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10화
진과 함께 붉은 수염의 해적선을 타고 뭍으로 나온 오스칼은 그녀를 향해 울부짖으며 달려오는 기사단 청년들을 간신히 떼어낸 참이었다.
“그…러니까, 그 붉은 수염이…. 린 양의 오빠, 진이었다고요?”
역시 반쯤 울상을 짓고 있던 서던은, 오스칼이 동행한 남자의 정체에 입을 딱 벌렸다. 오스칼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평정심을 되찾은 청년들 역시 그들 눈앞에 나타난 붉은 수염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자가… 그 유명한 붉은 수염이라고요? 애버트보다 어려 보이는 꼬맹인데요?”
드미트리가 혀를 내둘렀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유명한 해적왕이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진이 고까운 듯 눈매를 길게 늘였다.
“꼬맹이에게 뼛속까지 털리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아. 저. 씨.”
“아, 아저씨?”
드미트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빈정거렸다. 오스칼이 그런 진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내 기사들과 날 세우지 말고, 얼른 앵무새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기나 해.”
“네, 누나.”
순식간에 고분고분하게 태도를 바꾼 진이 순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오스칼을 향해 눈을 사르르 휘어 웃었다.
“앵무새를 찾으면 내게도 ‘내 기사’라고 해줘요.”
“자꾸 까불래?”
오스칼이 진의 등을 찰싹 후려쳤다. 진은 뭐가 좋은지 생글거리더니, 품에서 낡은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해적선의 선실에 놓여있던 것이었다.
“이 나침반에는 추적 마법이 걸려있어요. 그래서 원하는 걸 찾을 수 있게 해주죠.”
“추적 마법?”
오스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럼 저게 마도구란 말이야?
“이게 바로 내 비밀이에요. 이 나침반의 바늘은 북쪽을 가리키는 게 아녜요. 그저 주인이 원하는 곳을 가리키거든요.”
진의 설명을 들은 청년들이 웅성거렸다. 전설 속에서나 전해지는 마도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탄하는 눈치였다. 깃펜과 양피지도 흥미로운 듯 몸을 기울여 진의 말을 경청하더니, 재빠르게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네 비밀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밝혀도 되는 거야?”
오스칼이 조심스럽게 진의 눈치를 살폈다. 저거 영업비밀 아닌가….
그러자 진이 고개를 숙여 오스칼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금안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누나에게,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라드가 입을 떡 벌렸다. ‘#연하남 #역키잡’을 키워드로 한 소설 한 편이 그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갈겨졌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누님에겐 역하렘의 정령이라도 씐 게 분명해….”
그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국왕, 공작, 마법사도 모자라, 급기야는 해적왕까지 사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제라드의 불손한 생각을 꿈에도 모른 채, 신비한 나침반을 요리조리 뜯어보던 오스칼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하지만, 좀 이상한데? 이 나침반의 바늘은 자꾸 내 쪽만 가리키고 있잖아.”
행여 나침반이 고장 났나 이리저리 흔들어보아도, 바늘은 오스칼과 마주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이 뭘 모른다는 듯 다정한 눈으로 오스칼을 내려다보았다.
“그야, 그 나침반의 주인은 나니까요. 지금 바로 내가 원하는 걸 향해있죠.”
진이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뭐, 뭐라고?”
숨 쉬듯 걸어대는 연하남의 플러팅에 오스칼이 펄쩍 뛰었다. 깃펜이 불쾌하다는 듯 날아들어 오스칼을 향한 진의 손가락을 거세게 쪼아댔다.
“저 녀석, 어린 주제에 입을 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제라드가 나지막하게 감탄하며 몰래 메모장을 꺼내 진이 말한 문장을 휘갈겨 기록했다.
“이 자식아! 이래선 아무 소용이 없잖아? 빨리 앵무새를 원해보라고!”
오스칼이 나침반을 거칠게 흔들어대며 진을 향해 부아를 냈다. 그는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눈매를 늘어뜨렸다.
“누나가 내 눈앞에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그럼 이 나침반도 아무 소용이 없잖아?”
오스칼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진이 나침반을 쥔 오스칼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나침반, 가져요. 누나가.”
“뭐?”
오스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나침반은 주인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을 가리키니까, 누나가 주인이 되면 그만이에요. 그러니 누나에게 줄게요.”
“그, 그래도 돼?”
“나도 함께 가져주면 더 좋고.”
휘어진 눈 안에서 금안이 반짝거렸다. 드미트리와 서던은 토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저 자식, 정상 아닌 거지?”
“미친놈입니다.”
만난 이후 줄곧 기 싸움을 하던 두 사람은 모처럼 한마음 한뜻으로 붉은 수염의 험담을 해댔다.
“일단… 나침반은 고맙게 받을게.”
오스칼이 쭈뼛거리며 진의 제안을 수락하기가 무섭게 나침반의 바늘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핑-
마침내 나침반이 수평선 너머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방향을 넘겨다 보던 진이 빙긋 웃었다.
“역시, 미친 앵무새는 둥지에 숨어들었군요.”
