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125)화 (125/138)

외전 1, 8화



 

서던은 비전하, 아니 기사 오스칼에게 끝없이 감탄하고 있었다. 군더더기가 없는 검 끝은 표적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처음엔 계획도 없이 달려온 그녀가 무모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제 실력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자신감이었던 모양이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해골 목걸이를 한 비쩍 마른 해적을 베어내는 것을 끝으로 달려온 해적을 모두 처치했다.

“비전하, 얼른 나가시지요.”

무사히 해적 무리를 돌파한 서던이 진이 빠져나간 출입구를 가리켰다. 그러자 오스칼이 고개를 저었다.

“서던 경, 위에 다른 아이들이 있잖아요! 그 아이들도 모두 구해서 나가야 해요.”

“예? 하지만 거긴 너무 많은 해적이….”

오스칼이 결연한 얼굴로 서던을 응시했다.

“경은 곧장 나가서 치안대를 불러와요. 노예 경매 현장이니 그들을 체포할 증거는 충분할 겁니다. 전 위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볼 테니까.”

“비전하를 두고 혼자 나갈 수는 없습니다.”

서던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함께 움직이는 편보다 훨씬 괜찮은 방법이에요.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다면, 경에겐 공작 부인의 권위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서던이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칼릭스 공작 부인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가 전속력으로 달려 건물을 빠져나가자, 오스칼이 검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화려한 홀에선 여전히 경매가 한창이었다. 경매의 참가자들은 홀의 뒤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듯했다. 오스칼이 기다랗게 늘어진 벨벳 커튼의 주름 뒤에 몸을 숨겼다.

이미 팔린 듯한 몇몇 아이들은 작은 케이지에 갇혀 몸을 떨었다. 오스칼이 홀 안을 둘러보며 무장인력을 헤아렸다. 못해도 열댓 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혼자 상대하기엔 너무 많은데…. 서던, 빨리 와요.”

오스칼이 초조한 듯 마른 침을 삼켰다. 경매가 끝나기 전에 현장을 덮쳐야 했다.

그때, 등 뒤에서부터 소란이 들렸다. 텅 빈 케이지와 쓰러진 동료들을 발견한 해적들이 분개하고 있었다.

우당탕 발걸음 소리와, 가래가 끓는 굵직한 목소리들이 울렸다. 오스칼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검집을 바짝 몸 가까이 붙이고 몸을 웅크렸다.

“물건이 없어졌다! 다들 내부를 샅샅이 수색해!”

“젠장, 전부 당했어! 대체 뭐 하는 놈들인 거지? 몇 놈이야?”

험상궂은 얼굴을 한 해적들이 사용인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며 몸을 수색했다. 커튼 뒤에 숨은 오스칼이 숨을 죽였다.

“저건 뭐야?”

얼굴에 세로로 길게 칼자국이 난 해적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커튼 한쪽을 가리켰다. 눈이 노란 해적이 커다란 칼을 들고 커튼을 향해 걸어왔다.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오스칼이 단단히 검을 쥐었다.

촤락!

커튼이 젖혀지기가 무섭게 오스칼이 검을 휘두르며 재빠르게 몸을 피했다. 삽시간에 해적들이 오스칼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스칼이 요리조리 몸을 움직여 달아났다. 하지만 많은 해적을 상대로 혼자 버티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젠장! 이젠 이판사판이야.”

오스칼이 결심한 듯 검으로 커튼을 베어내며 홀 안으로 뛰어들었다.

“꺄악!”

갑자기 튀어나온 칼잡이에, 홀 안의 귀족들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매의 참가자들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며 앞다투어 문으로 달려갔다.

“제기랄! 저놈을 잡아!”

해적 중 한 사람이 오스칼을 가리켰다. 오스칼이 문을 향해 달아나는 참가자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젠장!”

