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11화
“하아, 하아.”
섬의 중심, 수풀이 우거진 작은 숲으로 들어온 오스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삐죽삐죽한 잎이 늘어진 커다란 야자나무와 이국적인 수풀이 우거진,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열대 무인도와 같은 광경이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뜨겁고 축축한 공기가 폐로 흘러들었다. 어느새 해적도, 기사들도 사라지고 혼자였다.
오스칼이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분명 나침반의 바늘은 이 열대우림 속을 가리키고 있었다.
찌르르-찌르르- 풀벌레가 우는 소리와,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만 났다. 기이한 적막감에 오스칼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주변을 경계했다.
뚜둑-
제 것이 아닌 인기척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검을 겨누었다. 오스칼의 미간이 긴장감으로 잔뜩 좁아졌다.
탕!
위협적인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오스칼 바로 옆에 우뚝 선 야자수의 몸통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총탄에 움푹 패였다.
젠장, 또 총이야?
속으로 욕을 내뱉은 오스칼이 덩굴 가지가 잔뜩 얽혀있는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철컥거리며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친 앵무새는 이번에도 총을 쓸 모양이었다.
‘총알을 장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그사이를 노리는 거야.’
오스칼이 검을 움켜쥐었다. 장전이 다 끝났는지,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오스칼이 발밑의 야자 열매를 슬쩍 발로 던졌다.
탕!
미친 앵무새가 야자 열매가 굴러간 방향으로 총을 발사했다. 애꿎은 작은 동물들이 놀라 푸드덕 달아났다.
‘지금이다!’
오스칼이 잽싸게 내달렸다. 그리고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달려오는 인기척에 미친 앵무새가 역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밀림 숲을 휘적거려 달리며 양손으로는 분주하게 장전 중이었다.
우지끈-
빽빽하게 자라난 덤불을 뛰어넘으며 달리던 오스칼의 걸음이 휘청거렸다. 괴상한 모양으로 자라난 나무줄기가 발을 옭아매었다. 순식간에 오스칼의 몸이 땅으로 처박혔다.
바닥을 구른 오스칼의 눈에 낭패감이 서리고, 미친 앵무새의 입이 승리감으로 벌어졌다.
철컥!
불길한 쇳소리와 함께 오스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달아나던 미친 앵무새는 어느새 몸을 돌려 오스칼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누나!”
잔뜩 흐트러진 얼굴의 진이 오스칼의 눈앞에 뛰어들었다.
타앙-
날카로운 총성이 숲속을 또 한 번 울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스칼을 감싸 안은 커다란 어깨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의 붉은 머리칼이 핏빛으로 보였다. 더는 싫었다. 오스칼의 품에 안겨있는 진에게서 그녀를 지키려고 칼날 앞에 뛰어든 제라드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진…. 안돼…. 제발….”
오스칼은 울먹이다시피 중얼거렸다. 오스칼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진의 얼굴을 감싸 들어 올렸다.
질끈 감은 눈이 살며시 열리고, 황금색 눈이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진! 괘, 괜찮아?”
오스칼의 손이 제 뺨에 닿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살포시 눈을 감은 진이 오스칼의 보드라운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누나아.”
고통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기분 좋은 애교스러운 목소리. 뭔가 수상쩍음을 눈치챈 오스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말 못 봐주겠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파닥거리며 양피지 조각이 날아들었다. 양피지가 진의 등을 찰싹찰싹 때리며 그를 오스칼의 몸에서 떼어내려 했다. 두 사람 주위로 낯익은 은빛 보호막이 보였다.
“클로드?!”
오스칼이 고개를 홱 들자, 은발의 남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의 발아래, 나무 덩굴에 칭칭 감겨 묶여있는 미친 앵무새가 있었다.
“꼬맹이는 저리 가 있어.”
못마땅하다는 목소리를 낸 클로드가 손을 튕기자 오스칼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진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제야 사뿐히 오스칼의 곁에 내려앉은 클로드가 오스칼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다친 덴 없어?”
