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124)화 (124/138)

외전 1, 7화



 

‘까마귀 클럽’ 살롱이 있다는 건물은 입이 떡 벌어지게 크고 호화로운 건물이었다. 건물의 외관만 보아서는 해적들이 우글거릴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파산해 문을 닫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스칼이 온통 어두컴컴한 건물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기가 까마귀 클럽이라는 거죠?”

“예, 맞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폐쇄된 것처럼 보이는데요.”

굳게 잠긴 정문 앞에서 오스칼이 미간을 좁혔다. 서던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혹시 다른 까마귀 클럽이 아닐까요? 아니면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쪽지라든가….”

“이 쪽지는 선장실에서도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어있었어요. 분명 중요한 일정이라고 생각해서 붙여둔 걸 거예요. 게다가 해적선이 이스키아에 상륙한 날짜와 이스키아의 살롱 이름을 적은 쪽지잖아요. 기가 막힌 우연이 아니라면 ‘까마귀 클럽’은 이곳을 의미하는 게 맞겠죠.”

일리가 있는 말에 서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기로 이 건물의 뒷문은 다른 골목으로 연결되는데… 안내하겠습니다.”

서던이 뒷문으로 오스칼을 이끌었다. 대로변에 있는 정문과는 달리, 뒷문은 후미진 골목과 연결되어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에 무장한 사내들이 서성였다.

“이런. 어쩐지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요?”

오스칼이 낮게 속삭였다. 폐쇄된 건물의 뒷문에 선 보초라니, 이건 의심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수준이었다.

오스칼의 눈짓과 동시에 골목 안을 살금살금 걸어가 단숨에 사내들을 제압한 두 사람은, 보초의 허리춤에서 빼앗은 열쇠로 폐쇄된 건물 안으로 잠입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건물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설마 함정은 아니겠죠?”

건물 안을 살피던 서던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스칼은 날카롭게 눈을 번뜩이며 건물 내부를 둘러보았다.

소파, 티테이블, 스탠드 램프, 협탁, 장식장, 꽃병, 초상화, 그리고 책장.

아하!

속으로 쾌재를 부른 오스칼이 벽 한쪽에 바짝 붙어 선 커다란 책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실크 손수건을 책장 근처에 살며시 가져다 댔다.

팔랑-

얇은 손수건이 책장 안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렸다. 오스칼이 만족스러운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서던 경, 날 좀 도와줘요.”

오스칼의 부름에 다가간 서던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오스칼의 지시에 따라 책장을 힘껏 밀었다.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책장이 옆으로 스르르 밀리며,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숨겨진 공간이 등장하자 서던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헉! 비, 비전하…. 이런 곳에 계단이?!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 이게 바로 ‘경험치’란 거 아니겠어요?”

〈여기사 오스칼 외전〉 빙의를 빡세게 한 보람이 있네. 오스칼이 씩 웃었다.

계단 아래에서 희미한 불빛이 들며 소란이 들렸다. 서던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인 오스칼은 몸을 낮추고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계단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오스칼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크게 뜬 그녀가 뒤돌아 서던에게 손을 저어 검을 물렸다.

지하 공간에는 어마어마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밝은 빛으로 가득 찬 엄청난 규모의 홀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흡사, 경매장 같은 분위기였다. 홀 안은 오스칼과 서던이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모습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홀 가장 앞쪽, 설치된 무대에는 어린아이들이 서 있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자들이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무대를 향해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들은 사용인들이 돌아다니며 건네는 샴페인을 마시고, 음식을 입에 넣으며 들뜬 눈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뭐죠?”

오스칼이 서던을 향해 물었다. 서던이 이마를 찌푸렸다.

“노예 경매입니다.”

오스칼이 황당한 눈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남루한 복장의 어린아이들이 사슬에 묶인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어떻게 칼릭스의 영지에서 이런 일이….”

“아이들의 차림새나, 생김새로 보아…. 외국인들이군요. 저들은 외국인 노예라 더욱 거리낌이 없는 겁니다.”

오스칼이 착잡한 얼굴을 했다.

“일단, 저 아이들을 가둔 곳이 있을 거예요. 찾아보죠.”

두 사람은 경매장의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틈을 타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샴페인 잔을 옮기는 사용인들을 따라 붉은 벨벳 커튼 뒤로 빠져나왔다. 공간을 나누는 커튼 뒤에는 화려한 홀과 대조되는 칙칙한 공간이 나타났다.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음료와 식기들을 나르고 있었다. 워낙 바쁘게 돌아가 특별히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축축하고 냄새나는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드문드문 보이던 사용인들도 자취를 감출 무렵,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어이, 사용인들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야. 길을 잘못 들었어. 돌아가!”

붉은 수염을 세 갈래로 땋은 험악한 인상의 해적이었다. 오스칼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아, 잠시 화장실을 찾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어디로 가면 된다고요?”

“멍청한 놈. 너희가 있을 곳은 저쪽…. 큭!”

남자는 오스칼의 일격에 말을 마치지 못하고 쓰러졌다. 오스칼이 손목을 휘둘러 검에 묻은 핏방울을 털자, 검자루에 박힌 녹색의 보석이 반짝였다.