검을 든 해적들이 참가자 사이를 버겁게 헤치고 오스칼을 쫓아 달렸다. 육중한 몸을 이끌고 우왕좌왕 뒤엉켜 달아나는 사람들 사이를 뛰기란 쉽지 않았다. 오스칼은 날래게 움직여 아이들이 갇혀있는 케이지를 향해 달렸다. 케이지 앞을 지키던 해적이 검을 들고 오스칼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챙-

곧이어 두 검이 맞부딪쳤다. 그자와 합을 나누는 사이 오스칼 주변으로 해적들이 모여들었다. 검을 고쳐 쥔 오스칼이 숨을 헐떡이며 그녀를 둘러싼 해적들을 응시했다.

‘조금만 버티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여러 명의 해적을 홀로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오스칼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득 이교도 열한 명에게 둘러싸여 죽을 뻔했던 〈여기사 오스칼 외전〉의 빙의 첫날이 떠올랐다. 그러자 왈칵,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건 결코 혼자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건 빙의 경험치가 적용 안 되는 일인데.’

오스칼은 저도 모르게 레오를 떠올리고 말았다. 레오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반쯤 체념한 듯 가까스로 쏟아지는 검날을 쳐냈다.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전부 체포해라!”

오스칼을 둘러싼 해적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홀 입구로 향했다. 이스키아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그녀가 보고 싶던 남자가 서 있었다.

“레오!”

오스칼의 표정이 밝아졌다. 난리 통에서도 또렷하게 귀에 꽂히는 목소리에, 레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오, 오스칼?”

곧이어, 레오의 눈에 오스칼을 둘러싼 해적들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오스칼을 향해 내달린 레오가 단숨에 적을 베어냈다. 레오가 오스칼의 어깨를 붙들고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건가?”

“무슨 말이야? 너, 서던 경이 불러서 온 거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인가?”

그때, 홀의 뒤편에서부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 비전하!”

치안대 몇을 데리고 나갔던 문으로 돌아온 서던이, 홀 내의 상황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스키아의 기사들이 해적들을 제압하고, 경매의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중이었다.

“고, 공작 전하?”

“일단,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이곳부터 정리하지. 이스키아 자작은 1층에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자들을 체포하고 있을 거다.”

쨍그랑-

“부, 불이야!”

안쪽에서부터 사용인들의 외침이 이어졌다. 내부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이 달아나다 기름등을 엎은 모양이었다. 눈 깜짝할 새, 자욱한 연기가 지하를 뒤덮었다.

“어, 얼른 피하셔야 합니다. 지하라 연기가 금방 들어찰 겁니다.”

서던이 공작 부부를 향해 외쳤다. 오스칼이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레오! 서던 경! 아이들을 데려가야 해요!”

쓰러진 해적의 몸뚱어리를 뛰어넘어 케이지 앞으로 달려간 오스칼이 자물쇠를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서던과 레오 역시 다른 케이지를 부수고 아이를 꺼냈다. 난장판이 된 상황에 어린아이들은 엉엉 울고 있었다.

“영차!”

오스칼이 기합을 넣으며 힘껏 아이를 안아 들었다. 서던과 레오, 그리고 치안대 중 몇 명이 아이를 챙겼다.

“아이는 내게 맡겨.”

레오는 오스칼의 품에 안긴 아이를 제 팔에 옮겨 안았다. 그의 넓은 어깨와 팔은 아이 둘을 들었는데도 넉넉해 보였다.

“괜찮겠어?”

“어린아이 둘쯤 안아 들었다고 힘들 정도로 약하지 않아.”

“레오폴드 칼릭스 공작님은 온몸이 근육질이시니까.”

오스칼이 푸스스 웃었다. 몸이 가벼워진 오스칼이 재빠르게 앞장섰다. 그때 누군가 오스칼의 앞을 막아섰다.

“이놈들! 너희 모두 같이 지옥으로 끌고 가 주마.”

