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4화
“공작부인이 아니라 기사로 남는다는 말이 그 말 아닌가? 왜, 공작부인으로는 성에 차지 않나? 왕비라도 되려고?”
“뭐?”
터무니없는 소리에 오스칼이 입을 딱 벌렸다. 레오 역시 말을 내뱉고 나서야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 오스칼이 새된 소리를 냈다.
“너, 지금까지 계속 에렌과 나 사이를 그렇게 생각해 온 거야?”
“방금 말은…. 그런 게 아니….”
당황해 변명하려던 레오가 문득 눈을 치켜떴다.
“잠깐, 너야말로 아직까지 국왕 폐하를 이름으로 부르는군?”
“지금 그게 중요해?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화가 나서 말이 헛나온 거야!”
“그러고 보니 넌 그 은발 자식과도 계속 친구로 지내잖나? 정말 불쾌해.”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버린 대화는 옥신각신 다툼으로 번졌다. 결국, 두 사람은 넓은 침대의 양 끄트머리에 등을 돌리고 눕는 것으로 첫 번째 부부싸움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
오스칼은 밤새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였다. 긴 여정에 피곤했던 탓인지 새벽녘에 어설프게 살풋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니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침대 반대편을 바라보니 텅 비어있었다. 오스칼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앉아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바보, 멍청이. 대체 난 왜 그런 말을 지껄인 거야?”
오스칼은 스스로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곳을 떠나있는 동안 레오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껴 놓고선.
“정말 레오가 내게 질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오스칼이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서글픈 눈으로 레오의 빈자리를 바라보던 오스칼이, 네글리제 밖으로 느껴지는 새벽녘의 냉기에 흠칫 몸을 떨었다.
“머무시는 동안 이스키아 성의 자랑인 온천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어깨에 한기가 돌자, 문득 어제 성의 사용인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이불 밖으로 발끝을 내밀고 침대에서 빠져나온 오스칼이 가벼운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폭신한 가운을 걸쳤다.
“다시 잠들긴 틀린 것 같으니…. 온천에서 몸이나 풀까.”
주섬주섬 필요한 물건을 챙겨 손에 꼭 움켜쥔 오스칼이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왔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비앙카를 깨우기가 미안한 탓이었다. 동이 트기 전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성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온천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치스러운 지난 영주의 취향이 듬뿍 반영되었던지, 황금으로 칠해진 문은 눈에 금방 띄었다.
“우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별세계가 펼쳐졌다. 증기로 뿌옇게 흐린 온천실은 몽환적인 분위기가 났다.
한쪽 벽엔 아치형 창문을 잔뜩 냈고, 곳곳은 솜씨 좋은 장인이 깎아 만든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창문에 딸린 테라스에는 온갖 아름다운 식물이 심어져 실내지만 마치 야외에 있는 기분이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커다란 욕조는 로마 시대의 황제들이 사용할 것같이 화려했는데, 코발트 빛깔의 온천수로 가득 채워져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쨍한 빛깔의 이국적인 꽃이 둥둥 떠 있어 정말 휴양지라도 온 것 같았다.
입고 온 옷을 잘 개어 한쪽에 둔 오스칼이 욕조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온천수의 빛깔이 어찌나 선명한지, 물 안에 있는 제 몸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미끈거리는 온천수가 몸에 닿자 나른한 기분이 밀려왔다. 온천수 자체에서 나는 향인지, 욕조에 풀어둔 향유 때문인지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욕조의 한쪽 벽에 조각된 늠름한 사자의 입에서 푸른빛의 물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어깨까지 몸을 담근 오스칼이 보송한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다.
달칵-
뜻밖에 문이 열리는 소리에 오스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온천실은 공작 부부만 쓸 수 있다고 했는데?!
오스칼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문과 욕조 사이에 설치된 벽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스칼이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나, 옷을 입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커다란 인영이 걸어 나왔다.
“흡.”
오스칼이 숨을 삼키고 눈을 깜빡였다. 뿌연 수증기 사이로, 아랫도리에 기다란 수건을 두른 탄탄한 몸이 보였다. 여기저기 희미한 상처가 남아 있는 근육질의 가슴과 두툼한 팔뚝이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아 도드라져 보였다.
“오, 오스칼?”
하얀 어깨를 드러내고 욕조에 몸을 담근 오스칼의 모습을 발견한 레오가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짙은 온천수의 색깔 때문에 물 안이 들여다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오스칼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게다가 자신이 수건 한 장만을 달랑 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의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꿀꺽-
졸졸 흐르는 물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공간에서, 오스칼이 목 뒤로 침을 넘기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울려 퍼졌다. 당황해 얼굴이 빨개진 오스칼이 물 안으로 목까지 완전히 가라앉힌 채, 얼굴만 물 위로 동동 내어놓았다.
“아, 그… 일찍 눈이 떠져서….”
