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6화
한 시간 뒤, 오스칼과 서던은 이스키아 성으로 향하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린 양은 제 이모님이 운영하는 여관에 데려다 두었습니다. 언제든 린 양이 시칠리아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해두었고요.”
“아주 좋아요.”
오스칼은 손에 든 종이 뭉치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서던 경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비전하께서는 그동안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항구의 선박관리소에 다녀왔어요. 이스키아 항구에 정박하는 배들을 관리하고 있을 테니까요. 오늘 오전에 들어온 배 중에 정박 허가 시간을 24시간 내외로 잡은 배의 목록을 추렸죠.”
오스칼이 몇 장의 종이를 집어 들어 서던의 눈앞에서 팔랑거렸다. 오스칼의 빠른 판단력에 서던이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선박관리소 직원들이 용케 정보를 제공했군요?”
“뭐…. 실랑이가 좀 있었지만. 약간의 지위를 이용했죠. 칼릭스 공작부인이 달라는데 별수 있나요. 권력이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오스칼이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처음으로 공작부인이 된 것이 뿌듯한 순간이었다. 그리고는 말을 덧붙였다.
“제가 요구한 조건에 맞는 배는 두 척이에요. 그런데 아마 이쪽 배일 거예요. 다른 쪽 배는 해적질을 하기엔 지나치게 눈에 띄거든요.”
오스칼이 정박 허가서에 적힌 용도와 색을 가리켰다.
[용도 : 휴양용 요트, 색상 : 흰색]
“확실히, 이건 귀족들의 사치품이겠군요.”
“그러면 용의선은 결국 하나가 남게 돼요. 그리고, 경의 말대로라면 해적선은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출항할 테니 그 전에 움직여 인질을 구해야겠죠.”
오스칼이 ‘짙은 밤색의 무역선’이라고 쓰인 정박 허가서를 들어 올리며 싱긋 웃었다.
***
성에 도착하자마자 영주의 집무실로 달려온 오스칼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성의 집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오스칼에게 고개를 숙였다.
“칼릭스 공작님과 이스키아 자작님은 급히 확인할 게 있으시다고 조금 전에 성을 떠나셨습니다.”
“두 분 다요? 그럼 자작부인은 어디 계세요?”
“마님께서는 친정 가문의 자매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말씀을 듣고 오전에 짐을 싸서 정신없이 나가셨습니다.”
오스칼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왜 하필 이런 중요한 때에, 성의 관리인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담!
뎅-뎅-뎅-뎅-뎅-뎅
코끼리 상아로 만든 터무니 없이 화려한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요란하게 채웠다. 사치품 수집이 취미였다는 전 영주가 사둔 것이 분명했다.
곧 해가 질 시각이었다. 어느덧 불그스름하게 변해가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오스칼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스칼이 결연한 표정으로 서던을 향해 낮게 중얼거렸다.
“서던 경. 날 믿죠?”
“예?”
오스칼이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성의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서던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뒤를 쫓았다.
***
이스키아 성의 귀빈실 앞, 서던은 초조한 표정으로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서던은 방금 오스칼에게 이스키아 기사단에 속한 어린 견습생의 옷을 한 벌 건넨 참이었다. 칼릭스 공작과 이스키아 자작은 성안의 기사를 모두 데려간 모양인지 성안은 고요할 뿐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어린 청년 같은 모습의 오스칼이 나왔다. 흰 셔츠에 갈색 바지, 하나로 틀어 올린 머리를 둥그런 모자로 감춘 오스칼의 허리춤에는 레오의 결혼 선물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스칼의 변장을 돕던 비앙카는 거의 혼절하기 직전의 얼굴로 오스칼의 몰골을 넋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비전하…?”
서던 역시 놀라움에 눈을 끔뻑이며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사람은 귀부인이 아니라 마치 제 휘하에서 교육을 받는 어린 견습 기사처럼 보였다. 오스칼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창에서 스며든 붉은 노을빛을 받아 일렁였다.
당황한 것도 잠시, 서던은 오스칼의 똑 부러지는 목소리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자, 이제 의지할 건 경과 나. 둘뿐이에요. 오늘 하루 경을 제 파트너로 임명할 테니, 잘 해보자고요.”
“여, 영광입니다.”
뜻밖에 소문으로만 듣던 ‘여기사 오스칼’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게 된 서던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오스칼은 서던을 이끌고 마구간으로 달렸다.
“비앙카, 공작님과 자작님이 들어오시면 내가 항구로 갔다고 전해줘!”
“비, 비전하! 정말 이대로 나가시는…!”
“그럼, 잘 부탁해!”
오스칼은 울상이 된 비앙카를 뒤로 한 채, 훌쩍 말 위에 올라탔다.
