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움직였다.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이마 위로 지독하게 익숙한 하얀 빛이 쏟아져 내렸다. 하얀 천장에 매달린 기다란 형광등이 뿜어내는 인공적인 빛.
리나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워 손을 들여다보았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굳은살이 잔뜩 있는 노란빛이 도는 손.
느리게 눈을 깜빡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대식으로 꾸며진 깔끔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던 파리의 올림픽 선수단 숙소 안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국어가 생경해, 순간 입을 다물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되지 않는 현실에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누워있던 푹신한 매트리스를 손으로 더듬자,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화면이 꺼진 스마트폰이었다.
일 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이건만, 손가락은 익숙하게 스마트폰 화면을 잠금 해제했다.
반짝, 켜진 스마트폰의 화면 위로 포털 사이트 메인 창의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펜싱 여제 탄생! 고리나 파리 올림픽 펜싱 사브르 개인전, 단체전 2관왕!]
그제야 허겁지겁 스마트폰 상단의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꿀꺽,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은지가 파리 관광을 나간다고 떠난 지 불과 두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리나의 검은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설마… 그 모든 게 꿈이었다고?”
두 시간 동안 꾼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한 일 년의 시간. 리나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얼굴을 쓸었다. 뭐가 뭔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았다.
띠링-
스마트폰의 푸시 알림 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리나가 무의식중에 화면에 떠오른 알림을 확인했다.
[(광고) 소설 〈여기사 오스칼〉 외전 출시기념, 감상하면 100캐시 즉시 지급!]
눈앞의 문장에 리나의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리나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메일함을 클릭했다. 그리고 두 시간 전 수신 완료된 이메일을 열었다.
[수신메일 : 독자님, 세계 최고의 검사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여스칼〉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독자님이 저보다 제 작품을 더 잘 아실 것 같아요. 독자님 성원에 힘입어 오래전부터 외전도 출간해 보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뜻대로 잘 안되네요.]
이 이메일을 받은 게 고작 두 시간 전인데, 벌써 외전이 출시되었다고?
스마트폰 상단의 푸시 버튼을 눌러 웹소설 플랫폼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한 리나가 다급하게 〈여기사 오스칼〉 외전을 읽어 내려갔다.
“마, 말도 안 돼.”
믿기 어려운 현실에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레오, 에렌, 클로드, 로잘린…. 그리고 여기사 오스칼. 그곳엔 그녀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있었다.
***
벼락같이 돌아온 현실은,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리나는 며칠 동안 멍한 상태로 보냈다.
리나의 주변인들은 그간 올림픽을 준비하며 쌓인 긴장감과 피로가 터져 번아웃이 온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사 오스칼〉의 외전은 망작으로 조용히 묻혔던 본편과는 달리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 줌 독자로 유지되던 소설이, 몇 주째 플랫폼 랭킹 상단에 제목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현실 같지 않았다.
그녀가 살았던 1년의 세월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스마트폰 화면의 활자로만 남아 있었다. 리나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뭐라도 해보려 안간힘을 썼다.
소설 속의 그 사람들이 보고 싶어 처음에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밤새 소설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제 기억을 읽는 것처럼, 소설을 읽을수록 기억이, 그리고 레오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가슴이 꽉 막힌 듯 힘들고, 눈물이 났다. 밥도 넘어가질 않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차라리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편이 나았을 텐데.
자신의 기억이 기록된 글자들은 날카롭게 마음을 베었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것을 멈추었다.
작가에게 이메일도 보냈다. 그동안 줄곧 팬레터를 보냈던 이메일 주소로 몇 번이고 이메일을 보냈지만, 존재하지 않는 메일 주소라는 에러 메시지만 돌아왔다.
소설을 발간한 출판사를 찾아가 보아도, 작가의 정보를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작가에게 악플을 달아 고소라도 당하면 만날 수 있을까, 급기야 〈여기사 오스칼 외전〉에 악플도 달았다.
독자의 아이디어를 먹튀 하고 사라진 작가라고 비난하고, 작가 양친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활동 중지된 웹소설 플랫폼 계정뿐이었다.
결국, 리나는 아예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살기로 했다.
올림픽 이후 잔뜩 밀려있던 인터뷰를 하고,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서 깔깔거렸다. 올림픽 스타 ‘고리나’에게 쏟아지는 관심 덕에 정신없이 흘러가는 날들이 그럭저럭 그녀를 버티게 해주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리나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훈련을 받고, 연습하는 펜싱선수 ‘고리나’의 삶이.
“와. 고리나! 폼 장난 아닌데? 전보다 더 빨라졌어. 하여튼 누가 ‘고라니’ 아니랄까 봐.”
“으아. 힘들어! 코치님, 쟤 요즘 녹용이라도 먹나 봐요. 야생 고라니 같던 애가 전투 고라니 됐어요.”
“으하하, 네가 녹용 먹으면 동족상잔 아니냐?”
리나와 은지의 연습경기를 지켜보던 전담 코치가 우스갯소리를 내뱉으며 혀를 내둘렀다.
마치 정말 목숨을 걸고 싸우는 듯한 리나의 예리한 검술에, 그녀의 연습 상대를 하던 은지가 나자빠져 헉헉대고 있었다.
“와. 리나 선배 찌르기 무시무시한데요?”
“저걸 어떻게 막아. 하여튼 괴물이야.”
“올림픽 끝난 지 몇 주나 됐다고…. 저게 몇 주 만에 올릴 수 있는 기량이야?”
