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1화
칼릭스 공작저의 사용인들 중 공작 부부의 금실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결혼한 지 1년이 훌쩍 흘렀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매사에 무뚝뚝한 칼릭스 공작이지만, 공작 부인을 볼 때만큼은 온화하게 풀어진 표정을 했다. 게다가 어떤 일이든 공작 부인이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빛내며 조르면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다가도, 결국은 공작 부인 뜻대로 하게 되곤 했다.
국왕을 빼놓고는 왕국에서 가장 지체가 높고, 누구보다 가장 뛰어난 검사인 칼릭스 공작이 유일하게 이길 수 없는 상대는 그의 부인, 오스칼뿐이었다.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모두 공작 부인을 부러워했고, 또 좋아했다. 공작령은 안정적으로 운영되어 하루하루 공작가의 자산은 불어났으며, 그의 강한 기사들 덕분에 치안도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윤택하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는 어느 평화로운 오후. 오스칼은 공작저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초여름의 햇볕을 쬐며 느긋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맑은 공기, 딱 알맞은 온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눈앞에 놓인 달콤한 간식들.
초여름 산들바람에 길고 풍성한 갈색 머리가 굽이쳤다. 잘 재단된 여름용 하늘색 드레스가 흔들리며 바스락대는 소리를 냈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 아늑한 공간 속, 오스칼이 얼음을 동동 띄운 레몬티를 홀짝이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심심해! 너무 심심하다고!”
오스칼은 배부른 불평을 늘어놓았다. 오스칼의 우렁찬 투정에 정원의 덩굴장미 나무 아래 고개를 들이밀었던 다람쥐 한 마리가 깜짝 놀라 부스럭 소리를 내며 풀숲으로 도망쳐버렸다.
“이거 〈여스칼〉 특별 외전 맞아? 〈여스칼〉 세계관 맞냐고!”
검투 마니아였던 작가는 어느새 검투는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저도 모르는 새 장르를 바꿨거나, 신작에 몰두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난 1년간 오스칼은 검투는커녕 대련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까.
오스칼이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입을 샐쭉 내밀었다.
“형…. 아니 비전하께서 이곳에 오시면 안 됩니다.”
몸도 좀 움직일 겸, 검술 훈련이라도 해볼까 칼릭스 기사단의 연무장에 들른 오스칼을 향해 드미트리가 펄쩍 뛰었다. 칼릭스 기사단에 처음 입단한 신입 기사들은 기사복 차림으로 연무장에 행차한 공작 부인을 보며 쭈뼛쭈뼛 눈치만 살폈다.
사색이 되어 오스칼의 등을 연무장 밖으로 떠민 칼릭스 기사단장 드미트리가 오스칼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형님이 연무장에 오시면 신입 기사들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그리고 비전하를 땡볕에서 훈련시켰다간 공작님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요!”
드미트리는 여전히 ‘비전하’라는 호칭이 익숙하지 않은지, 둘만 있을 땐 오스칼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물론 그 사실이 레오의 귀에 들어갔다가는 기합을 받게 될 것이 뻔했다.
결국, 연무장에서도 쫓겨난 오스칼은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다. 레오에게 대련을 부탁하기엔 그는 늘 정신없이 바빴다.
에렌의 국정 운영 강도는 선대 왕, 라인하트 10세 때보다 다섯 배 정도는 빡빡했다. 덕분에 국무대신인 칼릭스 공작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있기 일쑤였다.
“내게 주어진 일이라곤 죄다 적성에 안 맞으니….”
오스칼이 무기력하게 중얼거렸다. 지난 1년간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라고는 귀족 부인들의 티파티 참석, 무도회 주최, 왕궁 행사 참석, 가브리엘의 의상실에서 드레스 고르기 정도뿐이었다.
로잘린의 조언을 듣기도 하고, 하녀 비앙카의 도움을 받아 ‘공작 부인’ 노릇을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긴 했으나, 그리 즐거운 일들은 아니었다.
그나마 떠올릴 수 있는 신나는 일은 지난봄에 있었던 제라드의 팬 미팅 정도뿐이었다.
전 아르투아 대공비이자 사르데나의 공녀였던 올리비아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제라드의 소설은 라인하트뿐 아니라 사르데나를 비롯한 이웃 나라에도 출간되었다.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가가 된 제라드는 기사 생활은 접고, 인기 작가로서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공작 아내의 유혹 외전〉 발간회 겸 팬 미팅에서 올리비아가 흥에 겨워 만취해 제라드의 옷에 토한 일은 떠올릴 때마다 실실 웃음이 났다.
제라드 녀석의 얼빠진 얼굴이라니!
“오스카아알!”
저 멀리서부터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오스칼이 고개를 돌리자, 격식 있는 드레스를 차려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로즈! 일찍 왔네요? 늦은 오후는 되어야 온대서 마중을 나가려고 했더니!”
오스칼이 눈을 크게 뜨곤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로잘린을 맞이했다. 로잘린의 반짝이는 금발이 바람에 흩날리자 눈이 부셨다.
“오스칼이 보고 싶어서 일찍 왔죠. 비앙카가 오스칼이 이곳에 있을 거라고 해서 바로 왔어요.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마티스는 잘 있어요?”
오스칼이 웃으며 물었다.
아, 물론 그 1년 새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어마어마한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로잘린과 마티스가 결혼해 아이까지 낳은 일!
오스칼의 물음에 로잘린이 코를 찡긋해 보였다.
