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133)화 (133/138)

외전 2, 6화



 

타앙!

미친 앵무새의 총알은 엉뚱한 방향을 향해 쏘아져 그대로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는 사격에는 지독히도 재능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요란한 방아쇠 소리에 놀란 오스칼은 그만 중심을 잃고 말았다.

‘젠장, 물에 빠지는 건 외전에서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오스칼이 마음속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추락의 공포에 얼어붙은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음의 소리는 목구멍 안에서 딱 달라붙어 새어 나오지 못했다.

첨벙!

요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짙푸른 코발트색 바다가 갈라졌다. 따뜻한 남쪽 바다의 온도는 한겨울의 호숫물보다는 견딜 만했지만, 차가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소금물이 코와 입안을 침범하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이 그대로 파도에 휩쓸렸다. 가까스로 팔과 다리를 허우적대보았지만, 오스칼의 몸은 도리어 배와 더 멀어질 뿐이었다.

‘이대로 특별 외전에서 바닷물에 빠져 죽는다고?!’

숨이 막혀 현기증이 돌았다. 아스라이 흩어지는 의식과 함께, 오스칼의 몸이 바닷물 속으로 꼬르륵 잠기려던 그때.

철벅-

오스칼의 몸이 불쑥 물 위로 솟아올랐다. 커다란 손이 오스칼의 몸을 붙잡았다. 오스칼을 단단히 끌어안은 인영이 물살을 헤치고 빠르게 사라졌다.

***

바다에 추락한 오스칼을 본 청년들이 갑판을 향해 내달렸다. 수영을 못하는 오스칼이 바다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제라드가 겅중겅중 뛰어 갑판 밖으로 몸을 날렸다.

쏴아아-

그때 음울한 뱃소리가 들려왔다.

“제, 젠장! 붉은 수염이다!”

해적 중 누군가가 공포 어린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 외침을 들은 해적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붉은 배가 거친 물보라를 일으키며 해적선을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과연 ‘바다의 귀신’이라는 별명답게, 기척도 없이 지척까지 접근한 터였다.

활대 위에 서 있던 미친 앵무새 역시 일그러진 얼굴로 펄럭이는 붉은 깃발을 노려보았다.

“저 빌어먹을 기사 놈들 때문에!”

붉은 수염은 그를 배신한 자신의 해적단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 당장 뱃머리를 돌려야 하는데, 기사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살고 싶은 놈들은 배를 버리고 도망쳐라!”

미친 앵무새가 고함을 지르고는 바다를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기사들이 들이닥쳤을 때도 배를 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건만, 붉은 수염이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배 안은 기사들과의 전투를 포기하고 해적선을 탈출하려는 해적들로 인해 엉망이었다.

“드미트리 경, 시몬 경. 우리도 얼른 빠져나가야 합니다. 붉은 수염을 상대하기엔 전력이 부족합니다.”

서던이 가쁜 숨을 헐떡이며 소리를 질렀다.

“붉은 수염이 우리도 적으로 간주한다는 건가?”

서던의 말에 시몬이 눈을 찡그렸다. 분명 붉은 수염은 해적을 상대로 노략질을 한다고 했는데.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미친 앵무새 쪽은 정리가 된 것 같으니 일단 후퇴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젠장!”

이스키아 기사단의 설득에 드미트리가 욕을 내뱉었다. 그가 정신없이 갑판으로 달려가 난간을 잡고서 간절한 눈으로 제라드를 찾았다.

“제라드! 형님은?”

“혀, 형님이 안 보여요!”

제라드가 붉어진 눈두덩이를 한 채 울먹였다. 드미트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첨벙,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오스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부우우-

붉은 수염의 해적선이 위협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서던이 시몬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기사단 전원, 후퇴한다!”

시몬이 퇴각 명령을 내리자, 청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바닷속을 찾아 헤매는 드미트리와 시몬의 곁으로 기사단의 보트가 다가왔다.

