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10화
다음날, 오스칼은 해가 높이 떠오르고 나서야 눈을 떴다. 살짝 걷힌 창가의 커튼 사이로 이름 모를 새가 짹짹거렸다.
“저게 바로 ‘아침짹’….”
온몸이 얼얼했는데, 그것이 어젯밤 해적들과 벌인 격렬한 검투 때문인지, 아니면 더 격렬했던 다른 것 때문인지 도통 분간이 되지 않았다.
“으아.”
몽롱한 기분으로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옆에 레오가 누워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도저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오스칼은 똑바로 누워 눈만 깜빡거렸다. 한참 동안 침대 위에 설치된 하얀 캐노피의 섬세한 자수만 말끄러미 올려다보던 오스칼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때 두꺼운 팔뚝이 훅, 오스칼의 몸 위로 올라왔다.
“흡.”
오스칼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홍조로 빨개진 뺨을 살며시 옆으로 돌리자, 높은 콧등까지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레오의 단정한 얼굴이 보였다.
물론 어젯밤 레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들은 결코 단정하지 않았지만.
생각만으로도 어쩐지 달아오른 기분이 든 오스칼이 눈도 떼지 못한 채 레오의 얼굴을 물끄러미 감상했다.
분명 자느라 흐트러진 모습인데도 반듯한 인상이었다. 그때, 눈을 감고 있던 레오가 입꼬리를 스르르 올렸다.
“뭘 그렇게 훔쳐보고 있어.”
“뭐, 뭐야. 너 안 잤어?”
“네가 ‘아침짹’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을 때, 벌써 일어나있었지.”
그가 장난스럽게 농담을 던지며 살며시 눈을 떴다. 레오의 검은 눈동자에 반쯤 헐벗은 제 모습이 비치자 부끄러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모습에 그가 쿡쿡대며 웃었다.
“자, 잘 잤어?”
레오가 이불 밖으로 눈만 내어놓고 착실히 아침 인사를 하는 오스칼을 향해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오스칼을 그의 품으로 확 당겨 안았다.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의 살갗에서 달콤한 향이 풍겼다. 그는 오스칼의 보드라운 머리칼에 얼굴을 비비적댔다.
“음, 더 자고 싶은데.”
“오, 오늘은 다음 영지로 떠나는 날인데….”
“싫어…. 따지고 보면 오늘이 첫날인데에….”
어린아이처럼 조르는 듯한 그의 말투에 오스칼이 헉, 터져 나오는 놀라움을 간신히 목구멍으로 삼켰다.
얘가 대체 왜 이래, 정말 레오폴드 칼릭스 맞아? 아침에 눈을 뜨면 곧장 일어나 정진과 수련을 해야 하는 게 기사의 덕목 아니었어?
“레오, 해가 저렇게 높이 뜬 걸 보면 이미 우리 꽤… 늦은 것 같은….”
그가 못 들은 척 오스칼의 얼굴에 쪽, 쪽 입을 맞췄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탄탄한 상체가 오스칼의 몸에 바짝 닿았다. 그의 몸이 점점 더 제게로 가까워졌다.
‘아, 안돼. 지금은 환한 아침이라고!’
오스칼의 이성이 황급히 자제심을 소환했으나, 그녀의 가느다란 몸은 이미 레오의 단단한 근육에 꽁꽁 묶인 채였다. 오스칼이 저항해 봐야 그를 당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못 이기는 척 레오의 손에 몸을 맡긴 채 두 눈을 질끈 감은 오스칼의 귓가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 전하, 비전하. 일어나셨습니까?”
귀빈실 바깥, 불청객의 등장에 오스칼의 허리를 감아올리던 레오의 손이 움찔, 멈추었다.
“네! 이, 일어났어요!”
오스칼이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허둥지둥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물론 간밤의 일로 피곤하시겠지만, 이제 슬슬 채비를 하실 시간이라….”
“예? 아, 아니요! 그, 그런 게!”
이스키아 자작의 목소리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 방에서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시 다 들렸던 걸까?
“지난밤, 체포한 해적들과 경매의 참가자들은 성의 감옥에 모두 가둬두었습니다. 준비하고 나오시면 경과를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작이 말하는 간밤의 일이란 해적의 일인 모양이었다. 저 혼자 괜히 찔려 화르르 달아오른 게 창피해 오스칼은 온몸에 이불을 돌돌 말았다. 그리고는 레오의 팔에 힘이 빠진 것을 틈을 타 얼른 몸을 굴려 침대를 벗어났다.
“너, 너도 얼른 준비해!”
오스칼이 레오를 향해 타박하듯 내뱉고 욕실로 내뺐다. 허전해진 품 안을 허탈하게 본 레오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굳게 닫힌 방문을 째려보았다.
