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5화
아침 식사 내내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레오는 이스키아 자작이 내어준 나들이용 마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조금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가벼운 외출용 드레스를 입은 오스칼을 향해 투덜거렸다.
“영지로 신혼여행을 오는 것부터가 실수였군.”
“대신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잖아.”
오스칼이 이스키아 관광용 지도를 펼쳐보며 들뜬 목소리를 냈다.
햇살 아래에서 보는 이스키아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바다와 맞닿은 도시에서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건물의 첨탑과 지붕을 꾸민 황금 장식들이 봄볕을 받아 번쩍였다. 반들반들한 정사각형 돌로 다듬어진 길과 하얗게 칠해진 건물들, 길게 늘어서 돛을 세우고 정박한 알록달록한 배들까지.
광장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흰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눈이 휘둥그레져 두리번거리는 오스칼을 재밌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레오가 광장 분수대 옆 파란 카트에서 꽃을 팔고 있는 청년에게서 쨍한 빛깔의 꽃을 샀다. 꽃송이가 크고 향기가 진한 남부의 꽃이었다.
최대한 들뜬 기색을 숨기고 진귀한 해산물 좌판에 넋을 빼놓고 있던 오스칼의 귓가로 커다란 꽃송이가 쑥 들어왔다.
“우와, 정말 예쁘다! 고마워.”
레오에게서 꽃을 받아든 오스칼이 활짝 웃었다. 레오는 진심으로 세상의 어떤 꽃보다 오스칼이 더 예쁠 거라고 생각했다.
“공작 전하, 비전하. 이쪽으로 오시면 더 좋은 풍경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고마워요, 서던 경!”
오스칼이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역시 귀족보다는 기사를 상대하는 것이 마음이 더 편했다.
두 사람의 안내 겸 호위를 맡은 기사는, 이스키아 출신의 젊은 기사 서던이었다. 짙은 갈색 머리와 갈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이스키아에서 제법 출중한 실력을 갖춘 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서던 경은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인 칼릭스 공작 부부를 모시게 된 일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자신의 검집에 두 사람의 사인이라도 받아둘 기회만 슬며시 엿보고 있었다.
광장의 거리에서는 흥겨운 마술쇼가 한창이었다. 오스칼은 입을 헤 벌리고는 마술사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저쪽에서 전령 하나가 빠르게 달려왔다.
“공작 전하, 지금 급히 성으로 모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영지의 일로 보고드릴 것이 있어….”
레오가 눈썹을 찡그렸다. 오스칼은 숨을 헐떡이는 전령과 레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급한 일인가 봐. 얼른 돌아가자.”
오스칼이 군중들 사이에서 몸을 돌리자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레오가 영지의 일로 보고를 받는 동안, 오스칼은 이스키아 성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할 게 뻔했다.
“서던 경을 남겨 두고 갈 테니까. 넌 더 둘러보다 와. 한창 즐거웠잖아.”
“그래도 돼?”
오스칼 역시 그편이 더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라며 싱긋 웃어 보인 레오가 성의 전령과 함께 떠나고, 오스칼은 서던과 함께 남았다.
오스칼과 둘만 남게 된 서던은 왕국 최초의 여기사에게 말을 붙여 보고 싶어 초조한 눈치였다. 마술을 구경하는 대신 연신 곁눈질로 오스칼을 훔쳐보던 서던이 비장의 한 수를 꺼내 들었다.
“비전하, 이 근처에 이스키아에서 제일가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이요?”
반짝, 밝아진 오스칼의 낯빛에 서던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칼릭스 공작 부부의 이야기가 적힌 기사라면 모두 빠짐없이 읽은 그는, 칼릭스 공작부인이 달콤한 것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던 터였다.
서던이 추천한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는 엄청나게 기다란 줄이 늘어서 있었다.
“비전하,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면 제가 아이스크림을 사 오겠습니다.”
서던이 후다닥 기다란 줄에 합류하고, 오스칼은 근처 가게의 쇼윈도를 이리저리 훔쳐보았다. 지금은 딱히 보는 사람도 없으니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겠지?
“우와.”
오스칼은 베이커리 앞에 붙어서서 싱싱한 제철 과일이 올려진 생크림 케이크를 향해 탄성을 질렀다. 시에나에서는 보지 못한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오스칼이 꿀꺽 군침을 삼켰다.
덜그럭-
문득, 베이커리 옆 후미진 골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오스칼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쇼윈도를 여러 개 지나다 보니, 어느새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멀어져 있었다.
바스락-
인기척이라고 하기엔 조금 가벼운 울림이었다. 길고양이인가? 오스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훌쩍, 훌쩍
오스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분명,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였다. 오스칼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어두컴컴한 골목 안에는 뱃사람들이 버리고 갔을 법한 나무 드럼통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중 뒤집힌 드럼통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오스칼이 치맛자락을 손끝으로 붙잡고 살금살금 드럼통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들리는 드럼통 앞에 쪼그리고 앉아, 살며시 드럼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드럼통 안에, 잔뜩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는 작은 인영이 보였다.
흡, 짧게 숨을 참은 오스칼이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어린아이를 향해 말을 건넸다.
“안녕? 난 오스칼이라고 해. 혹시 내가 뭘 도와줄까?”
드럼통 안에서 비쩍 마르고 남루한 행색을 한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어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지, 대답이 없었다.
“너, 괜찮니? 혹시 엄마를 잃어버렸어?”
오스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녀가 눈물에 젖은 황금색 눈으로 오스칼을 올려다보았다. 빨간 고수머리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괜찮으면 내가 널 도와줘도 될까?”
