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8화
오스칼이 이스키아 영지로 떠난 이후, 레오는 연신 불안한 듯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칼릭스 공작, 정신 사나우니 하나만 하지?”
에렌이 입술을 물어뜯다 못해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잘게 두드리고 있는 레오를 향해 핀잔을 주었다. 두 사람은 국왕의 집무실에서 아스가드 제국과 외교회의 준비에 몰두하던 차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정중한 사과와 함께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레오가 다시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에렌이 번쩍거리는 만년필을 마호가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공작은 오스…아니 공작 부인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아닌가?”
잠시 쉬자는 듯 에렌이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를 향해 길게 몸을 기댔다. 레오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에렌을 바라보았다.
“물론…그런 건 아닙니다만, 걱정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폐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셨는데… 업무에 집중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해낼 사람이잖아. 오히려 우리 쪽 일이 더 걱정이지. 아스가드 제국은 만만치 않은 상대야.”
에렌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제국에서 요청한 교역 문서를 들여다보았다. 레오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네. 이번에 제국에서 요청한 수입품 관세는 14년 전 라인하트와 맺은 무역 협정과 다소 차이가….”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단테였다. 정도를 벗어난 무례에 에렌이 눈을 치켜떴다. 단테의 뒤로 알랭이 곤란한 듯 손을 휘저으며 달려왔다.
“단테, 자네가 아무리 내 측근이라고는 하나, 이곳은 국왕의 집무실이야. 지금 왕국 최고 대신과 업무 중이라고.”
불쾌감이 서린 목소리였다. 중요한 업무를 방해받은 레오의 미간에도 주름이 하나 잡혔다.
“이, 이보게! 이게 무슨 짓인가!”
알랭이 다급하게 단테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단테는 아랑곳없이 입을 열었다.
“폐, 폐하. 법도에 어긋나는 건 알지만… 당장 아셔야 할 일이라!”
“그렇게까지 급한 일이 있나?”
단테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곳까지 급히 뛰어온 기색이 역력했다. 에렌이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오, 오스칼 님이 해적, ‘붉은 수염’에게 납치되었다고 합니다!”
“뭐?!”
레오와 에렌이 동시에 벌떡 일어나는 통에, 의자 두 개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레오가 진정이 되지 않는 듯 떨리는 목소리를 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스키아 해역에서 해적단을 토벌하던 중에 오스칼 님이 바다로 추락하셨는데, ‘붉은 수염’이 나타나 오스칼 님을 데려갔다고 합니다.”
단테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레오가 사색이 된 얼굴로 멍하게 단테를 바라보았다.
“젠장! 근위대와 기사단은 오스칼이 그렇게 될 때까지 뭘 한 거야?”
에렌이 거칠게 말을 뱉으며 쾅- 책상을 내리쳤다. 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여기까지 소식이 전달되었다는 건… 대체 얼마나 된 겁니까?”
“이스키아에서 가장 빠른 전서구를 통해 전달된 소식이니, 반나절 정도입니다.”
“제길. 지금 당장 구조대를 꾸려서 출발하면 이스키아까지 얼마나 걸리지?”
에렌이 머리를 헤집으며 단테를 향해 물었다. 그 말에 알랭이 눈을 크게 뜨며 펄쩍 뛰었다.
“폐하! 설마 폐하가 직접 가시려는 건 아니시지요? 아스가드와의 외교회담이 코앞입니다만!”
“지금 외교회담이 문제인가?”
“당연히 문제입니다! 칼릭스 공작 대신 공작 부인께서 출정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인데요!”
알랭이 답답하다는 듯 집무실 안의 남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집무실 안에 제정신인 사람은 자신뿐인 듯싶었다.
레오야말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그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주 방법이… 없진 않지요.”
단테의 잿빛 눈이 의미심장하게 두 남자를 향했다. 에렌이 돌려 말하지 말고 빨리 정답을 내어놓으라는 듯 단테를 향해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단숨에 구조대를 이스키아로 데려다줄 사람 말입니다.”
단테의 말뜻을 알아챈 레오와 에렌이 갈등하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단테의 말이 백번 옳았다. 두 사람이 마침내 결심한 듯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
단정하게 묶은 반짝거리는 은빛 머리칼이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거렸다. 차가운 인상의 남자가 토끼 모양의 컵에 따뜻한 홍차를 따르며 나직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황금빛 햇볕이 따스하게 들이치는 오후 시간에 오스칼이 선물로 준 컵으로 차를 마시는 시간은 클로드의 행복한 일상 중 하나였다. 어두침침하던 샤무아는 밝은 분위기의 저택으로 탈바꿈한 지 오래였다.
그가 토끼의 머리를 입술로 가져가려는 찰나,
쿠콰앙!
부서질 듯한 소리와 함께 저택의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클로드가 깜짝 놀라 컵을 놓치자, 바닥으로 찻물이 우수수 쏟아졌다. 다행히 허둥지둥 흘려보낸 마력으로 간신히 오스칼의 컵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불상사는 면했다.
클로드가 잔뜩 신경질 난 얼굴로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국왕 폐하와 공작 전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진 어쩐 일이신지.”
클로드가 불쾌하다는 듯 차갑게 일갈했다. 그리고는 저택의 관리인을 째려보았다. 기묘한 분위기의 자그마한 남자는 클로드의 시선에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제가 막을 새도 없이 들이 닥치셨….”
“이봐, 변태 양반. 우리와 함께 가줄 곳이 있어.”
