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5화 (5/113)

제5화

멍한 기분이었다.

몬스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하지?

-죽여야 하는 건가? 아니면 살려야 하나?

-저 인간도 불쌍하게 나처럼 동족에게 버려졌다.

-불쌍하다고 내게 위협이 되는 놈을 살릴 수는 없다.

엘더 리치는 말이 많았다.

내가 생각한 리치와는 달랐다. 소설 속에 리치는 무척이나 잔인한 놈이었다.

사람을 해부하기 좋아하며, 사람으로 언데드를 만드는 걸 취미로 하는 놈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말들은 도저히 뭘까.

잔인무도한 리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말들을 하고 있었다.

-죽여야 한다. 하지만··· 내 부하들을 죽이지 않았는데.

-인간이란 놈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를 공격한 괴물이다.

-나는 싸우는 게 싫어. 하지만 놈들이 먼저 공격하는 걸.

언데드를 한 마리도 공격하지 않고 보스방까지 찾아온 나를 엘더 리치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데드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몰살시킨 나이트 일행과는 다르게 나는 단 한 마리도 잡지 않았다.

그럴 힘이 없었으니까.

힘이 없는데 어찌 언데들을 잡을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몰래 숨어서 졸졸 쫓아가는 것뿐이었다.

-···인간은 나의 적. 죽인다.

엘더 리치가 결론은 냈는지 스태프를 들어 내게 겨눴다.

해골이 새하얀 턱뼈를 벌렸다.

우우우웅-

불길한 울음소리와 함께 그 입가에 자줏빛 기운이 모여들었다

“자, 잠깐!”

급히 두 손을 위로 올리며 소리쳤다.

나는 싸울 의지가 없으며 무조건 항복이라는 의지를 보였다.

-···?

금방이라도 쏘아질 것처럼 일렁이던 보랏빛 기운이, 물벼락을 맞은 모닥불마냥 픽 사라져 버렸다.

-너···.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간절하게 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이대로 죽기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너무 처량하다.

적어도 이런 개죽음이 아닌, 의미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너··· 어떻게 우리 말을 하는 거지?

스태프를 내린 엘더 리치가 허리를 숙였다.

2m가 넘는 엘더 리치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호러 그 자체였다.

평균적인 인간의 두개골보다 두 배는 큰 해골에,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초록색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엘더 리치의 몸은 일반 옷 대신 검은색의 그림자들이 감싼 채 일렁이고 있었다.

절대 사진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공포와 위압감이 엘더 리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인 엘더 리치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은 우리의 말을 할 수가 없는데··· 너는 인간이 아닌 건가?

“이, 인간입니다.”

-그래? 신기하기 짝이 없어.

엘더 리치의 불꽃 눈이 일렁이며 나를 세세하게 살폈다.

동물원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나는 원숭이었고, 언데드들은 철창이며 엘더 리치는 언제라도 나를 죽일 수 있는 사육사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우리의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마수어는 인간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근본이 다르다.

-인간이 절대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졌지. 그런데 너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 거지?

엘더 리치가 묻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전부 말할 수도 없었다.

나이트에게 들었던 걸 생각하면 직업은 중요하고, 직업이 중요한 만큼 그 능력 또한 중요할 것이 분명했다.

내 비장의 한 수가 될 수 있는 걸 이렇게 쉽게 말해도 되는 걸까.

‘말이 통한다. 그렇다는 건 잘하면 살 수 있다는 건데···.’

머리를 굴렸다.

현 상황에서 뭘 해야 가장 잘하는 건지 고민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네. 그냥 어느 순간 가능해졌습니다.”

믿을까?

믿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허무맹랑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어느순간 시스템이 엘더 리치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갑자기 생긴 거니 거질말을 하지 않았다.

-으음··· 이상한 놈이군.

엘더 리치에게서 적의가 사라졌다.

적대관계보다는 몬스터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에게 흥미가 생긴 모습이었다.

그것에 희망을 품었다.

내게 흥미를 품었다는 걸 나를 바로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아주 적은 시간이라도, 일단은 기회가 생긴 거다.

내가 살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가.

-그래서 너는 왜 이곳에 온 거지?

얼데 리치가 스태프를 휘두르며 말했다.

파스슷-

한순간에 뼛가루로 변해 사라지는 언데드들을 힐끔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모르는데 던전에 들어왔다는 건가?

엘더 리치가 나를 돌아봤다.

뼈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인상을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뼈에게서 그런 느낌이 들다니, 신기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신경 쓸 정도로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엘더 리치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거니까.

“진짜입니다! 저는 시스템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시스템이?

“네.”

-흠, 시스템이라··· 하긴 그놈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들이니까.

이해했다는 듯이 엘더 리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시스템이 던전에 들어와 뭘 하라고 한 거지?

“그게···.”

던전의 핵과 접촉하라고 했어요!라고 말한다고, 던전의 보스인 엘더 리치가 ‘그래, 얼마든지 접촉하렴!’이라고 말할 리는 없었다.

소설에서 던전의 핵은 보스를 세상에 존재하게 할 수 있는 일종의 매게체와 같다고 했다.

핵이 제거되면 던전의 붕괴와 함께 보스도 사라진다.

