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잘못들은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이나 다름없을 핵을 내게 준다니, 생에 미련이 없고서야 그런 말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리치는 죽기 싫어서 인간을 포기한 거잖아?’
영원히 살기 위해 리치가 된 그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다는 건 모순이나 다름없었다.
-왜 그리 놀라지? 너에게는 좋은 일이 아닌가.
당연히 좋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던전의 핵이 필요했고, 엘더 리치를 쓰러뜨리고 핵을 얻을 자신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알아서 핵을 준다고 하는데, 그 누가 싫어할 수 있을까.
백이면 백 기뻐 미쳐 소리칠 것이다.
그 정도로 엘더 리치의 말은 파격적이었다.
‘왜지? 도대체 왜 준다는 거야?’
슬프게도 그 말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대해 아는 게 없었고, 무엇보다 엘더 리치다.
몬스터의 말을 쉽게 믿는 것도 이상하다.
그가 변덕을 일으켜 나를 죽일 수도 있지 않은가.
엘더 리치를 대할 때에는 조심에 조심을 가해야 한다.
-아, 그렇군. 그렇지.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겠어.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엘더 리치가 손을 들어 턱을 매만졌다.
딱딱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뼈가 뼈를 긁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따악-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방금 전까지 내가 마시던 찻잔이 사라지며 탁자의 가운데에 둥그런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롱한 푸른색 빛깔을 뿜어내는 아름다운 구슬이었다.
농구공만한 크기의 신비로운 구슬을 엘더 리치가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네가 원하는 던전의 핵이다.
이게 핵이라고?
던전의 핵이란 게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거였나.
소설과 현실은 다르니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나이트 일행의 반응을 떠올리면 그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던전을 나가기 위해서 언데드들을 죽였고, 보스를 죽이러 왔다.
그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보스가 지키는 던전의 핵이리라.
핵을 깨야 이곳에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던전 클리어를 위해 그렇게 강한 이들이 뭉친 것만 해도 핵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쉬웠다면 혼자 들어와 빠르게 클리어했을 거다.
‘그런 걸 이렇게 쉽게 얻는다고?’
엘더 리치의 속셈이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보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핵이 없어도 죽지 않는 걸까, 핵이 아닌데 핵이라고 말하며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은 아닐까.
온갖 잡생각이 들었다.
핵이라고 보여준 구슬을 만져도 되는 건지 의심부터 들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의심을 하는 건가?
내가 한참을 망설이고 있으니, 엘더 리치의 눈이 좁혀졌다.
불꽃이 일렁이며 나를 직시했다.
자꾸만 의심하는 내가 불편해졌는지 구슬을 내게 밀었다.
-지금이 아니면 네게는 기회가 없다. 그래도 계속 의심만 할 건가?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란 없다며 나를 응시하여 압박했다.
그 눈빛에 마른침을 삼키며 구슬에 손을 뻗었다.
어차피 그가 뭘 하든 내 목숨은 그에게 달려 있었다.
이게 핵이 맞다면 내게 나쁠 건 없었다.
오히려 좋다고 볼 수 있었다.
이 구슬을 만지지 않아 죽을 거라면, 뭐라도 해보고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렇지. 이제야 말이 통하는 군.
구슬에 손을 뻗는 내 모습에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엘더 리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춘 채, 구슬을 만졌다.
띠링.
알림음이 들려오며 메시자가 시야를 가렸다.
[던전의 핵과 접촉하셨습니다.]
[던전의 핵을 이용하여 차원 은행을 건설하실 수 있습니다.]
[무료 은행 건설권을 획득하였습니다.]
메시지가 사라지며, 메시지가 있던 자리에 네모낳고 기다란 직사각형의 티켓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무료 은행 건설권.]
-던전 등급에 상관없이 무료로 은행을 건설할 수 있다.
간략한 설명이 보였다.
이것을 사용하면 은행을 건설할 수 있다고 한다.
[은행을 건설하시겠습니까?]
은행을 건설하겠냐는 메시지가 떠오르고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래도 되는 건가.
주인이 허락했다고는 하지만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야, 그가 하라고 했는데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지.’
이왕 하는 거 끝까지 하자는 생각으로 눈을 질끈 감은 채 예를 눌렀다.
[은행 건설이 시···.]
[Error- Error-!]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합니다!]
경고음이 들려오며 불길한 붉은색이 내 눈을 자극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줄 몰라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게이트 기퍼가 남아 있습니다.]
[게이트 키퍼로 인해 은행 건설이 지연됩니다.]
[특정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은행장의 고유 특성-‘경비원 고용’이 개방됩니다.]
[게이트 키퍼를 경비원으로 고용하실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내게 새로운 능력이 생겨났음을 알려줬다.
뜻밖의 상황이었다.
은행 건설이 불가능한 건 둘째 치고, 엘더 리치를 고용할 수 있다니.
신박하다면 신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누가 엘더 리치를 고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는가.
‘확실히 그를 고용하면 대박인 건 틀림없어.’
현 세상에서 엘더 리치가 내 편이 된다면 두려울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최강이나 다름없는 엘더 리치가 내 편이 두려울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내게 그를 설득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내 밑에 들어오세요!’ 했다가 바로 땅 밑으로 들어가버리는 수가 있다.