경기를 관전하던 동료 선수들도 한마디씩 칭찬을 보탰다. 그들은 겨우 몇 주 사이에 더 강해진 리나의 검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칭찬에도 리나는 검 자루를 꽉 말아쥘 뿐이었다. 그녀에겐 몇 주가 아니었다. 라인하트에서 보낸 1년의 시간이 떠오르자 울컥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전장의 적이 규칙에 따라 고상하게 공격해 올 거라고 생각하나? 실전 경험은 별로 없나 보군.”
아무리 잊으려 애써도 기억 속에 선명히 새겨진 레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와 함께 보내며 훈련하고 익혔던 검은, 전장의 기술이었다. 보호장구를 입고 규칙에 따라 정해진 시간 동안 경기장에서 휘두르는 검은, 이제 그녀에게 너무 쉬웠다.
“수고하셨습니다.”
리나는 간신히 눈물을 참아내며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검술 칭찬에 헤헤 웃으며 좋아할 리나였다. 그녀가 덤덤하게 돌아서자 은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나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서울 하늘 아래를 터덜터덜 걸었다. 없었던 일로 치부하기엔, 그에 대한 모든 기억이 머릿속에서 반짝였다. 리나는 기억을 따라 정처 없이 헤맸다.
“이런데, 어떻게 없던 일로 하고 살라는 거야.”
리나가 하늘을 바라보며 엉엉 울었다. 이 지구상에서는 어디를 가도 레오를 볼 수 없을 테니까.
***
그렇게 레오가 없는 낮과 밤이 열 손가락을 모두 접고도, 한참 더 이어졌다.
펜싱 월드컵, 그랑프리, 세계선수권. 출전하는 국제 대회마다 리나는 착실히 메달을 추가했다.
올림픽 이후 짧은 시간 내에 빠르게 성장한 젊은 천재에게 언론은 연일 찬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뛰어난 성과 속에서도 리나는 행복하지 못했다.
경기장에서 기계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스스로가 진짜 같지 않았다. 분명 평생 검을 진심으로 대해왔었는데….
자신의 진심은 모두 ‘그곳’에 두고 온 것만 같았다.
오늘도 리나가 훈련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녀는 어두운 방 안에서 멍하니 침대에 누워 허공을 응시했다.
어느 순간부터, 쉬는 시간에도 웹소설을 읽지 않게 된 그녀였다. 눈을 감자 레오의 얼굴이 떠올랐다.
“멍청하긴.”
손등을 이마에 올린 리나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외전을 탈출할 조건이 곧, 주인공의 해피엔딩이리라는 그녀의 예상은 정답이었다. 바보같이 자신이 소설 속 주인공인 줄도 모르고.
소설에서 탈출하기 위해 애쓰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처음 레오를 만난 날부터 그를 이용해 소설을 탈출하려 했던 자신에 대한 벌일까?
잔인하게도 소설은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그 순간에 자신을 현실로 돌려보냈다.
분명 소설 속 오스칼은 꽉 닫힌 해피엔딩 속에서 행복한데, 왜 정작 나는 행복하지 않은지.
소설의 시간은 레오와 오스칼, 두 사람의 결혼식에서 영원히 머물러있었다. 리나의 시간도 그날 이후 고여 흐르지 않아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네가 없는 이곳에서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리나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확실히 알게 되었을 땐 이미 늦어버렸다. 행복이 메말라 버린 삶의 감각은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띠링-
그때, 곁에 둔 스마트폰에서 이메일 수신 알림음이 울렸다. 그 소리에 리나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지훈련 일정표인가.”
리나가 건조하게 알림 푸시를 눌렀다.
[수신메일 : 독자님…….]
기시감이 느껴지는 메시지에 리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순식간에 차갑게 식은 손가락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수신메일 : 독자님, 잘 지내고 계신 가요? 독자님 덕분에 제 소설이 히트작이 되었네요.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외전의 인기에 힘입어 〈여기사 오스칼〉의 특별 외전 출간 일정이 잡혔습니다.]
작가의 이메일에 리나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온몸의 세포가 하나 하나 날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 독자님,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익숙한 멘트에 리나가 눈을 크게 뜬 순간,
꽝-
귓가에 굉음이 들렸다. 아득해지는 의식 너머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스마트폰의 알람이 다시 울렸다.
띠링!
[수신메일 : 특별 외전은 독자님께서 만족하실 때까지 즐기시면 됩니다. 그동안 제게 힘이 되어주신 독자님께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
귀를 울렸던 폭음이 희미해졌다. 소스라치듯 눈을 번쩍 뜨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결혼식의 마지막 순서인 신랑·신부의 키스를 나누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모양이었다. 오스칼을 향해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오스칼! 괜찮나?”
버진로드 위로 쓰러진 오스칼의 허리를 안아 든 레오가 다급하게 물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로잘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오스칼의 손을 붙들었다.
“아휴, 오스칼이 갑자기 쓰러져서 어찌나 조마조마했던지. 고작 5분이지만 영원 같은 순간이었어요. 오스칼이 긴장해서 잠깐 현기증이 일었나 봐요.”
자신이 5분 동안 쓰러져있었다는 로잘린의 말에 오스칼이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깜빡였다.
걱정스럽게 그녀를 응시하는 레오의 검은 눈동자 위로,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오스칼의 눈가가 붉어졌다.
오스칼이 팔을 뻗어 레오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았다.
“레오,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
“오스칼…?”
영문을 알 수 없는 속삭임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레오가 부드럽게 오스칼을 품에 안았다. 걱정스럽던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오스칼이 레오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립고 그리웠던 그의 달큰한 체향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레오의 품에서 그의 온기가 온몸에 전해져왔다.
마침내 실감이 났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확실히 안다. 오스칼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돌아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세계, 나의 최애작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