정식으로 소개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 앞을 가로막은 남자는 틀림없이 ‘애꾸눈 미친 참새’였다. 선장의 모자 아래로 보이는 곱슬곱슬한 검은 긴 머리, 짧게 기른 콧수염, 그리고 오른쪽 눈에 금빛 안대를 쓴 모습.

이곳에서 살아나가기를 일찌감치 포기한 미친 참새는 제 계획을 어그러뜨린 자들과 함께 죽을 각오로 일행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오스칼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아주 찰나의 갈등 끝에 오스칼이 소리를 질렀다.

“전부 아이들을 데리고 빨리 나가요!”

이미 불길이 꽤 번져,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레오가 상대하는 편이 더 확실하겠지만, 안아 든 아이가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미간을 좁힌 레오를 향해 눈짓을 보낸 오스칼이 바람처럼 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미친 참새는 오스칼의 검을 받아냈다.

카강-!

오스칼과 미친 참새가 합을 나누는 동안 서던과 치안대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재빨리 계단을 올랐다. 레오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문 채 오스칼에게서 등을 돌렸다.

“미친 병아리! 칼릭스 공작령에서 이런 짓을 벌인 걸 후회하게 해주지.”

“병아리가 아니라 참새다!”

오스칼은 공중으로 날아오르듯이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커다란 호를 그리며 눈앞에 보이는 남자에게 검을 내질렀다. 미친 참새가 거대한 해적 칼로 오스칼의 검을 받아냈다.

단숨에 검을 걷어낸 오스칼이 연기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서 미친 참새의 약점을 찾아 부지런히 눈을 움직였다.

‘안대에 가로막힌 오른쪽 시야가 약점이야.’

오스칼이 빠르게 남자의 오른편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삽시간에 허를 찔린 참새가 오른쪽 옆구리를 움켜쥐며 무릎을 꺾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스칼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서 울컥 피가 쏟아지며 미친 참새의 몸이 고꾸라졌다.

“콜록콜록.”

오스칼이 기침하며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숨이 막혀 머리가 어지러웠다. 조금만 더…. 눈을 깜빡이던 오스칼의 몸이 기우뚱 쓰러졌다.

그때, 누군가의 팔이 휘청이는 오스칼의 몸을 덥석 붙들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레오가 오스칼을 안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불길은 홀 안까지 번져 오르고 있었다.

“푸하!”

겨우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맑고 서늘한 공기가 코를 스치며 오스칼의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오스칼! 괜찮아?”

“콜록, 난 괜찮아. 다들 무사한 거야?”

“비전하!”

멀리서부터 서던이 달려와 오스칼에게 물을 건넸다. 바깥에는 이스키아 기사들에게 붙잡힌 경매의 참가자들과 해적들이 포박되어 있었다. 합류한 치안대원들이 그들의 신원을 확인했다. 레오의 품에서 내린 오스칼이 얼굴의 검댕을 닦아내며 물었다.

“레오,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야?”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건가? 내가 아까 거기서 널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

레오가 눈을 부릅떴다.

곧, 저쪽에서 이스키아 자작이 다가왔다. 자작은 레오와 함께 있는 오스칼을 보고 잠깐 당황한 눈을 하더니, 어정쩡한 예를 갖추었다.

“비…비전하. 먼저 알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자작은 오스칼의 행색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청년같이 차려입은 옷은 전투로 너덜너덜해졌고 핏자국과 그을음이 잔뜩 묻은 머리카락과 얼굴은 엉망이었다. 오늘 아침 식사 자리에서 본 귀부인과 동일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이 사태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는 듯 오스칼과 서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서던 경.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비전하와 자네가 왜 이곳에…?”

“여, 영주님. 그게….”

서던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 머뭇거렸다. 오스칼의 의지였다고는 하나, 그녀를 이런 몰골로 만든 게 제 탓인 것 같기도 했다.

“이스키아 자작, 모든 건 제 책임이에요.”

오스칼이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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