오스칼의 다정한 목소리에 소녀는 눈물을 훔치고 오스칼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스칼은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레오에게 받은 꽃을 건넸다.
“너, 꽃 좋아해? 여기서 나오면 아이스크림도 사줄게.”
소녀가 가느다란 팔을 뻗어 오스칼이 건넨 꽃을 받아들었다. 예쁜 꽃에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마침내 소녀가 드럼통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넌 이름이 뭐야? 이곳에 살아? 엄마를 잃어버렸어?”
“제 이름은 린이에요. 이곳에 살지 않아요. 오빠를 잃어버렸어요.”
소녀는 여전히 훌쩍이면서도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는 투가 제법 똘똘해 보였다.
“말해줘서 고마워, 린. 이곳에 살지 않는다고? 오빠는 어쩌다가 잃어버렸는데?”
“전 시칠리아 사람이에요. 해변에서 놀다가 해적들에게 잡힌 저를 구하느라 오빠가 대신 잡혀 버렸어요. 으앙.”
오스칼이 눈을 크게 떴다. 시칠리아라면 라인하트 남쪽의 작은 섬나라였다.
“해적에게 잡혀 왔다고?”
“네, 해적들이 시칠리아를 습격해 친구들을 잡아갔어요.”
“그럼 그 해적들이 널 이곳에 데려온 거야?”
오스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소녀가 고수머리가 달랑거릴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애꾸눈 미친 참새’였어요!”
뭐, 뭔 참새? 생경한 단어에 오스칼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냥 둘 수는 없는 문제였다. 감히 라인하트의 칼릭스 영지에서 해적들이 인신매매를 일삼다니!
“저기… 린! 일단 아이스크림이 녹을지도 모르니까. 나랑 같이 가는 게 어때?”
오스칼이 린의 손을 잡고 골목 밖으로 이끌었다.
***
기나긴 줄을 뚫고 초콜릿 맛, 바닐라 맛, 레몬 맛, 딸기 맛의 아이스크림을 쟁취해낸 서던은, 갑자기 늘어난 입에 어리둥절한 눈을 했다.
분명 한 사람당 두 가지 맛을 고를 수 있게 가져왔는데도 결국 두 가지 맛을 먹게 된 이는 세 사람 중 린뿐이었다.
린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벌써 해치우고, 이제 딸기 아이스크림을 입가에 잔뜩 묻혀가며 먹고 있었다. 린은 아이스크림을 삼키는 중간중간마다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
“애꾸눈 미친 참새는 몹시 나쁜 해적이에요. 마을에 들어와서 집을 부수거나 물건을 훔쳐 가는데, 어린아이들도 잡아가요!”
“확실히, 이 아이의 말이 사실이긴 합니다. 시칠리아와 인접한 카디브해의 해적은 대대로 악명이 높지요. 애꾸눈 미친 참새가 최근 가장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른다고도 하고요.”
서던이 미간을 찌푸렸다. 국경을 넘나들며 범죄를 저지르는 해적들은 각국의 해안 도시에 큰 골칫거리였다. 워낙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다 보니, 관할 영지도 어정쩡해 통제할 기관도 마땅치 않은 터였다.
오스칼이 린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너와 네 오빠가 그 미친 참새에게 잡힌 거라고?”
“해적들이 우리 마을을 습격하고 냄새나는 아저씨가 절 잡았어요. 제가 소리를 지르니까 달려온 오빠가 절 따라 해적들의 배에 몰래 탔는데….”
“그런데?”
“배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오빠가 절 데리고 배에서 내리려는 해적과 싸웠어요. 저는 오빠가 해적들을 상대하는 동안 도망쳤는데, 오빠는 그만 붙잡혀 버리고 말았어요.”
“붙잡힌 오빠는 어떻게 됐어?”
“모르겠어요. 으앙!”
린이 울먹였다. 오스칼이 난감한 눈으로 서던을 올려다보았다. 서던이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자들은 노예 매매를 하려는 겁니다. 각국의 어린아이를 잡아 다른 나라에 팔아버리는 거지요. 라인하트에선 노예매매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해적들이 이곳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흠.”
오스칼이 언짢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불법으로 인신매매를 일삼던 이교도들이 소탕되자마자, 해적들이 활개를 치다니.
“그럼 지금 해적들이 이스키아를 돌아다닌다는 소린가요?”
“아마 일반 무역선으로 위장했을 겁니다. 대개 해적선은 도시에 정박해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고 떠나지요. 들킬 위험성 때문에 오래 머무르진 않을 겁니다.”
“린, 혹시, 네가 타고 온 배가 뭐였는지 기억나?”
“무서워서 눈을 꼭 감고 있었고, 오빠가 뒤돌아보지 말고 뛰라고 해서 못 봤어요.”
린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오스칼이 괜찮다는 듯 소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게 오늘 있었던 일인 거지?”
“네에…. 제가 달려 나왔을 때 시계탑의 종소리가 울렸어요.”
“오빠 이름이 뭐야?”
“진이에요.”
오스칼이 광장의 시계탑을 흘긋 바라보았다. 광장을 둘러볼 때, 시계탑의 종소리는 정오에 울렸다. 어느덧 짧은 시곗바늘은 ‘3’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보였다.
“서던 경, 린을 이스키아의 믿을 만한 안전한 곳에 데려가서 보호를 부탁해요. 전 잠깐 어딜 좀 들러야겠어요. 우린 정확히 1시간 뒤에 광장 분수대 앞에서 만나요.”
“예? 네, 알겠습니다.”
서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프릴이 달린 소매를 걷어 올리고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오스칼의 눈이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