“드미트리, 제라드!”

두 사람을 부르는 시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러나 두 청년은 오스칼을 찾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듯 입술만 짓씹었다.

“혀, 형님들! 저기!”

그때 보트를 젓던 애버트가 푸른 물 위를 가르는 붉은 인영을 향해 팔을 뻗었다. 기사들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이는 작은 인영에 집중되었다. 붉은 수염의 배로 향하는 흐릿한 사람의 그림자는 분명 두 사람의 것이었다.

“서, 설마…. 붉은 수염이 오스칼 형님을 데려간 거야?”

청년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으…. 추워…. 그런데 따뜻해….’

터무니없는 기분을 느끼며, 오스칼의 의식이 깜빡거렸다. 아무래도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콜록, 콜록.”

흐리멍덩한 의식 속에서, 오스칼은 요란하게 기침을 해댔다. 바닷물의 소금기로 코와 입에서 찝찌름한 맛이 났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나 바다에 빠진 거 아니었나?’

혀끝에서 느껴지는 현실에 오스칼이 눈을 번쩍 떴다.

끔뻑, 끔뻑

오스칼은 잠깐 넋을 잃고 눈앞에 보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만 크게 깜빡였다.

‘구릿빛의 반들반들하고, 두툼하면서도, 보드랍고, 탄탄한…. 매, 맨가슴 근육?!’

“으아악!”

눈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챈 오스칼이 팔을 뻗어 반라의 가슴을 밀어냈다. 하지만 힘을 잔뜩 쓴 게 무색하게도, 오스칼의 몸을 단단히 감아 안고 있는 남자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어났어요?”

굵지도, 얇지도 않은 낮고 달콤한 목소리가 느릿하게 귓가로 흘러들었다.

“다, 당신 누구야! 이 변태 같은 자식! 너 지금 무슨 짓 하려고 했어? 당장 내 몸에서 떨어지지 못해?”

오스칼이 팡팡 남자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녀가 누워 있는 곳은 분명 침대였다.

“안 돼요, 지금 생존의 기술을 사용하는 중이거든요. 바닷물 때문에 체온이 많이 내려가 있었어요.”

“뭐…뭐?”

오스칼의 미간이 ‘생존의 기술’이라는 익숙한 단어에 잔뜩 좁아졌다. 물에 빠져 차가워진 몸의 체온을 유지하려 했던 모양인데…. 왜 눈앞의 남자는 반라냐고?

남자는 바지 위에 하늘하늘한 검은 실크 가운만을 걸친 채였다. 그나마도 앞섶을 풀어헤쳐 가슴을 모두 내보인 상태였다.

“정신이 들어서 다행이에요.”

남자는 살풋 웃더니 오스칼을 품 안에서 놓아주었다. 스르르 몸을 일으킨 그가 가운 끈을 여몄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금사로 자잘하게 수놓아진 가운이 고급스럽게 찰랑거렸다.

남자의 몸이 떠나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오스칼이 당황한 눈으로 제가 있는 방을 살폈다.

시선을 옮기니 나무 벽 위의 어두운 빛의 붉은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암갈색 책상 위에 올려진 선장 모자에 눈길이 닿았다. 선실이 틀림없는 공간이었다.

번뜩 떠오른 생각에, 오스칼이 홱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뒤돌아서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작은 화로 앞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의 남자.

출정 전 읽었던 드미트리의 보고자료에 있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스칼의 눈이 커졌다.

“다, 당신이 설마 붉은 수염이야?”

오스칼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오스칼의 입에서 나온 ‘붉은 수염’이라는 이름에 남자가 집어 든 컵을 내려놓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천천히 뒤돌아선 남자가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오스칼을 응시하는 황금색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서운하네요. 하지만… 그래, 맞아요. 내가 붉은 수염이에요.”

그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났다. 오스칼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건 의외인데….”

“뭐가요?”