엘더 리치를 상대하는 면에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뭔가 뜻대로 안되나보군?
“···네.”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게이트 키퍼는 누가 봐도 엘더 리치였다.
그가 존재하는 한 은행을 건설할 수 없다고 하니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핵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놨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를 죽이거나 고용을 해야 한다고.
그는 말이 통하는 언데드였다.
그러니 혹시 모르기에 그에게 내 속사정을 털어놓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거 참, 까다롭군.
동감이다.
처음에는 던전을 건설하라고만 했다가, 이제는 게이트 키퍼를 제거하거나 영입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기까지 했다.
어찌보면 시스템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수도 있었다.
던전이란 곳이 죽고 죽이는 곳인데, 그곳에서 나는 어떠한 살생도 하지 않고 보스방까지 들어왔으니.
시스템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
엘더 리치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내 뒤를 힐끔 바라보더니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 그런 거였어. 그리 간단한 것이었는데···.
엘더 리치가 어딘가 후련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간단하군.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나를 영입해라.
“네?”
진짜 엘더 리치는 사람을 놀래키는 데 재주가 있었다.
내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이 엘더 리치는 턱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던전에 큰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증오스러울 정도지. 생각해 봐라. 이런 곳에 수백 년을 갇혀 살면서 침입해오는 적들을 상대해오는 삶을. 실에 묶인 꼭두각시의 삶을.
“···.”
-이곳에서는 내 뜻대로 죽을 수도, 나갈 수도 없다. 나는 이 공간을 벗어날 수도, 부술 수도 없다. 이 던전이란 곳에 나는 귀속되어 세계의 도구가 되었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리치가 되었지.
그의 목소리에는 언뜻 분노마저 담겨 있었다.
자신을 이곳에 가둔 이에 대한 증오를 보였다.
그는 말하고 있었다.
던전에서 수백 년동안 쳐들어오는 적을 상대해온 시간들을.
-처음에는 좋았다. 나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내가 보지 못한 마법의 끝을 보기 위해서 기꺼이 리치가 되었고, 던전에 귀속되었다.
-적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내 마법 또한 방대해졌고, 나는 마법의 끝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렇게 시간이 지난 끝에 내가 얻은 게 뭔 줄 아나?
고개를 저었다.
나는 수백 년을 살지도, 그처럼 한 가지에 미쳐서 살아본 적도 없었다.
최대 수명이 100년이 다인 인간이 수백 년을 살아온 리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허함이다.
엘더 리치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내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듯이 허공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이루었을 때 나는 공허함을 느꼈다. 더 이상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이상부터는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내게는 딱 여기까지가 한계였지.
엘더 리치의 턱뼈가 달그락거렸다.
그가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는 허무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수백 년이다. 수백 년동안 세계의 도구가 되어 침입자를 상대했다. 내 의지와는 별개로 나는 싸워야 했다.
이제는 지쳤다며 그가 푸념을 늘어뜨렸다.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답이 되었는가?
“···.”
내가 만족하고 말고가 있을까.
그가 그렇다고 그런 것이다. 힘이 없는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가 마음을 바꿔 나를 공격할 수도 있는데, 차라리 지금이 나았다.
-왜, 내가 마음에 안 드는가? 마음에 안 들면 어쩔 수 없지···.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리치님이 그래주신다면 저야 영광이죠!”
-그렇지? 그럴 것 같았어.
그게 당연하다며 엘더 리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시작하지. 내가 뭘 하면 되지?
“잠시만요··· 저도 그것을 알아야 해서.”
핵을 다시 한 번 건드렸다.
[은행 건설권을 사용하여 은행을 건설하실 수 있습니다.]
[은행을 건설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어김없이 떠오르는 메시지에, ‘예’를 눌렀다.
[은행을 건설··· Error···!]
[게이트 키퍼가 존재합니다.]
[게이트 키퍼를 경비원으로 고용하실 수 있습니다.]
[고용하시겠습니까?]
처음과는 다른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게이트 키퍼를 고용하겠다는 말.
엘더 리치를 힐끔 바라보다 ‘예’를 눌렀다.
-오! 이런 식이군.
엘더 리치가 허공을 바라보더니 작게 감탄을 터뜨렸다.
새하얀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누르는 시늉을 한다.
[게이트 키퍼 ‘외톨이 리치’가 고용을 수락합니다.]
[‘외톨이 리치’의 격이 무척이나 높습니다.]
[던전의 핵의 격이 무척이나 높습니다.]
[100,000··· 코인이 필요합니다.]
무수한 ‘0’의 향연이 펼쳐졌다.
전부를 세기 힐들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그것도 잠시, 메시지 창이 떨려 오더니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은행 건설권이 존재합니다.]
[경비원 고용의 비용이 건설권에 포함됩니다.]
[작업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시스템이 지불··· 합니다.]
지불에서 말이 없었던 메시지가 힘없이 떠올랐다.
[은행 건설을 시작합니다!]
곧 경쾌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던전 전체가 환한 빛으로 휘감겼다.
[휴식의 공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곳에는 휴식의 필요한 것들이 충분히 마련되었으니, 마음껏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은행 건설이 끝나기 전까지, 휴식의 공간에서 나오실 수 없습니다.]
[은행 건설 완료까지 71:59:32 남았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선생님.
이건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