 광기마저 엿보였다.
어떻게든 내게 무엇이라도 줘야한다는 광기가.
‘이게 문제구나.’
세상에 공짜란 없다고 했던가.
그 말이 이럴 때에 쓰는 건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 나는 편한 몸과는 다르게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힘들었다.
수시로 말을 걸어오는 시스템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찾을 텐데, 그것을 모르는지 시스템은 너무 집요했다.
‘복수라도 하는 거야, 뭐야?’
건설에 필요한 금액을 시스템이 지불했다.
어쩌면 시스템은 그것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0’의 향연은 그게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발 좀 그만···.”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필요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떠오르는 메시지에 정신이 피폐해진다.
이제는 한 시간이라도 빨리 은행이 건설되어 이 공간에서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잔여 시간 47:24:12]
하지만 참으로 슬프게도 시간이 이틀이나 남았다.
이틀의 시간동안 저 빌어먹을 시스템을 봐야 한다니.
멸망한 세상에 있지 않아서 좋다는 마음이 사라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
[01:05:12]
1시간 남짓한 시간이 남았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지금도 나를 괴롭히는 시스템과도 이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무척 오래도 간절히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푹 쉰 다음 시간을 확인했다.
[00:01:32]
1분 남짓한 시간이 남았다.
이제 이곳도 끝이라고 생각하니, 의외로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 짧은 사이에 정이라도 든 거냐고 물어보면 당당히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아쉬운 건, 시스템의 괴롭힘을 떠나서 이곳은 너무도 편안했다는 거였다.
시스템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삼일을 꾸준히 들으니 익숙해졌다.
인간이 적응의 생물이란 걸 이때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던 시스템이 익숙해질 수 있다니.
‘조금 아쉽기도 해.’
이제 이 공간에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 했다.
시스템이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것을 감수해도 이 공간에서의 삶은 행복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고독함에 미치겠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긴 시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세상이 멸망하기 전부터 아싸의 삶을 살아왔기에 오히려 혼자가 편했다.
[은행 건설이 완료되었습니다.]
[휴식의 공간에 입장 시간이 종료됩니다.]
[휴식의 공간에서 퇴출됩니다.]
들어왔을 때처럼 나갈 때도 환한 빛이 나를 휘감았다.
[최초의 차원 은행이 건설되었습니다.]
[‘최초’의 보상으로 10만 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최초’의 차원 은행은 장차 새로이 만들어질 은행들의 본사가 됩니다.]
[지구 ‘최초’로 ‘엘더 리치’를 고용하셨습니다.]
[‘최초’의 보상으로 ‘무료 홍보권’을 획득하셨습니다.]
환한 빛이 걷히기 무섭게 메시지들이 시야를 빼곡하게 가렸다.
[은행장님을 환영합니다.]
메시지가 사라지며 아름다운 미성이 귀를 간질였다.
나를 괴롭히던 기계음이 나던 시스템과는 다른 목소리였다.
언제라도 듣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여기가··· 은행···?”
눈을 깜빡이다 주위를 둘러봤다.
휴식의 공간만큼이나 하얀 내부가 보였다.
다만 눈을 찌푸릴 정도로 하얀색이 아닌, 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을 안정시키는 하얀색이었다.
이건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런 색이었기에, 이런 공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놀라웠다.
“창구···?”
은행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창구가 보였다.
손님을 상대하도록 만들어진 공간.
창구의 앞으로 대기할 수 있도록 여섯 개의 자리가 마련되 었었고, 그 뒤로 은행을 오갈 수 있는 출입구가 있었다.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도 볼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은행장이라는 직업을 얻기는 했지만, 그게 정말로 은행의 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스윽-
손가락 끝으로 창구를 쓸었다.
먼지 하나 묻어나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고, 그만큼 새하얬다.
“후우···.”
멸망한 세상에서까지 일을 해야 한다니.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편안하게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걸까.
창구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는 사용을 실패한 상태창을 불렀다.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금색의 창이 떠올랐다.
「<상태창>
이름:한정우 / 직업:은행장
고유 특성
차원 은행/ 은행 건설 / 의사소통 / 경비원 고용
보유 자금:100,000」
무척이나 간결했다.
현재 내가 얻은 능력과 직업, 그리고 이번에 얻은 코인이 적혀 있었다.
가지고 있는 고유 특성을 쭈욱, 살펴보다가 가장 눈에 띄는 차원 은행을 눌러봤다.
