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1화
오스칼이 5분 정도 정신을 잃고 쓰러진 자그마한 소동을 제외하면, 칼릭스 공작의 결혼식 행사는 모두 무사히 끝났다. 격식 있는 행사가 끝나자 결혼식장은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로잘린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9가지 코스 요리와 질 좋은 포도주가 바닥날 때 즈음, 분위기가 무르익은 뒤풀이 장소에선 노이어의 위스키가 돌았다.
고상한 곡을 연주하던 악단은 어느새 흥겨운 가락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춤판이 벌어졌다.
공작가의 주방장들은 코스 요리를 다 먹어치우고도 여전히 먹을 것을 갈구하는 이들을 위해 정원 한편에서 통나무를 쌓아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즉석에서 커다란 통돼지와 칠면조를 구워내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노릇노릇한 고기 살점을 안주 삼아 위스키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이야, 노이어 위스키도 오랜만이네요.”
“솔직히 노이어의 승전 연회에서 이걸 마실 땐…. 이 위스키를 다시 마시게 될 날이 공작님과 형님…. 아니 누님의 결혼식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
기욤과 드미트리가 벌겋게 달아오른 뺨으로 킬킬거렸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난 그날 뭔가 눈치챘었지.”
멋들어진 검은 슈트를 빼입은 마티스가 근엄한 표정으로 우쭐댔다. 왕실 근위대장이 된 이후 몰라보게 말쑥해진 그였다.
시몬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 솔직히 전 그날만 해도 공작님과 로잘린 영애가 잘되어가는 줄 알았지 뭡니까.”
“내가 레오 자식…. 아니, 공작 전하를 20년간 보아 왔지만 말이다. 내가 술에 취했을 땐 한번을 부축해 준 적이 없었다고! 오히려 주정뱅이라며 경멸의 눈빛만 보낸 녀석이었지. 그런데 오스칼…. 아니지, 공작부인께서 술에 취했을 때 직접 안아 들고 데려다줬잖냐!”
“이야…. 단원들을 배려하시느라 그런 줄 알았더니.”
“우리는 이용당한 거였군요.”
기사들이 테이블에 모여 앉아 옛 추억을 떠올리며 시끌벅적 잡담을 나누는 사이, 연한 핑크빛의 실크 드레스 소맷자락이 불쑥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탁-
커다란 나무잔이 흰 테이블보 위에 동그란 자국을 남기며 거칠게 놓였다.
“로, 로잘린 영애?”
이내 나무잔 안으로 꿀럭꿀럭 독한 위스키가 쏟아졌다. 곧, 벌꿀색 액체로 찰랑찰랑하게 채워진 컵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영애, 과음하시는 것 아닙니까?”
마티스가 안절부절못하며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코스 요리와 함께 벌써 포도주를 몇 병이나 마신 그녀였다.
“흥, 제가 이래 봬도 노이어 출신이라고요. 이깟 위스키는 오크통째 마셔도 끄떡없어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로잘린이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예쁘장한 크리스털 와인잔으로 마신 포도주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티스가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술을 섞어 마시는 건 좋지 않은데….”
“오늘 같은 날은 취하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휴, 오스칼이 레오나르도 공작과 결혼을 하는 날이 오다니!”
술잔에 위스키를 따라 단숨에 비워버린 로잘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레오폴드….”
마티스의 자그마한 목소리는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언제 오스칼을 꾀어낸 건지! 교활한 작자 같으니!”
로잘린이 콧김을 뿜으며 연거푸 커다란 컵으로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의연한 척하려 해도, 오스칼의 결혼 소식에 심란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마티스가 로잘린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공작님은 좋은 분이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렇겠죠. 그러니까 오늘 기사님들이 저와 함께 술을 마셔주셔야겠어요!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말이에요.”
정신을 차리듯 바짝 기합을 넣은 로잘린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의 등 뒤로, 사용인들이 위스키 오크통을 짊어지고 기사들의 테이블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으아,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어.”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오스칼이 공작저의 부부침실에 놓인 푹신한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웠다. 소파 앞에 놓인 낮은 테이블 위에는 결혼 연회에 나온 요리들과 과일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종일 구두를 신고 돌아다녀서 힘들었겠군.”
“드레스도 엄청 불편했다고!”
편한 실내복 차림에 가운을 걸친 레오가 오스칼의 발치에 앉아, 오스칼의 부르튼 발을 주무르며 웃었다. 퉁퉁 부은 발을 레오에게 맡긴 채 나른한 표정을 짓던 오스칼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배가 고파 죽겠어. 솔직히 아깐 하마터면 이성을 잃고 통돼지 구이로 달려들 뻔했다니까? 내 결혼식에선 밥을 먹을 시간이 없다는 걸 처음 알았어.”
접시에서 닭 다리를 집어 든 오스칼이 입을 우물거렸다.
“고생했어.”
레오가 은 포크를 들어 그새 비어버린 오스칼의 입에 탐스러운 청포도 한 알을 쏙 넣어주며 대답했다. 입안에서 탁 터지는 새콤달콤한 맛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오스칼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은 아직까지 시끌벅적했다.
“우리가 먼저 들어와도 되는 거겠지? 돌아오기 전까지도 로즈가 기사단 녀석들에게 술을 엄청나게 먹이고 있던데. 역시 로즈는 대단해. 제라드는 벌써 한참 전에 고주망태가 되어서 업혀 나갔더라고.”
설탕 과자 세 개를 입안에 단숨에 털어 넣은 오스칼이 킬킬거렸다. 졸지에 로잘린과 대작을 하게 된 기사들은 마티스와 드미트리 정도를 빼놓곤 모두 나가떨어진 참이었다. 로잘린이야말로 어마어마한 주당이 틀림없었다.
