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의식을 차린 제라드는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다.
그는 자신이 거의 석 달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으며, 그 사이에 단장님은 공작님이, 에렌은 국왕이 되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껏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오스칼 형님’이 사실은 ‘오스칼 누님’이었다는 점에 가장 놀랐다.
“혀, 형님이…. 여자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 다들 그랬어.”
제라드가 침대에 기대어 앉아 멍한 표정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저를 바라보는 뽀얀 얼굴과, 동글동글한 눈매 안에서 빛나는 녹색 눈동자는 제가 아는 오스칼 형님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깨까지 늘어뜨린 보드라운 갈색 머리칼, 여성의 몸에 맞게 주름 잡힌 흰 셔츠, 셔츠 아래로 펼쳐진 활동성 좋은 푸른 치맛자락을 보자 오스칼이 여자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공작님과 국왕 폐하께서는 형… 아니 누님이 여자라는 걸 알고 계셨던 겁니까?”
얼떨떨한 목소리였다. 오스칼이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 어색하게 웃었다.
“음…. 말하자면 길지만, 마지막 즈음에는. 맞아. 그랬어.”
“전 그런 줄도 모르고 국왕 폐하와 공작님…을 꼼짝없이 남색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뭐…?”
오스칼이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제라드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낮게 침음했다.
“사실 공작님과 형…. 아니 누님이 좋은 감정을 갖고 계신단 걸 눈치챘었습니다.”
놀란 오스칼을 향해 제라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역시 로맨스 소설 장인의 촉은 남다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넌 이제 앞으로 어쩔 거야? 네가 의식이 없는 동안 뤼미에르 기사단은 해산했지만, 칼릭스 기사단이나 근위대에 얼마든지 입단할 수 있어.”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기사 일은 그만두고 계속 글을 쓸까 싶기도 하고요. 사실 전 기사로서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요. 전투 중에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이고….”
제라드가 멋쩍게 웃었다. 어쩌면 이렇게 살아 있는 것조차 그에겐 기적이었다. 노이어에서도 오스칼이 없었다면 죽을 뻔했고.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면 돼! 하지만 분명한 건, 너만큼 훌륭한 기사도 없다는 거야. 네가 먼저 위험을 감지한 덕분에 본부의 습격에서도 다들 목숨을 건졌고, 네 몸을 던져 날 구했잖아. 정말 고마워. 넌 내게 누구보다 최고의 기사야.”
오스칼이 눈을 접어 활짝 웃었다. 제라드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내리쬐는 봄볕 탓인지, 오스칼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달콤한 바닐라 향이 봄바람에 실려 와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으아악!”
갑작스럽게 제라드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그의 양 뺨을 짝! 내리쳤다. 예고도 없이 내지른 그의 외침에 오스칼이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 깜짝이야. 너 왜 그래? 뭐 문제 있어?”
오스칼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제라드의 상처 부위를 살폈다.
“아니, 아니, 아닙니다. 형…. 아니 누님!”
제라드가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오스칼에게서 몸을 물려 떨어졌다. 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절대 말 못 해…. 누님의 웃는 얼굴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는 건! 신이시여, 결국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분명 그 언젠가 레오와 에렌이 남색가라 생각해, 그들이 자신과 사랑의 라이벌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안도해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었는데…!
제라드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의 가시밭길이 모두 끝난 봄. 다른 청년의 가시밭길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달이 없는 그믐밤, 뤼미에르 가옥의 응접실로 달빛이 들었다.
토끼 모양으로 빚은 도자기 컵이 차가운 인상을 가진 남자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코코아가 혀끝에 닿자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푸흡.”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광경에 오스칼이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웃음소리에 클로드가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왜 웃어?”
“아냐, 그 토끼 모양 컵이 당신이랑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럼 내게 선물로 주든지.”
클로드가 샐쭉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오스칼이 다시 한번 푸스스 웃었다.
“가져가. 선물로 줄게.”
“정말인가?”
클로드가 오스칼에게 선물을 받게 된 것이 기쁜 듯 보랏빛 눈을 빛냈다.
그는 이제 늦은 밤 오스칼의 침실로 찾아오지 않았지만, 종종 정식으로 오스칼의 초대를 받아 함께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그는 오스칼을 만나러 올 때면 은빛 바람을 일으키며 응접실에 나타났다. 그래도 오스칼은 클로드가 노크한 후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격식을 생략하는 정도는 눈감아 주기로 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업무를 마친 레오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우아한 검은 벨벳 정장에 백금으로 만든 단추가 달린 정복 차림이었다. 머리 모양이며 옷매무새에서 평소보다 꽤 신경을 쓴 기색이 역력했다.
레오가 눈 앞에 펼쳐진 단란한 광경에 도끼눈을 뜨고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네 녀석이 왜 여기 와있는 거지? 내가 한 번만 더 이 집에 들어오면 널….”
“클로드는 내 손님으로 온 거야. 이제 이 집에 사는 사람은 나란 걸 잊었어?”
오스칼이 레오의 말을 싹둑 잘랐다. 클로드가 약 올리듯 싱긋 웃었다.
“들으셨죠, 칼릭스 공작 전하?”
“흥.”
레오가 나지막이 불평을 내뱉으며, 테이블 의자를 빼내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클로드 앞에 놓인 코코아 잔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저거 오스칼이 아끼는 컵인데.
레오의 심통 난 표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오스칼이 클로드에게 다정하게 물음을 건넸다.