“아마 이 남자 등 뒤에 우리가 찾는 곳이 있을 거 같죠?”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맹수를 가두는 케이지처럼 철장이 가로막은 공간이 보였다. 더럽고, 컴컴하고, 어딘가 스산하기까지 했다. 경매가 진행되는 공간과 같은 건물 안의 풍경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곳엔 어린아이들이 갇혀 훌쩍이고 있었다. 그중에 유독 나이가 많아 보이는, 붉은 머리의 소년이 눈에 띄었다.

“진? 혹시 네가 진이야?”

오스칼의 창살로 바짝 다가가 소년을 향해 이름을 불렀다.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년이 눈을 들어 제 이름을 부른 자를 바라보았다. 린과 같은 황금색 눈동자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낯선 이를 잔뜩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열일곱, 아니 열여덟 살쯤 되었을까. 살짝 노란 빛이 도는 붉은 고수머리, 반항기가 서린 눈매, 높은 콧날, 그리고 아직 다 자라지 않아 어린 티가 나는 날렵한 선을 가진 신비로운 매력의 소년이었다.

“당신은 누군데 내 이름을 알지?”

앳된 얼굴치고는 꽤 건방진 말투였다.

“난 오스칼이라고 해, 네 동생 린이 널 구해달라고 부탁해서 온 거야.”

여동생의 이름에 그를 휘감고 있던 분위기가 단번에 달라졌다. 그가 몸을 일으켜 창살 가까이 바짝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생각보다 키가 커, 오스칼은 그의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들어올려야 했다.

“당신이 린을 만났다고요? 린은 무사해요?”

“걱정하지 마, 린은 안전한 곳에 있어. 곧 린을 만나게 해줄게.”

오스칼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예리한 검으로 케이지에 걸린 자물쇠를 내리쳤다.

까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물쇠가 부서져 내렸다. 훌쩍이던 아이들도 어느새 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끼이익-

정말로 풀려날 줄은 몰랐던지, 진은 철문이 열리고도 얼빠진 얼굴이었다. 그가 쭈뼛거리며 철창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정말 당신이 린의 부탁으로 날 구하러 왔다고요?”

“뭐 그런 셈이야. 우애가 좋은 남매구나? 린이 널 아주 걱정하더라고.”

오스칼이 생긋 웃었다. 덩치만 컸지 아직 얼굴엔 천진난만함이 묻어있는 소년이었다. 진이 눈을 깜빡였다.

“고, 고맙습니다. 어….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되죠?”

막 굵직해지기 시작한 목소리로 소년이 오스칼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눈앞의 구세주가 귀족인지, 평민인지, 여인인지, 남자인지조차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게 잔뜩 경계심을 드러내던 소년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귀여워 오스칼이 청량하게 웃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 이름은 오스칼이야. 하지만 넌 그냥 누나라고 부르면 돼. 그리고 아직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엔 일러. 이제 겨우 시작이거든.”

“누, 누나요?”

오스칼이 뜻밖의 호칭에 당황하는 진을 향해 눈을 찡긋 해 보였다.

“비전하, 저기….”

서던이 그들이 왔던 방향을 가리켰다. 바깥에 쓰러져 있던 동료를 발견했던지, 한 무리의 해적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오스칼이 또렷한 눈으로 진을 올려다보았다. 진은 눈매를 찌푸리고 서던이 오스칼을 부른 ‘비전하’라는 호칭을 곱씹고 있었다.

“진,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나와 서던이 저놈들을 상대할 동안 넌 이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쳐. 복도를 쭉 따라가면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출입구가 있어.”

“저도 함께 싸울게요.”

진이 눈을 부릅떴다. 어린 녀석의 패기가 귀엽다는 듯 오스칼이 싱긋 웃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지금 네 도움이 더 필요한 건 저 아이들이야.”

진의 뒤에서 자그마한 아이 하나가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오스칼이 그 아이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가 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 아이, 많이 추운가 봐. 아이들은 체온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거든. 네가 꼭 안아줘.”

“안아…요?”

황금빛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일렁였다.

“응, 그게 바로 생존의 기술이거든.”

쾌활하게 대답한 오스칼이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진에게 건넸다.

“너와 아이들을 지키는 데 사용해.”

“비전하, 대비하셔야 합니다.”

서던이 오스칼과 달려오는 해적을 번갈아 바라보며 경고의 말을 건넸다. 오스칼이 서던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을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만나서 반가웠어, 진. 그럼 아이들을 부탁할게. 린은 이스키아 시내의 ‘배부른 돼지’ 여관에 있어.”

그 말과 동시에 오스칼이 빠르게 뛰어올랐다.

진의 황금색 눈이 묘한 기색을 담아 오스칼을 좇았다. 어두운 지하였지만, 마치 오스칼에게만 빛이 드는 것처럼 그녀가 지나간 자리마다 섬광이 번쩍였다.

오스칼의 검날 아래로 쓰러지는 해적들을 확인한 진이, 이윽고 아이들을 데리고 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