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봄 새싹을 닮은 눈동자가 살짝 열린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연둣빛 새순이 움트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온기가 담뿍 담긴 바람이 불어 들자, 하얀 리넨 커튼이 나풀거렸다. 보드라운 머리칼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연갈색 머리카락 위로 황금색 봄볕이 쏟아져 부서졌다.
오스칼이 라인하트에서 맞는 첫 번째 봄이었다.
침대 옆 나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오스칼이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창문으로 들이치는 빛이 눈부셨다. 그리고 마치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누운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제라드,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짧게 한숨을 쉰 오스칼이 제라드의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오스칼은 매일같이 제라드를 보러 시에나의 의원에 들렀다. 가끔 그곳에서 훌쩍이는 대공비와 로잘린을 마주쳐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제라드 녀석. 언제까지 누워있을 셈인지. 너한테 어리광을 부리는 게 틀림없어.”
등 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오스칼이 고개를 올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레오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칼릭스 공작가의 상징인 사자 문양이 수놓아진 똑 떨어진 남색 정복을 입은 채였다. 기품이 넘치는, 여전히 멋있는 모습이었다.
“치료사가 몸의 기능은 거의 회복되었다고 하니까, 분명 다음 주에는 깨어날 거야.”
“우리 기사단 녀석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딱 잘라 말하는 레오의 말에 오스칼이 살짝 미소지었다.
의식을 되찾지 못한 제라드를 볼 때마다 불안하게 일렁이던 가슴이, 레오의 말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오스칼을 위해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레오 역시, 전국에서 유능하다는 치료사를 수소문해 제라드를 부탁할 만큼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오늘은 일이 일찍 끝났나 보네?”
공작위를 정식으로 계승한 후, 가문의 일과 왕국의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레오였다. 해가 떠 있는 낮에는 그의 얼굴을 보는 일이 힘들 정도로.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혹시 네가 있나 싶어 들렀어.”
“칼릭스 공작님이 열심히 일하셔야 왕국이 평안해지죠.”
놀리는 듯한 오스칼의 말에 레오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제법 자라 어깨 위로 내려오는 오스칼의 여린 머리칼에선 언제나 바닐라 향이 났다.
“의원 앞에 마차를 불러둘 테니 그걸 타고 돌아가. 이따 밤에 들를게.”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눈썹을 찡그린 레오가 아쉬운 표정으로 병실 문을 나섰다. 아직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오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
“역시 이곳에 너 혼자 있는 건 너무 위험해.”
늦은 밤이 되어서야 업무를 마치고 오스칼을 찾아온 레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뤼미에르 가옥 응접실의 새로 산 매끈매끈한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있던 오스칼이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원래도 살던 곳인데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 게다가 네가 날 보호한답시고 문밖에 보초를 앞뒤로 둘씩이나 세워뒀잖아.”
다들 나보다 약할 것 같은 녀석인데. 오스칼이 짧게 혀를 찼다.
레오의 노력으로 25년간 방치되어 있던 칼릭스 공작저는 완벽하게 제 모습을 되찾았다. 레오는 공작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칼릭스 공작저에 머물러야 했다. 거처를 공작저로 옮긴 레오는 오스칼에게도 그와 함께 갈 것을 청했다.
그러나 오스칼은 이교도의 습격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뤼미에르를 깨끗하게 수리해 남기를 택했다. 뤼미에르 가옥은 원작 주인공이 아끼던 집이었으며, 오스칼에게도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스칼의 선택에 레오는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공작저에서 매일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그의 기대가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혼자 사는 오스칼을 위해 호위를 붙였다. 그래도 불안했던 그는 매일같이 업무가 끝나면 오스칼을 찾았다.
“그러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나와 함께 공작저에서 지내는 게 어떤가.”
“넌 계속 바쁘잖아. 나 말고도 신경 쓸 문제가 많은데, 나까지 공작저에 얹혀살며 널 괴롭히기 싫어.”
레오는 황폐해진 칼릭스 공작령을 재건하고, 왕궁의 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국왕이 된 에렌이 그를 국무대신으로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나와 떨어져 있는 게 더 신경이 쓰이는 일이란 걸 모르는 건가.”
레오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간 늘 같이 살았던 탓에, 오스칼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초조해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공작저에 있을 명분이 없잖아.”
“공작저의 주인인 내가 원하는 게 명분이지.”
“그래도 공작저에서 놀고먹을 순 없다고. 내가 다른 녀석들처럼 공작가 기사단에 입단한 것도 아니고, 공작가의 사용인이나 가족도…. 어… 음… 아니니까.”
레오의 말에 반박하다 아차, 싶어진 오스칼이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그 말에 레오가 눈썹을 치켜뜨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을 되찾은 레오는 곧장 오스칼에게 청혼했다. 아주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와 장미꽃다발을 들고. 언젠가 에렌이 오스칼에게 선물했던 것보다 두 배는 큰 꽃다발이었다.