“계속 느끼는 거지만 이스키아 자작은 다 좋은데, 눈치가 없군.”
레오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
지난밤 이스키아 시내에서 벌어진 해적단 소탕에 관한 이야기는, 하룻밤 새 이스키아 영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특히, 이 근방 항구도시와 섬나라를 위협하는 골칫거리였던 ‘애꾸눈 미친 참새’가 처치되었다는 소식에 모두 입을 모아 칼릭스 공작 부부를 칭송했다.
“이번 일에 가장 공이 크신 분은 당연히 비전하이십니다. 전하를 잠시나마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이스키아 자작이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건넸다.
어젯밤 서던 경은 그가 보고 겪고 들은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소상히 보고했고, 그 이야기를 함께 들은 이스키아 영지의 기사들은 모두 존경 어린 시선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이스키아 자작께서도 일을 마무리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 일에 관여된 사람은 칼릭스 공작가의 이름을 걸고 엄하게 벌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내 아내가 대단하긴 하지요.”
어제 일에 대한 공을 치하하고, 붙잡힌 경매 참가자들의 처분을 논의하던 레오가 팔불출 같은 미소를 은은히 지으며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허허허, 공작 전하께서는 좋으시겠습니다.”
이스키아 자작은 다 이해한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어쩐지 쑥스러워진 오스칼이 뒷덜미를 긁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눈을 동그랗게 떴을 비앙카도, 오늘만큼은 이스키아 성의 사용인들에게 오스칼의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
“온 왕국을 뒤져봐도 기사 작위가 있는 마님은 우리 마님뿐일걸요? 우리 마님은 정말 멋있지 않아요?”
칼릭스 공작의 일행은 이스키아 성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음 여정의 채비에 나섰다.
가장 앞에 서서 기사의 예를 갖추던 서던 경이, 오스칼이 마차에 오르려 하자 잔뜩 갈등하는 표정을 짓더니 마침내 결심한 듯 오스칼에게 다가갔다.
“저…. 비전하, 혹시…. 제 검집에 사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서던이 우물쭈물 검집을 내밀자 오스칼 곁에 서 있던 레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뜻밖에 부탁에 눈을 동그랗게 뜬 오스칼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제 이름이 자수로 놓인 연한 분홍빛 실크 손수건을 꺼내, 서던의 검집에 곱게 매어주었다.
“검집에 낙서를 할 순 없잖아요.”
“가, 감사합니다. 비전하!”
서던이 감격에 겨워 연신 인사를 했다. 오스칼이 애정 어린 눈으로 서던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서던 경. 경 덕분에 이번 일이 잘 해결된 거예요. 우린 제법 괜찮은 파트너였죠?”
린과 진은 서던의 이모님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만나, 케이지에 함께 갇혀있던 아이들과 함께 고향, 시칠리아섬으로 무사히 돌아갔다고 했다.
홀로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서던 경이 고마워 오스칼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서던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오의 미간에 주름이 조금 더 늘었다.
“가, 감사합니다. 비전하. 부디 조심히 가십시오. 다음에 또 비전하를 모시고 임무를 수행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서던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차에 올라탄 오스칼이 이스키아 성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스키아의 사람들은 칼릭스 공작 부부를 향해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이랴!”
비스테카 경의 구령과 함께, 칼릭스 공작가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오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팔짱을 끼고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아내는 묘하게 기사 녀석들에게 인기가 좋단 말이지. 서던, 저 녀석도 왠지 널 바라보는 눈빛이 불순해 보이는데.”
레오가 불만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오스칼이 레오의 어깨에 가만히 몸을 기대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올망졸망한 눈망울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그중에서 나를 가장 좋아하는 기사는 레오폴드 칼릭스 경이잖아?”
“당연하지.”
오스칼의 애교 어린 목소리에 레오가 피식 웃으며 오스칼을 끌어안았다. 오스칼이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음 영지에서도 신나는 일이 많으면 좋겠다.”
“신혼여행 중 해적을 소탕한 일을 두고 신나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너뿐일 거다.”
“역시 좀 이상한가?”
오스칼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꼭 울적한 토끼 같은 표정을 한 오스칼을 못 말린다는 눈으로 바라본 레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니, 그래서 널 사랑하게 됐어.”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어느덧 아름다운 해안 도로를 부드럽게 달렸다. 오스칼이 마차 창문에 바짝 붙어, 맑고 푸른 바다를 눈에 가득 담았다. 레오가 연신 신이나 조잘거리는 오스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오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져 올라갔다. 눈앞에 있는 여인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외롭고 어둡던 그의 삶에 해피엔딩을 가져다준 사람.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오스칼을 바라보던 레오가 마음속으로 가만히 오스칼을 불렀다.
‘내가 사랑하는, 여기사 오스칼.’
[외전 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