그런 걸 낯선 인간이 만진다고 하면 기분 좋게 수락을 할 리가 없었다.

-말을 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그리 상냥하지 않으니까.

“더, 던전의 핵을 만지라고 했습니다!”

저렇게 기세를 팍팍 풍기고 있는데, 말하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핵을 사용해 은행을 건설하지 않아도 죽고, 그렇다고 엘더 리치를 이길 자신도 없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는 건 똑같다면.

말이 통하는 엘더 리치에게 부탁을 해서 방법을 찾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핵?

“네···.”

격한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던 엘더 리치는 생각보다 잠잠했다.

내 말을 고민하는지 엘더 리치의 움직임이 멎었다.

나와 한 곳을 번갈아 돌아보더니 아래턱뼈를 움직여 딱딱, 소리를 냈다.

내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려는 듯 내 눈을 빤히 응시했다.

그 살벌한 눈빛을 도저히 마주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엘더 리치는 한동안 말이 없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핵이라···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인 줄 아나?

그의 생명과도 것을 건드린다고 하니, 그 누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엘더 리치는 다른 의미에서 놀란 것 같았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말하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던전을 잘 알지도 않은 걸 보니··· 이번에 멸망한 세계의 인간인가 보군.

-하긴 그러니 공격을 하지 않는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멍청한 얼굴을 할 리가 없어.

내 몇 안 되는 대답에 상황을 파악한 건지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불쌍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뼈밖에 없는 얼굴로 그 정도로 풍부한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멸망한 세계의 이방인이여. 네 이름은 뭐지?

“저, 저는 한정웁니다.”

-한정우? 어감이 특이하군.

엘더 리치의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공격 의사가 없는 내게 궁금한 게 많았는지 그가 여러 가지를 물었다.

내가 있는 세계는 어떤 곳인지, 무엇이 사는지 등등···.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나는 성심성의껏 정성을 다해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지속되니 대답하기 힘들어졌다.

입이 텁텁하니 말랐고, 오래 서 있던 다리는 덜덜 떨렸으며, 장시간 목소리를 낸 목이 따끔거렸다.

-왜 그러지?

불편한 내 기색을 본 건지 엘더 리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던전 내부의 공기가 워낙 좋지 않았기에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흠, 그렇군. 너는 인간이었지.

내 몸상태를 확인한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스태프를 들고 있지 않은 새하얀 손가락을 튕겼다.

까득, 까드득.

등 뒤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뼈와 뼈가 어긋나는 소리, 그 위로 살덩이가 달라붙는 듯한 질척이는 소리까지.

소리만 듣고 있으니, 끔찍한 외형이 상상되었다.

엘더 리치의 손길에 생성되었던 수십 구의 언데드들.

그것들이 내 등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확 끼쳤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설마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니면 나를 죽여서 평생 얘기만 하게 하려는 걸까.’

온갖 잡생각들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뭐라도 말을 하려던 그때.

“자, 잠···!”

드드득.

다시한 번 까딱이는 손길에 내 앞에 둥그런 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뼈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런 외형의 탁자였다.

따악.

그가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기니 무형의 힘이 나를 강제로 무릎을 굽히게 했다.

폭-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 둔부를 부드럽게 감쌌다.

-네가 인간이었다는 걸 까먹고 있었군. 미안하다.

그가 나를 배려해줬다는 것에 당황스러웠다.

그 어떤 사람이 몬스터가 인간을 배려해줄 거라고 생각했겠는가.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때, 엘더 리치가 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쪼르르륵-

향긋한 향이 던전의 쾨쾨한 냄새를 밀어냈다.

그 향에 오물의 냄새로 지끈거리던 머리의 두통을 조금 가시게 했다.

-내가 인간이었던 시절에 마시던 차다. 마나로 우려냈으니 맛이 없지는 않을 거다.

갓난아기의 것으로 보이는 해골잔에 차가 따라져 있었다.

엘더 리치는 그 차를 내게 마시라며 손짓했다.

그러면서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리치가 되면 미각을 잃어 맛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내게 그 차의 맛을 설명해주면 좋겠어.

그의 앞에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호의를 보이고 있는데 그 호의를 거절했다가, 그가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자신의 호위를 거절했다고 나를 죽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냄새가 좋아.’

해골의 잔이건, 리치가 준 수상한 물이건 다 떠나서.

그 차의 향이 무척이나 좋았다.

당장이라도 자기를 마셔달라고 유혹했다.

타는 듯한 갈증과 그 냄새가 나도 모르게 그 차를 마시게 했다.

꿀꺽-

목 넘김이 무척이나 부드럽고 상쾌했다.

시원한 얼음물을 마시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얼음물과는 달리 그 차는 머리를 띵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하향이 은은하게 돌면서 딱 필요한 만큼의 상쾌함을 안겨줬다.

“맛··· 있네요.”

-그렇지?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던 차야. 하루에 한 잔씩 마시지 않으면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갔지.

그는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내가 마신 차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서인지 그는 무척이나 신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지.

한참을 웃고 떠들던 그가 돌연 슬픈 얼굴을 했다.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적대감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엘더 리치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핵이 필요하다고 했지? 핵을 네게 주지.

예?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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