하지만 오스칼은 제라드가 깨어날 때까지는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를 지키느라 여전히 잠들어 있는 제라드를 두고 결혼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내 청혼을 거절한 게 너면서… 이 예쁜 입으로 그런 말을 한다 이거지.”
짐짓 심통이 난 투로 불평을 늘어놓은 레오가 몸을 숙여 오스칼의 양 뺨을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오스칼의 입술에 포개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입맞춤에 숨이 막힌 나머지 오스칼이 레오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들겼다.
“그만, 흡. 그만!”
비로소 오스칼을 놓아준 레오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젖은 오스칼의 입술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 주었다.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다음 주까지 그 녀석이 깨어나지 않으면 강제로 일으켜서 연무장을 돌게 해야겠어.”
“분명 제라드는 일어날 거야. 아직 그 녀석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오스칼의 머리칼을 푸스스 흩어놓은 레오가 돌아갈 채비를 했다. 오스칼이 문가에 서서 그를 배웅했다.
“조심해서 가.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지? 바빠도 잘 챙겨 먹어야 해.”
오스칼이 조금 수척해진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쉬운 듯 고개를 푹 숙인 그가 오스칼의 한쪽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강아지처럼 뺨을 비볐다.
“돌아가기 싫군. 오늘 여기서 자고 갈까?”
칭얼거리는 듯한 레오의 목소리에 오스칼이 웃으며 제 어깨에 내려앉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공작님께서 공작저를 비우시면 안 되죠.”
단호한 오스칼의 지적에 한숨을 내쉰 레오가 양팔로 오스칼을 꽉 끌어안은 후 가옥을 떠났다. 혼자 남은 오스칼이 침대에 누워 옹이 자국이 도드라진 나무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공작 부인이라….”
외전의 남자 주인공 레오가 모든 것을 되찾았지만 자신은 현실로 돌아가지 못했다. 비로소 오스칼은 내내 외면하려고 애써왔던 사실을 떠올렸다.
〈빙의물의 아홉 번째 법칙. 빙의자들이 무슨 짓을 해도, 현실로 돌아갈 수 없다.〉
어쩌면 이 소설의 탈출 조건이 해피엔딩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애초부터 탈출 가능한 조건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보통 빙의물에 빙의된 주인공들은 결국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니까.
작가는 제게 보낸 이메일에서 손을 빌리겠다고 했지, 다시 현실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오스칼이 허공에 팔을 뻗어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처음 이곳에 빙의했을 땐 보드라운 귀족 영애의 손이었는데.
어느새 손가락 마디마디에 물집이 잡힌 자국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애쓴 흔적들을 보며 오스칼이 피식 웃었다.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라.’
어느새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게 많은 애정을 줘버렸다. 그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관여해버렸다. 그리고 태어나서 자신이 처음 사랑하게 된 남자 역시 이곳에 있다.
“하지만…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오스칼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던 순간을 떠올렸다. 현실의 가족들과 친구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오스칼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잊기 위해 손을 내려 눈을 감았다.
***
어김없이 제라드의 병실에 들른 오스칼은 그의 머리맡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 제라드가 마지막으로 쓴 소설이었다. 책장을 넘기며 무심코 내려다본 제라드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을 떠 그녀를 “형님!”이라고 부를 것처럼 평온했다.
“제라드. 얼른 일어나. 언제까지 주인공들을 이 페이지에 머무르게 할 거야? 게다가 하필 끊긴 부분이 고구마 구간이잖아.”
마지막 장을 넘긴 오스칼이 책을 덮고 침대 옆 작은 탁자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애틋한 눈으로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뒷이야기가 궁금하단 말이야. 분명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은 앙드레와 결혼해 아이도 낳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겠지?”
그때 제라드의 미간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 움직임에 오스칼의 눈이 커졌다. 굳게 닫혀있던 제라드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놀란 오스칼이 북받치는 목소리로 제라드를 불렀다.
“제, 제라드!”
“혀, 형님….”
바싹 마른 제라드의 입술에서 쉬어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반쯤 뜬 눈으로 오스칼을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응! 나 여기 있어!”
“혀, 형님…. 아, 아….”
“제라드! 아파? 무리해서 말할 필요 없어. 천천히 하면 돼. 치료사를 불러올게! 드디어 깨어났구나.”
다급하게 제라드의 상태를 확인하는 오스칼의 눈에 감격의 눈물이 차올랐다. 수척한 얼굴의 제라드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아, 앙드레는 서브예요…. 테리우스가 메인 남주…라고요…. 자, 잘못 잡으셨어요…. 남주….”
한참 만에 일어나서 한다는 말이! 오스칼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울 듯이 웃으며 소리쳤다.
“야 이 자식아. 어떻게 이런 서사에서 앙드레가 남주가 아닐 수가 있어? 앙드레 내놔! 앙드레 내놓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