오스칼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레오는 한 손으로는 허리에 두른 수건을 단단히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께를 가린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난 새벽 운동을 하고…. 이스키아 자작이 어제 만찬에서 온천에 꼭 한번 가보라던 게 생각이 나서. 네가 있는 줄 모, 몰랐군. 그럼 나, 나갈 테니 천천히….”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모른 채 레오가 말을 더듬었다. 그가 황급히 뒤돌아 나가려는데, 오스칼이 수면 밖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쥐어짜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오, 온 김에 가, 같이…. 몸이라도 담그고… 가.”
오스칼은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어젯밤의 다툼으로 어색해진 레오인데, 이대로 그를 돌려보내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를 돌려세웠다.
“어…어? 뭐?”
레오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눈을 끔뻑였다. 보기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은 그는 땀을 뻘뻘 흘렸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긴 좀 그렇잖아…. 운동하느라 따, 땀도 난 것 같고….”
“괘…괜찮겠나.”
연신 혓바닥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던 레오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괜찮아. 부…부부니까….”
제 입으로 말을 내뱉고도 민망해 오스칼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결심한 듯 마른침을 삼킨 레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쪽 벽에 걸려있는 가운을 집어 들어 몸에 걸치고는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오스칼도 쭈뼛쭈뼛 팔을 뻗어 욕조 옆에 올려둔 커다란 수건을 조심스럽게 몸에 둘렀다.
두세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멋쩍은 듯 다른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스칼이 흘끔 레오를 바라보았다. 욕조의 깊이는 그의 허리를 살짝 넘는 정도였다. 짙은 코발트색 물빛 욕탕 물 덕에 허리 아래까지 들여다보이지 않았으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사이로 보이는 레오의 떡 벌어진 가슴 근육과 살짝 젖은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얼굴이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아직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레오가 욕조 바깥에 세워진 여신상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아…. 일어났는데 네가 없어서…. 어쩔까 하다가…. 어제 성의 사용인이 이곳에 와보라고 했었거든.”
“어, 음. 조…좋은 곳인 것 같군. 이런 곳을 지으려면 얼마나 필요한가…. 고급 투구 1000개쯤의 가격은 되려나. 크흠.”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레오는 아무 말이나 해댔다. 이렇게 당황한 레오는 처음인 것 같았다.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올 같아 꾹 참으며 오스칼이 살며시 입을 열었다.
“어젠…. 정말 미안해. 혼자 의기소침해져서 괜히 네게 투정을 부린 것 같아.”
물에 목 끝까지 집어넣은 오스칼이 수면 아래에서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나야말로… 어른스럽지 못하게 꼴사나운 말을 한 것 같군.”
창피하다는 듯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그가 창문 밖의 꽃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오스칼을 닮은 분홍색의 앙증맞은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공작부인이 싫다는 게 아니었어. 난 네가 없인 결코 행복해질 수 없거든. 내가 네 곁에서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게 노력할게.”
오스칼이 동그란 눈으로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막 떠오른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이치자, 녹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레오가 오스칼의 눈을 천천히 응시했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한걸음 정도로 좁혀져 있었다.
“난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얼마 전까진 네가 사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뭐?”
오스칼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오스칼의 어깨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 모습에 레오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크흠. 네가 사내든,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사람이든, 내겐 중요하지 않아. 너라는 존재가 내겐 전부니까. 그러니까 네가 내게 도움이 못 된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마.”
그 말에 오스칼의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오스칼이 머뭇거리다 작게 속삭였다.
“나, 나도….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내가 가진 걸 전부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수줍어 눈을 내리깔았던 오스칼이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레오가 눈앞에 있었다.
살짝 벌어진 가운 사이로 보이는 레오의 맨가슴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레오의 심장에서도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온천물에 달구어진 레오의 손이 오스칼의 뺨을 쥐었다. 몸이 후끈거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살짝 스치는 젖은 살결이 아찔했다.
숨 막히는 긴장감 때문인지, 뜨거운 수증기 때문인지 현기증이 일었다. 휘청이는 오스칼을 레오가 물속에서 받아냈다. 그러자, 도톰한 수건 한 장으로 감싼 오스칼의 몸이 느껴졌다.
오스칼의 귓가에 레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방으로 돌아갈까.”
붉어진 뺨으로 오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
잔뜩 달아오른 볼과 젖은 머리칼로 귀빈실로 향하던 두 사람 앞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이스키아 자작이었다. 이미 말쑥한 차림을 한 자작은 귀빈실 문 앞에서 마주친 공작 내외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공작 전하, 비전하. 일찍 일어나셨군요.”
느닷없이 나타난 불청객에 레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이내 그는 평정심을 찾은 목소리로 짤막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얼른 자작이 이 복도를 떠나주기를 바라면서.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아침 식사를 준비했으니 바로 함께하시지요. 식사가 끝나면 이스키아의 기사가 두 분께서 영지를 둘러보실 수 있도록 안내해드릴 겁니다.”
자작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그 웃음에 레오가 부글부글 끓는 마음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젠장, 드디어 찾아온 둘만의 시간이었는데.
“준비하는 대로…. 나가겠습니다, 자작.”
꽉 다문 레오의 잇새로 겨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눈은 마치 불꽃이라도 내뿜는 것처럼 사나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