“당신은 이제 어쩔 셈이야? 샤무아도 완전히 그만뒀다면서?”
“응. 당분간 과거에 저지른 나쁜 일들을 정리하며 세상을 돌아다녀 볼 생각이야.”
클로드가 웃으며 그의 은발을 스르르 쓸어넘겼다. 못마땅한 듯 팔짱을 끼고 있던 레오가 입을 열었다.
“작위는 왜 거절한 건가? 국왕 폐하께서 자네에게 영지와 작위를 제안하신 것으로 아는데. 사람은 미워해도 공은 미워하지 말자고 하셨지.”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게 원래의 문장 아니었어?”
어딘가 묘하게 이상한 문장에 오스칼이 의문을 제기했다.
에렌은 잔느를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클로드에게 그가 살던 샤르트르 지역의 영토와 백작위를 제안했다. 먼 옛날, 클로드가 파괴해 버린 도시를 스스로 재건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배려였다.
“흑마법으로 오염된 샤르트르의 땅을 정화하는 덴 힘을 보탤 생각이야. 하지만 작위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래도…. 백작위라는데, 받지 그랬어.”
건조한 투로 말하는 클로드를 향해 오스칼이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클로드가 한껏 눈을 접어 웃으며 살랑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전에도 말했지만, 다른 자들이 원하는 건 고작 작위 따위일지 모르지만, 내가 원하는 건 바로 당신….”
스릉-
클로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이 레오의 허리춤에서 뽑혀 나왔다. 오스칼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레오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 참! 넌 흥분하면 검을 들이대는 버릇 좀 고쳐! 이 사람은 저주에 갇힌 채 오래 살아서 사회성과 언어 구사에 문제가 있다고 몇 번을 얘기해?”
“공작님께선 500년간 저주에 속박되어 있던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신가 봅니다. 왕국의 공작이 선량한 일개 시민에게 이렇게 칼을 들이대다니…. 당신이 공작님 좀 말려줘.”
클로드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분명 레오를 놀리는 듯한 태도였다.
“늑대 같던 놈이, 그새 여우가 되셨군.”
레오가 얄밉다는 듯 투덜거리며 검을 제자리에 넣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스칼이 그 모습을 킬킬거리며 지켜보았다. 클로드의 보랏빛 눈동자가 물끄러미 오스칼을 향했다.
“이제 자유롭게 살며 여행이나 다니려고. 밤하늘도 자주 올려다보고 말이지.”
그 말에 오스칼이 환하게 웃었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다! 앞으로 당신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내가 행복하다면 전부 당신 덕분이야.”
클로드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끼 모양의 컵을 양손에 소중히 받쳐 든 그가 의자에 앉은 오스칼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래서…. 아마 당신 결혼식엔 못 갈 거 같아.”
“겨, 결혼식? 그게 무슨 말이야?”
귓가에 울리는 나른한 속삭임에 오스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모르는 결혼식이 있어?
오스칼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이, 클로드가 마지막 인사라도 하듯 오스칼의 뺨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가져다 댔다. 그 모습에 레오가 또다시 벌떡 일어나 검을 빼내 들었다.
그런 레오를 향해 새초롬히 눈을 흘긴 클로드는 오스칼을 향해 찡긋 한쪽 눈을 감아 윙크를 했다. 레오의 검이 허공을 가르기도 전에, 그는 순식간에 은빛 연기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젠장, 저 녀석 정말 마음에 안 들어. 호시탐탐 널 노리는 변태 같은 놈이라고!”
“너도 뭘 그렇게 일일이 흥분하고 그래? 내가 사랑하는 건 너인데.”
“윽.”
훅 들어온 오스칼의 고백에 말문이 막힌 레오의 뺨이 붉어졌다. 그 모습에 오스칼이 소리 내 웃었다.
“그나저나 클로드가 결혼식이란 말을 하던데, 대체 그게 무슨 말이지?”
오스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에 헛기침을 여러 번 내뱉은 레오가 오스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비장한 기세로 한쪽 무릎을 꿇고 오스칼 앞에 앉았다.
오스칼이 갑자기 제 앞에 무릎을 꿇은 레오를 두 눈을 느리게 깜빡여 내려다보았다. 그가 아름다운 검을 꺼내 들었다.
잘 벼려진 검이었다. 오스칼의 신체에 딱 알맞은 크기의 둔하지도, 가늘지도 않은 검. 오스칼의 검술에 꼭 맞는 모양이었다.
검집과 검자루에 촘촘하게 박혀 아름답게 검을 장식한 보석은 뤼미에르였다.
오스칼이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이건….”
“이래서 정보상 놈은 질색이야. 내가 이 검을 주문한 걸 알아챈 모양이더군.”
레오가 나직하게 불평을 했다. 하지만 오스칼은 그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찬란하게 빛을 내뿜는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반응에 레오가 뿌듯하게 웃었다. 오스칼만을 위해 그가 준비한 검이었다.
“넌 반지보다 검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닐 것 같아서.”
“레오…!”
오스칼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기쁨으로 눈을 반짝였다.
마침내 레오의 손에서 검을 받아든 오스칼이 화사하게 웃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연히, 검은 못 참지!
“그러니까, 오스칼. 나와 결혼해 주겠어?”
“좋아!”
오스칼이 밝게 웃었다. 흔쾌한 승낙에 레오의 입가에 사랑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단숨에 오스칼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웃음기 어린 입맞춤이 끝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