“그럼요. 그 사람은 아무래도 육아가 체질인 것 같아요. 체력이 좋아서 그런지, 종일 손에서 아기를 내려놓는 법이 없는 데 지치지도 않더라니까요!”
“암벽 훈련으로 단련된 팔뚝이라 그래요. 역시 마티스….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갖고 있군요?”
오스칼이 킬킬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로잘린을 향해 장난스러운 표정을 해 보였다.
“아이, 참! 놀리지 좀 말아요.”
오스칼의 결혼식 날, 뤼미에르 기사단의 청년들과 대작을 한 로잘린 곁에 끝까지 남은 이는 바로 마티스였다.
그리고 위스키를 커다란 오크통째 잔뜩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버린 로잘린은 다음 날 아침, 그만 마티스와 한 침대에서 눈을 뜨고 말았다.
물론 로잘린은 하룻밤의 실수로 황급히 사건을 무마하고 노이어로 떠나려 했지만, 줄곧 로잘린에게 반해 있던 마티스는 그녀에게 꽤 진심으로 구애했다.
그렇게 ‘#몸정→맘정, #만취후원나잇, #신분차이, #도망여주’ 같은 끈적한 키워드를 버무린 전쟁 같은 사랑을 한 두 사람은 그날 밤의 결실인 귀여운 아이를 잉태한 채 결혼에 골인했다.
그리고 마티스는 영지 일로 바쁜 로잘린을 대신해 근위대에 육아휴직을 내고 노이어 성에서 육아에 몰두 중이었다.
‘역시 로잘린은 여자주인공 재질이었어.’
오스칼은 제라드가 다음 소설의 소재로 쓰겠다고 할 정도로 치열했던 두 사람의 연애사를 떠올리며 푸스스 웃었다. 로잘린에게 자리를 권한 오스칼이 쾌활하게 물었다.
“국왕 폐하를 알현하러 왔다고 했죠?”
“네! 영지 일을 보고드리고 폐하께 몇 가지 지원을 요청하러 왔답니다. 물론 폐하께서 즉위한 이후에 북부에 신경을 많이 써주셨지만요. 왕국군 파견도 충분하고, 혹한기에는 세금도 면해주시니.”
“정말 다행이에요.”
왕좌에 관심이 없던 과거가 무색하게도 에렌은 무척 뛰어난 왕이었다. 오스칼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칼, 저와 왕궁에 함께 가는 게 어때요? 오스칼은 언제든지 왕궁 출입이 가능하도록 허락받았잖아요. 끝나고 함께 시에나에서 식사라도 하는 게 어때요?”
“저야 좋죠!”
오스칼이 좋은 생각이라는 듯 밝게 대답했다. 오스칼의 대답에 로잘린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연보랏빛 눈동자를 빛냈다.
***
라인하트 왕궁의 알현실.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 조각같이 잘생긴 미남자와 머리가 하얗게 센 신사가 옥신각신 입씨름을 하는 중이었다.
“폐하, 브리튼 가문의 영애는 왜 싫다고 하시는 겁니까? 아름답고, 똑똑하고, 게다가 왕국에서 이름난 백작 가문 아닙니까!?”
“내 취향이 아니야.”
아침부터 결혼하라고 성화인 알랭의 잔소리에 에렌이 미간을 찌푸렸다.
“취향이 아니시라고요? 지금 취향이라고 하셨습니까?”
“알랭, 나 국왕이야. 잊은 거 아니지?”
그를 대공이었던 시절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대하는 알랭을 향해 에렌이 짐짓 엄하게 타박을 놓았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이제 폐하께선 국왕이시죠! 한량같이 사시던 왕족이 아니시고요!”
“윽.”
알랭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에렌이 나지막이 침음했다.
“국왕이시라면 응당 왕국을 위해서 혼인을 하시고 후계자를 생산하셔야지요! 대관절 국혼에 취향을 따지는 사람이 어디 있답니까? 예? 국왕의 혼사는 국사인 걸 잊으신 거냐고요!”
“아니…. 그래도…. 취향에 맞으면…. 좋긴….”
에렌이 우물쭈물 말할 틈도 없이 거친 공세가 이어졌다.
“가뜩이나 현재 왕실에 후사가 부족하잖습니까? 게다가 제가 이 말씀까진 안 드리려 했습니다만, 지난번 아스가드 제국 황녀와의 혼인을 거절하신 건은 제정신이십니까? 이젠 국무회의에서도 폐하의 혼사에 대해 말이 나올 지경이라고요.”
끝도 없는 잔소리에 에렌이 질린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한참을 쏘아붙이고도 성에 차지 않는지 알랭이 씩씩대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왕국에서 폐하가 남색가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았는데, 이러다가 지금 귀족 가문에서 왕비 자리에 영애가 아니라 영식을 밀어 넣을 지경이라고요!”
똑똑-
구원자 같은 노크 소리가 알현실에 울렸다. 노이어 영주가 왔다는 시종의 전언에 에렌이 반색하며 알랭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보다시피 난 국무로 바쁘니까, 자네는 얼른 나가보게.”
“설마 아직도 오스칼 님을 못 잊으신 겁니까? 그분은 이제 칼릭스 공작 부인이시라고요!”
“알랭 도비에, 업무를 방해하지 말고 얼른 나가게.”
결국, 에렌의 싸늘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알랭은 부루퉁한 얼굴로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알현실 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잘린이 알랭을 향해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옆방에 칼릭스 공작 부인이 와 계세요.”
그 말에 알랭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