「<차원 은행>
은행장:한정우
보유 자금:0
[예금][대출][적금]
보유 특성
-현재 보유한 특성이 없습니다.」
이게 앞으로 내가 관리해야 할 차원 은행이구나.
신기한 마음에 이리 저리 살펴보고 있을 때 등 뒤로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뭘 그리 노려보는 거지?”
“···!”
그에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한 남자가 내가 있던 자리에 서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의 가슴에는 똥색의 명찰이 하나 달려 있었다.
그 명찰에는 그의 이름으로 보이는 게 적혀 있었다.
[리치.]
참 간단명료하면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리치라면, 그리고 이곳에 있을 리치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내 모습이 많이 바뀌기는 한 가 보군. 그렇게 놀라는 걸 보니.”
“어··· 어떻게···?”
엘더 리치.
내 경비원으로서 일하겠다고 동의한 던전의 보스.
그밖에 없는데··· 내가 알던 외형과는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우선 키가 줄었다.
검은색 그림자 로브를 뒤집어 쓴 그는 거의 3m에 가까운 크기였는데, 지금은 2m 조금 안 되는 크기였다.
그리고 뼈밖에 없던 몸에 살이 붙어 있었다.
전에 있던 뼈처럼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피부였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이 불꽃이 있던 자리를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을 동시에 보니 그가 상당히 미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목소리가 왜 이러지. 뭔가 이상하군.”
리치는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 행동조차 한 폭의 그림으로 보일 정도의 외모였다.
“아니···.”
이걸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뼈만으로 이루어져 있던 그의 몸이 눈부신 미남으로 변한 그 모습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을 줬다.
해골 바가지가 알고 보니 미남이었다?
실제로 보지 않으면 믿기 힘든 일이었다.
“뭘 그렇게 바라보는 거지? 근데 뭐 이렇게 불편해.”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새롭게 생겨난 근육과 피부, 피들이 불편했는지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피부를 벅벅 긁었다.
“···?”
그러다니 제 손을 내려다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이건?”
제 손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지금 내가 어떻게 보여?”
“사람이요.”
“그, 그래?”
내 대답에 그가 황급히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지잉-
그의 정면에 몸 전체를 비출 수 있는 전신 거울이 하나가 생겨났다.
검은색의 오오라가 불길하게 감도는 거울이었다.
“미친!”
그가 거울에서 제 얼굴을 붙잡더니 경악섞인 비명을 터뜨렸다.
“내, 내가···!”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별 행동을 다했다.
손가락을 혓바닥을 쭉 잡아당기는가 하면, 정장을 벗어던져 자신의 나체를 살펴보기까지 했다.
그의 덜렁이는 ‘물건’이 보이기 무섭게 황급히 등을 돌렸다.
“뭐, 뭐하시는 겁니까!”
남의 것을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황급히 옷을 도로 입으라고 소리치며, 그가 옷을 입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를 돌아볼 수가 있었다.
“내, 내가 인간이 되었어! 내게 살이 생겼다고!”
그가 환호를 터뜨리며 나를 꼭 껴안았다.
뛸 듯이 기뻤는지 그는 한동안 진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날뛰고 나서야 그가 겨우 진정을 하며 숨을 골랐다.
“크헉··· 후욱··· 인간의 몸이라서 그런지, 겨우 이 정도 움직였다고 힘들군.”
땅에 드러누워 기쁜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까지 몰랐던 겁니까?”
“알 방도가 없지. 내가 깨어난 것도 네가 나타났을 때였으니까.”
“깨어났다고요?”
“어. 계산을 해보면 대략 삼일 정도 의식을 잃었겠네.”
삼일이면 은행의 건설 시간과 똑같다.
고용이 되어서 그런지, 은행과 함께 그 모습이 변형되었다고 보면 된다.
“기분이 많이 좋으신가 봐요?”
“그럼 좋지, 화가 나겠어? 내 리치의 삶 절반을 인간의 몸을 되찾기 위해 투자했어! 포기하고 있었는데···!”
“아, 그래요?”
나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를 볼 틈이 없었다.
시야를 가리는 메시지에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외톨이 리치’는 경비원으로서 계약 만료 전까지 은행장의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외톨이 리치’의 계약은 시스템에 ‘종말’이 오기 전까지 유지됩니다.]
멍하니 있는 나를 엘더 리치가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