남자의 웅얼거리는 변명은 에렌의 말에 묻혀버렸다. 에렌은 클로드의 곁에 둥둥 떠 있는 토끼 모양 컵을 흘긋 바라보았다.
“고귀하신 두 분께서 미천한 제게 무슨 부탁을 하시려는 건지. 제가 감히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클로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콧방귀를 뀌었다. 명백히 빈정거리는 태도였다. 그 모습에 에렌의 눈썹이 잠시 움찔거렸다. 그러자 잔뜩 굳은 얼굴의 레오가 클로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스칼이 몇 시간 전에 이스키아의 해적에게 납치되었다. 그곳까지 빠르게 가려면 당신의 마법이 필요해.”
레오의 말에 클로드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순간 흐트러진 마력으로 허공에서 컵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컵이 바닥에 닿기 직전, 잽싸게 날아온 양피지가 아슬아슬하게 컵을 받아냈다.
“오스칼을 납치했다는 자가 누구지?”
보랏빛 눈이 대번에 분위기를 바꾸었다. 분노한 클로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 파장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카디브해의 붉은 수염.”
레오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매섭게 불어닥친 은빛 바람이 세 남자의 몸을 휘감았다.
***
선실 안으로 들이닥친 세 남자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붉은 수염을 향해 공격태세를 취했다.
“감히 오스칼을 납치하다니, 널 가루로 만들어주지.”
“지금 당장이라도 시칠리아에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어.”
클로드의 손바닥 위에서 타닥타닥 은빛 스파크가 튀고, 에렌의 손에서 사나운 검이 번쩍였다.
깡!
레오의 묵직한 검에 선실 안의 장식품이 반으로 쪼개져 바닥을 굴렀다. 진의 손에 붙들려 있는 오스칼의 인영을 확인한 그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당장 오스칼을 안전하게 돌려보내지 않으면, 다음에 떨어질 건 네 목일 거다.”
레오의 검은 눈이 무섭게 타올랐다. 그러나 진은 여전히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진은 넓은 어깨로 등 뒤의 오스칼을 슬쩍 가렸다. 그리고 자신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었다.
“무서워라.”
무서운 기색이라고는 없는 진이 놀리듯 선선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오스칼이 진의 등 뒤에서 세 남자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요리조리 몸을 움직여 빠져나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진의 두툼한 등 근육이 교묘하게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 빨리 비켜!”
오스칼이 진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그러나 돌덩이 같은 진의 어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스칼의 목소리가 들리자 세 남자의 얼굴이 분노로 구겨졌다. 굳은 얼굴의 에렌이 엄중한 목소리를 냈다.
“감히 라인하트의 귀족을 일개 해적 따위가 납치하다니.”
“납치라고 하면 서운하지. 난 그저…. 여러 가지 제안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진이 웃으며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그의 어깨 뒤로 당황한 표정의 오스칼이 보였다.
“오스칼!”
비로소 오스칼의 얼굴을 확인한 레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친 곳 없이 멀쩡한 모습에 안도감이 피어오른 것도 잠시, 곧 레오가 검을 고쳐 쥐었다.
“허튼소리는 집어치워. 내 아내를 해적선으로 끌고 온 대가는 치를 각오가 되어 있겠지.”
아내라는 말에 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에렌 역시 칼날을 겨누었다. 그러나 그들은 경고의 말과는 달리,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오스칼이 진의 칼날에 너무도 가깝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휘이잉-
클로드를 둘러싼 공기에서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무시무시했다. 오스칼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여기서 클로드가 전력으로 마법을 썼다간, 진이 잿가루가 되는 것은 물론이요, 해적선이 침몰하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은빛 연기가 피어오르려는 찰나, 오스칼이 있는 힘을 다해 진의 등을 밀어냈다.
“클로드! 머, 멈춰!”
그의 이름을 부르는 오스칼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은빛이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오스칼이 세 남자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진의 단단한 팔뚝이 오스칼의 팔을 다시 낚아챘다.
챙!
순식간에 레오의 검이 날아들고, 진이 그 검을 받아냈다. 레오의 눈에 설핏 당황한 기색이 서렸다. 진이 오스칼의 팔을 붙든 채, 한 손만으로 자신의 검을 받아 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칼릭스 공작이 라인하트 왕국의 제일가는 기사라더니, 별 것 아니잖아?”
진이 유려하게 레오의 검을 흘려보내며 뒤로 물러났다. 그를 향해 다시 한번 검을 내려치는 레오의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혔다.
카강!
다시 한번 두 사람의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오스칼이 재빨리 외쳤다.
“자, 잠깐! 다들 진정해. 진의 말이 맞아! 납치한 게 아니라 바다에서 날 구해준 거야. 그러니까 우리 대화로 해결하는 게 어때?”
“들었지? 우린 정말 대화 중이었다니까.”
진이 매력적인 눈웃음을 흘리며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오스칼, 정말 저 자식 말이 맞아? 대체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했다는 거야?”
어쩐지 건방진 진의 태도에 에렌이 눈을 치켜떴다. 여전히 그는 진을 향해 겨눈 검을 내리지 않았다. 클로드 역시 창백한 손가락 위로 은빛 스파크를 타닥타닥 일으켰다.
오스칼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마, 맞아요. 그러니까…. 어, 미친 앵무새를 토벌하는….”
“두 번째 남편에 대한 제안.”
진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오스칼의 말을 가로챘다. 오스칼이 고개를 홱 돌려 경악한 얼굴로 진을 바라보았다.
순간 공격태세를 갖추던 에렌과 클로드의 손이 멈칫, 허공에서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