“둥지라니?”
“해적들의 섬, 베네키아요.”
어리둥절한 얼굴의 오스칼을 향해 진이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
“우웨에에엑.”
“쿨럭쿨럭.”
배 여기저기에서 토악질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네키아 섬은 당신들 배로는 못가. 해적선만 접근할 수 있도록 섬 전체에 마법이 걸려있거든.”
설마 하는 표정의 기사들을 향해 진은 도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베네키아 섬이 전설의 섬으로 불리는 까닭 역시, 해적선이 아닌 일반 선박으로는 찾을 수 없는 섬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베네키아 섬은 해적선으로 인식하면 그 배에 탄 선원들까지 해적인지 아닌지 가리지 않았다.
덕분에 붉은 수염의 해적선을 타고 베네키아 섬까지 이동하게 된 기사들은 지독한 뱃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해적선은 다 이렇게 움직이는 거야?”
갑판을 붙들고 토사물을 쏟아내는 서던 경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오스칼이 진을 향해 물었다. 거친 파도를 쏜살같이 헤치며 달리는 ‘붉은 수염’의 해적선은 계속해서 아래위로 요동쳤다. 다행히 균형감각이 뛰어난 오스칼은 뱃멀미 없이 멀쩡한 축이었다.
진이 방긋 웃었다.
“모든 해적선이 그렇진 않죠. 이 배가 특별한 거예요. 마치 누나처럼.”
“웩.”
뱃멀미에도 멀쩡하던 오스칼이 결국 진의 플러팅에 멀미를 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오스칼의 등을 토닥여주던 진이 오스칼을 향해 속삭였다.
“누나, 드디어 도착했어요. 해적들의 섬.”
진이 기다란 망원경을 한쪽 눈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입술을 위로 말아 올렸다.
뿌연 바다 안개 사이로 기묘한 분위기의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리고 입을 닦은 오스칼이 밀려드는 긴장감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저 섬의 해적들은 우릴 모두 적으로 간주할 거예요.”
진이 오스칼의 긴장한 눈매를 응시하며 당부했다.
“해적이 몇이나 되지?”
뱃멀미로 얼굴이 해쓱해진 드미트리가 물었다. 그 물음에 진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글쎄, 당신들 숫자보단 많겠지. 험악한 놈들이니 알아서들 살아남으라고.”
그리고는 오스칼을 향해 해사하게 웃었다.
“누난 내가 지킬게요.”
“난 혼자서도 충분하거든?”
검을 단단히 움켜쥔 오스칼이 톡 쏘아붙였다. 작은 섬 해안가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술판을 벌이고 있던 해적들이 서서히 다가오는 붉은 배를 향해 눈을 찌푸렸다.
“젠장, 저거 붉은 수염의 배야?”
“저 자식이 이 섬에 정박한 적은 없는데….”
해적들 사이에서 일대 소란이 일었다. 베네키아 섬에 머무는 해적들은 모두 붉은 수염과 대척점에 선 자들이었다.
스르륵-
미끄러지듯 해안에 정박한 배를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이 우렁찬 함성과 함께, 배 위에서 기사들이 뛰어내렸다.
“이 섬의 해적을 모두 잡아들인다!”
잡담을 나누거나 늘어져 낮잠을 자던 해적들이 놀라 우왕좌왕 무기를 집어 들었다.
사악!
해변의 해적들이 단숨에 쓰러졌다. 누구보다도 빨리 해안에 도착한 진이 검에 묻은 피를 모래 위로 털었다. 붉은 고수머리가 내리쬐는 태양을 받아 황금처럼 빛났다.
진의 길쭉한 팔이 유려한 동작으로 허공을 갈랐다. 가벼운 몸동작은 마치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산뜻한 동작에 비해, 그의 검날은 잔인했다. 왜 그의 별명이 ‘카디브해의 귀신’인지 알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보는 검술에 오스칼이 검을 휘두르는 것도 잊고 진을 바라보았다.
“우와.”
기사의 검술이 아닌, 자유로운 검술. 바람에 흩날리는 진의 하늘하늘한 옷자락마저 그의 아름다운 검격 아래에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오스칼 형님! 정신 차리세요. 공작님께 일러바칠 겁니다.”
기욤이 진의 검술을 넋 놓고 감상하고 있는 오스칼을 향해 타박했다. 번뜩 정신을 차린 오스칼이 도망치는 해적 하나를 베었다.
“내, 내가 뭘 했다고 일러바쳐?”
어버버 대꾸하고 고개를 홱 돌린 오스칼이 황급히 해적들의 뒤를 쫓았다. 섬 이곳저곳에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괴성이 이어졌다. 뭍으로 내려온 기사단은 맹렬한 기세로 해적들을 처치해 나갔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표적이 보이지 않았다. 미친 앵무새의 흔적을 찾던 오스칼이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끄집어냈다.
“앵무새야, 어딨니.”
오스칼이 낮게 중얼거리자, 나침반의 바늘이 핑글핑글 돌았다. 마침내 바늘이 멈춰 서자, 오스칼은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