***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둑어둑한 항구, 오스칼과 서던은 용의선 근처에서 몸을 낮추었다.
“저 배가 해적선이 틀림없어요.”
“그, 그렇겠죠?”
정박 허가서에 쓰인 내용과 일치하는 선박의 외관에 오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던은 몸을 흠칫 떨었다. 분명 뛰어난 실력을 갖춘 그지만 비교적 평화로운 이스키아 영지에서만 지내온 탓에, 이런 임무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기사단 규모로 움직이는 것도 아닌 공작부인과 단 둘뿐이라니!
그가 바짝 마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럼 해적 놈들의 본거지로 난입해 보실까!”
오스칼의 걸걸한 말투에 서던의 부르튼 입술이 벌어졌다. 그는 제가 들은 단어가 맞는지 곱씹을 새도 없이 오스칼을 뒤쫓아야 했다. 오랜만에 편한 옷을 입은 오스칼이 몸을 가뿐하게 움직였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서던은 공작부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신나 보인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항구에서 자그마한 보트를 빌렸다. 보트가 해적선의 뒷머리에 바짝 붙자, 오스칼이 높다란 배의 후미를 올려다보았다. 오스칼이 눈매를 치켜떴다.
“경, 혹시 기사단에서 암벽 훈련 좀 했어요?”
“예? 아, 암벽 훈련이요?”
오스칼이 이스키아 기사단에서 그런 훈련도 받지 않았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당황한 서던을 뒤로하고 오스칼이 허리 뒤에서 단도를 두 개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나무로 만든 배의 몸통을 찍어가며 오르기 시작했다.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던이 이내 같은 방법으로 오스칼의 뒤를 따랐다.
“뭐, 돌벽보다는 훨씬 쉽네.”
〈여기사 오스칼 외전〉에 빙의했을 때에 이미 경험해 본 일이었다. 오스칼이 가뿐하게 배 안으로 진입했다.
배 안은 고요했다. 오스칼이 검을 빼어 들고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갑판에는 두툼한 밧줄과 빈 술병, 나무 드럼통 따위가 굴러다녔다. 돛 여기저기엔 모래색의 묵직한 자루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배처럼 보였다.
“헉, 헉.”
서던이 숨을 헐떡이며 배 위로 기어 올라오자 오스칼이 중얼거렸다.
“흠. 배에 해적들이 타고 있을 줄 알았더니. 모두 내렸나 본데요.”
“해, 해적들이 있는 배에 올라타시려고 했다고요?”
“그럼 빈 배에 올라타요?”
“저, 전 당연히 빈 배라고….”
서던이 아찔한 상상에 이마로 흐르는 식은땀을 훔쳤다. 그때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오스칼이 날카롭게 검을 세우자, 서던 역시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빈 배를 지키고 있던 몇몇 해적들이 달려왔다.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두 남자는 현란한 색상의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초승달 모양으로 굽은 날카로운 칼이 들려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전형적인 해적의 모습에 오스칼이 호기심 어린 눈을 했다.
“오!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데요?”
서던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 오스칼이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챙-
서던이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오스칼의 검에 나가떨어진 두 명의 해적이 배 바닥을 굴렀다. 서던이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칼릭스 공작부인에 대한 소문이 진짜였구나….’
“서던 경!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사람이 갇혀있을 만한 곳을 찾아요!”
“예? 예예!”
멀거니 서 있던 그는 오스칼의 목소리에 허둥지둥 움직여야 했다. 오스칼이 재빨리 걸음을 옮기며 외쳤다.
“전 선장실로 가볼게요.”
“비전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서던이 오스칼에게 의미 있을 것 같지 않은 당부를 건네며 조타실로 향했다.
오스칼은 선실을 하나하나 살폈다. 배 바깥쪽은 평범한 무역선으로 위장했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해적선이란 사실이 실감이 났다. 선실 한쪽에 돌돌 말아 숨겨둔 검은색 깃발에는 해적을 상징하는 해골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드문드문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폭약이나, 무기도 눈에 띄었다.
그 중, ‘애꾸눈 미친 참새’가 사용하는 선장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선장실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해적 하나를 가볍게 베어낸 오스칼이 선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선장실은 지저분하지만, 화려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스칼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선장실 이곳저곳을 살폈다.
선실 바닥은 정박지마다 구매한 물건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물품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혼잡스러웠다. 어두운색 나무로 만든 가구들은 천장에 매달린 기름 등의 주황빛을 받아 은은한 분위기를 풍겼다.
‘애꾸눈 미친 참새’ 이름답게, 벽에 박힌 날카로운 낚싯바늘마다 황금색으로 칠해진 안대가 주렁주렁 걸려있었다.
문득 한 쪽 벽에 단검으로 꽂혀 고정된 양피지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월 @일, 21시 〈까마귀 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