“원래 결혼식은 주인공들이 사라지면 더 즐거운 법이지.”
레오가 미소를 띤 얼굴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오스칼은 어느새 몽롱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레오와 함께 있으니 바로 몇 시간 전까지 현실 세계에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심이 되었다.
오스칼이 편안한 얼굴로 아늑하게 꾸며진 침실을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봄을 연상하게 하는 푸른색의 커튼이 커다란 창을 장식한, 우아한 가구들이 세련되게 배치된 공간이었다.
침실 한가운데에 놓인 침대에는 하늘하늘한 캐노피가 드리워지고, 폭신하고 새하얀 거위 털 침구가 놓여있어 보기만 해도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커다란 떡갈나무 침대에 조각된 공작가의 문양을 바라보며 오스칼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공작저에서 자는 건 오늘이 처음이네.”
마치 처음 방문한 야영지를 두고 말하는 듯한 대수롭지 않은 오스칼의 목소리에 레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크흠. 그, 그렇다기보다 오늘은….”
그가 뒷말을 내뱉기 위해선 조금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듯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처, 첫날밤이니까.”
레오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꿈틀거렸다. 그가 어물어물 시선을 돌려 벽에 걸린 값비싼 유화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부끄러운 눈치였다. 오스칼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레오는 차마 유화 그림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침만 삼켰다. 그가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 그럼… 함께 침대로….”
“….”
“오, 오스칼?”
레오가 허망한 얼굴로 대답 없는 오스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노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새 잠든 모양이었다. 깊은 잠에 빠진 듯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평온했다.
얕게 한숨을 내쉰 레오가 피식 웃었다. 오스칼을 번쩍 안아 든 레오가 조심스럽게 잠든 몸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는, 보드라운 이불로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우웅. 레오…. 떠나면 안 돼….”
“초야에 남편을 혼자 두고 꿈나라로 떠난 아내가 할 소린가.”
레오가 잠꼬대하는 오스칼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살짝 꼬집고는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가운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둔 레오가 바스락대며 빳빳한 새 침구 안으로 몸을 밀어 넣자, 오스칼이 꼬물거리며 그의 가슴에 몸을 붙였다.
“윽.”
얇은 실내복 덕분에 몸 너머로 여실히 느껴지는 오스칼의 여체에 레오가 잇새로 작은 신음을 뱉었다.
야영지에서 오스칼과 한 공간에서 잠을 청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의 가슴에 바짝 기댄 오스칼의 머리칼에서 바닐라 향이 훅 끼쳤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제길, 고문이 따로 없군.”
레오의 품이 편안한지 오스칼은 더욱 깊숙하게 그의 팔과 가슴으로 안겨들었다. 레오는 오스칼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반대쪽 팔을 들어 제 이마에 얹었다.
레오는 어제까지 이어진 격무와 오늘 내내 있었던 결혼식 행사에도 지치지도 않는 그의 괴물 같은 체력을 원망했다. 아무리 잠을 청하려 해도 솟아오른 기운은 도무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투구 하나, 투구 둘, 투구 셋, 투구 넷….’
레오가 마음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결국, 그는 머릿속으로 삼천스물일곱 개의 투구를 만들어내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
축제의 분위기가 가시고, 평온을 되찾은 공작저는 이른 아침부터 공작 부부의 신혼여행 배웅으로 분주했다. 두 사람은 칼릭스 공작령을 순회하는 것을 신혼여행으로 삼기로 했다. 레오가 공작위를 이은 후, 흩어졌던 가신을 모으고 공작령의 소영주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아직 방문하지 못한 영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눈 아래가 조금은 거뭇해진 레오와는 달리, 오스칼은 그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마님, 어제 잠은 잘 주무셨나요?”
공작저의 하녀장, 마사 부인이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래전, 칼릭스 공작가의 어린 하녀로 일했던 그녀는 공작가의 복권과 함께 다시 돌아오기를 청했다고 했다. 성실하고 꼼꼼한 마사 부인은 공작가의 재건에 톡톡히 역할을 한 노련한 하녀였다.
마사가 특별히 고른 어린 하녀 두 사람이 오스칼의 몸단장을 도왔다. 극진한 시중이 어색한 듯 때때로 어색한 얼굴을 하면서도, 오스칼은 마사 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명랑하게 대답했다.
“아주 좋았어요. 특히 침대가 대활약을 했죠.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 좋던데요.”
오스칼이 흐뭇한 표정으로 구름같이 폭신했던 침대와 침구를 떠올렸다. 그러나 어딘가 다른 의미로 전달된 것인지, 마사 부인이 낯을 붉혔다.
“흠흠. 그, 그러셨군요. 여행을 위한 마님의 짐은 잘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민망한 듯 자리를 비우는 마사 부인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린 오스칼이 거울에 제 몸을 비춰보았다.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만든 연푸른색 외출복이었다. 연회용 드레스처럼 장식이 많이 달리거나 화려한 것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우아한 차림이었다.
“이제 앞으로 공작부인으로 지내려면, 이런 차림에 익숙해져야겠지?”
짧게 한숨을 내쉰 오스칼이 마사 부인이 싸둔 짐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레오로부터 결혼 선물로 받은 검을 슬쩍 짐 사이에 쑤셔 넣었다.
“이 옷을 입고는 제대로 휘두르기도 어렵겠지만. 혹시 모르잖아.”
오스칼이 나풀거리는 풍성한 치맛단을 들어 올리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