오스칼이 크게 뜬 눈으로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저 녀석들이 알려줬지.”
클로드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서 양피지와 깃펜이 자랑스럽게 몸을 흔들어댔다.
“이 섬은 해적선이 없으면 찾을 수가 없다던데….”
“물론, 해적선 하나를 잡아 왔지. 예전 내 고객 중엔 위험한 자들이 꽤 많았거든.”
클로드가 선선하게 웃었다. 문득 그가 세계관에서 이름난 정보상이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떠오른 오스칼이 어쩐지 서먹한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그 잠깐 사이에 해적선을…. 대체 어떻게 잡았다는 걸까.
“또 당신 신세를 졌네. 두 사람은 잘 데려다준 거야?”
“물론이지.”
그때 투덜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늙은이, 성깔 한번 끝내주네.”
클로드의 마력에 의해 저 멀리 나무 그루터기로 처박혔던 진이 혹이 난 머리를 문지르며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클로드가 불쾌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건방진 애송이 같으니.”
“꼬장꼬장한 노인네 같으니.”
사나운 금안이 클로드를 노려보며 빈정거렸다. 그러자 클로드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요즘 어린애들은 다 이런 건가?”
“500년 전 어린애들보단 버릇이 없나 보지?”
오스칼이 언짢은 기색의 클로드를 향해 푸스스 웃었다.
“누나. 방금, 이 아저씨가 마법으로 날 던져버리는 거 봤죠?”
“너 진짜….”
저를 향해 순한 눈을 해 보이는 진을 향해 오스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걸 귀엽다고 해야 할지 되바라졌다고 해야 할지. 그리고는 한쪽에서 온몸이 덩굴풀에 칭칭 감겨 누에고치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미친 앵무새를 쳐다보았다.
“비전하!”
멀리서부터 소란이 일었다. 오스칼을 찾아 섬을 뒤지던 기사들이 달려오는 소리였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드미트리와 서던이 재빠르게 달려와 오스칼을 붙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섬 바깥쪽은 거의 정리가 됐습니다.”
“다들 무사해?”
“네, 형님. 다들 자잘한 부상 말고는 없습니다. 제라드 녀석이 아주 펄펄 날던데요? 작가는 부업으로 두고 다시 기사 노릇을 하라고 해야겠어요.”
드미트리가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그나저나…. 저기 꿈틀거리는 잡초가 설마 미친 앵무새입니까?”
앵무새의 몸을 감은 덩굴은 끝도 없이 자라기 시작해 곧 꽃망울까지 틔울 기세였다.
“응. 맞아. 이 사람 솜씨야.”
오스칼이 클로드 방향으로 손짓을 했다.
“그럼…. 이 섬의 해적들은 모두 소탕한 셈입니다…. 한 사람만…. 빼고요.”
시몬이 진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오스칼이 진을 바라보았다.
“넌 이번 토벌에 공도 세웠고, 지금껏 민간인을 공격한 적도 없잖아. 그러니 너에 대한 처분은 잘 말씀드려 볼게. 그러니 이제 해적 말고, 다른 걸 해보는 게 어때?”
“역시! 누나의 두 번째 남편을 말하는 거죠?”
철푸덕!
또다시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진의 입술 위로 성난 양피지가 달려들었다.
***
전설로 내려오는 해적섬 하나를 통째로 소탕한 공을 인정받아, 작전에 참여한 기사들에게 모두 국왕의 훈장이 내려졌다.
“왕국 역사상 무공훈장을 받은 여인은 너뿐일걸.”
칼릭스 공작가의 아늑한 침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묻은 오스칼을 향해 레오가 웃음기 어린 칭찬을 건넸다. 꽤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오스칼과 오랜만에 한 침대에 누운 것이 기분 좋은지 연신 오스칼의 말랑한 볼을 주물러댔다.
“진이 없었다면 해적섬을 찾을 수 없었을 거야.”