다시 뒤돌아선 붉은 수염이 삐익-삐익- 소리를 내며 수증기 내뿜는 물 주전자를 화로에서 들어 올렸다.

“카디브해의 패권자라고 해서… 좀 더 나이가 많은 아저씨일 줄 알았는데.”

오스칼이 눈알을 굴렸다.

막연히 ‘붉은 수염’도 ‘미친 앵무새’나 ‘애꾸눈 미친 참새’와 비슷한 외양의 우락부락한 해적일 줄 알았더니, 그는 뜻밖에 너무나 젊은 청년이었다. 게다가 제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는 해적이라니….

잘 그을린 반들반들한 구릿빛 피부와 연한 꿀색이 도는 풍성한 붉은 고수머리, 길고 예리한 눈매. 그리고 예쁘게 다물린 도톰한 입술까지.

아직 짓궂은 느낌이 남아있는 인상은 많아 봐야 20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붉은 수염’이라는 명칭에 무색하게, 얼굴은 털이라고는 한 올 찾아볼 수 없이 매끈했다.

“최고가 되는 데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죠.”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컵에 따르던 붉은 수염이 오스칼의 말에 낮은 목소리로 쿡쿡대며 웃었다. 그의 넓은 어깨가 그 웃음에 살짝 흔들렸다. 이국적인 그의 차림새나 외양 때문에 그에게선 어쩐지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오스칼은 어딘가 알쏭달쏭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뭔가 놓치고 있는 듯 찜찜하고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오스칼이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방안을 샅샅이 훑었다.

여기저기 구멍이 난 지도, 타다 만 양초, 기다란 망원경, 제가 있는 곳을 가리키는 낡은 나침반. 그리고….

‘나이스!’

책상 옆에 세워진 검이 보였다. 바다에 빠지면서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붉은 수염도 명검은 알아보았던지 저를 물에서 건지며 검도 함께 챙겨온 모양이었다.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를 사람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이다니! 아직 애송이로군.’

오스칼이 뒤돌아선 붉은 수염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금살금 일어나 검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차를 끓이며 낮은 곡조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오스칼이 잽싸게 검을 집어 들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붉은 수염이 자신을 살려준 모양이지만, 어쨌든 그는 악명 높은 해적왕이었다. 어쩌면 저를 데려온 이유가 인질로 삼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이유가 뭔지는 차차 들어보자고!’

스릉-

오스칼의 검이 그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를 위협해 저를 이곳까지 데려온 목적을 실토하게 할 작정이었다.

챙-

당황한 오스칼의 눈이 커졌다. 여유 있게 차를 끓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순식간에 뒤돌아서 허리춤의 검으로 오스칼의 검을 막아냈다. 엄청난 반응속도였다.

그의 반격에 도리어 오스칼이 당황했다. 붉은 수염이 이렇게 기민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는 듯 녹색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오스칼을 내려다보는 날카로운 눈매 사이로 금안이 반짝였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 있는 채였다.

가까이 마주한 금빛 눈동자가 찌르는 듯 강렬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지럽게 얽혔다. 마치 타오르는 듯한 시선에, 대치 중이란 사실도 잊고 오스칼이 눈을 피했다. 붉은 수염을 피해 눈길이 닿은 곳은 오스칼의 검을 받아 낸 그의 검이었다.

“!”

오스칼의 눈이 놀라움으로 천천히 커졌다. 정말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번뜩 시선을 다시 들어 붉은 수염의 얼굴을 확인한 오스칼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다…당신, 아니 너… 설마… 진이야?”

오스칼은 1년 전 ‘애꾸눈 미친 참새’를 피해 도망치는 진에게 건네준 그녀의 단검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 목소리에 남자의 날카로운 눈매가 사르르 휘어졌다. 마침내 그의 아리따운 입술이 즐거운 기색을 띠며 고르고 하얀 이를 드러냈다.

“네, 누나.”

달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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