레오의 품에 안긴 오스칼이 눈을 깜박였다. 붉은 수염을 다정하게 진이라고 부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레오가 눈을 세모꼴로 떴다.
“그 건방진 시칠리아 꼬맹이에게 카디브해의 무역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겼다지?”
“맞아. 거기다 시칠리아가 라인하트와 사르데나 간 무역 중개업을 할 수 있도록 폐하께서 연결해 주셨어.”
오스칼이 뿌듯한 목소리를 냈다.
에렌은 라인하트의 국민이 아닌 진에게는 훈장 대신 다른 것을 보상으로 내렸다. 작은 섬나라인 시칠리아는 마땅한 수입원이 없어 먹고살기 위해 해적이 된 주민이 많았던 터였다. 이 사실을 알린 오스칼의 부탁으로, 에렌은 그의 상단을 통해 진과 시칠리아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 자식이 공작 부인의 개인 호위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며?”
“응, 하지만 거절했어. 기사가 기사를 호위로 두는 경우가 어딨어? 하여간 진도 못 말려.”
오스칼이 꺄르르 웃었다. 핀잔하면서도, 막냇동생을 키우는 기분으로 진의 편지에는 꼬박꼬박 답장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중개무역 말고도 시칠리아에 관심이 많으시더군.”
“그게 무슨 말이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레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국무회의에서 시칠리아의 일처다부제 얘기를 꺼내시는 통에 회의장이 발칵 뒤집혔었지.”
“으하하하, 역시 폐하는 엉뚱한 구석이 있어.”
오스칼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레오는 언짢은 표정으로 오스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너야말로, 그 제도에 관심 있는 건 아닌가?”
“뭐어?”
“그 꼬맹이도 그렇고. 다들 제발 내 아내에게 관심을 좀 거두어 줬으면 좋겠군.”
레오가 제라드가 떠들어댄 내용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오스칼 누님에겐 뭔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 누님을 만났다 하면 다들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요! 물론 누님의 매력이 보통은 아니긴 하죠.”
그렇게 말하는 제라드 녀석조차도 벌써 ‘공작 부인’이란 높임말 사용을 잊고 다정하게 ‘누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게다가 오스칼에겐 보통 이상의 매력이 있다고 순순히 자백까지 하지 않았던가.
‘젠장, 이제 제라드 녀석을 연무장에서 굴릴 수도 없으니.’
레오가 원통하다는 듯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 모습에 오스칼이 사르르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관심 있는 건 너뿐이야.”
“그렇다고 하기엔, 네가 그 빨간 머리 놈을 넋 놓고 바라봤다던데.”
젠장, 기욤 녀석 그새 쪼르르 가서 일러바친 거야? 허를 찔린 오스칼이 눈알을 굴렸다.
“그, 그건 그냥 진의 검술이 아름다워서….”
“다른 남자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고 자백하는군?”
레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오스칼을 향해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니, 남자가 아니라…. 검술이….”
“그게 그거 아닌가? 너란 녀석은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흡!”
잔소리를 시작하는 레오의 입을 오스칼이 입술로 막아버렸다. 이대로 그의 불평 섞인 투정을 들어주다간 꼼짝없이 밤을 새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레오는 갑작스럽게 제 입술을 덮친 오스칼의 입술에 당황했으나, 그의 품을 파고드는 보드라운 감각을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코끝으로 풍겨오는 달콤한 바닐라 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양팔로 오스칼을 꽉 끌어안았다.
“너한텐 정말 못 당하겠군.”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낸 레오의 목소리가 농밀하게 울렸다.
“네가 내게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어?”
오스칼이 레오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배시시 웃었다. 그 말에 레오가 짙은 눈으로 오스칼을 응시했다.
“지금부턴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
의미심장한 목소리와 함께 오스칼의 등이 침대로 밀어 붙여졌다.
“으앗.”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오스칼이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오늘 밤도 잠들긴 틀린 모양이었다. 칼릭스 공작저는 오늘도 공작 부부의 뜨거운 사랑으로 활활 불타오를 예정이었다.
[외전 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