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사, 사실… 내가 지금까지 모두를 속였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예? 형님이 저희를 속이다니요?”
청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오스칼이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 나 여자야. 그러니까, 레오와 나는 나, 남색가가 아니라고….”
폭탄 같은 오스칼의 발언이 끝나고, 기사단 청년들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오스칼은 살짝 실눈을 뜨고 청년들을 둘러보았다. 청년들은 당최 그들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치였다.
모두 오스칼의 말을 곱씹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여자라는 말에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오스칼이 초조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거짓말쟁이라고 화를 내면 어쩌지?
기사단 청년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이마에 붕대를 칭칭 감은 드미트리였다.
“하하하, 형님. 정말 끝내주는 농담이었습니다.”
“그래, 오스칼. 지금까지 네가 했던 말 중에 가장 웃겼어!”
마티스가 껄껄대며 오스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어?”
두 청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들 배를 잡고 크게 웃어댔다. 오스칼이 레오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이 민망해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형님. 그렇게까지 말씀 안 하셔도 저흰 편견 같은 거 없는 사람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기욤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오스칼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해 신나게 웃어대는 그들을 향해 레오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농담이 아니다. 오스칼은 여인이 맞아. 그동안 기사단 활동에 문제가 될까 봐 숨겨왔을 뿐이다. 너희들에게 지금껏 알리지 못한 건 미안하다.”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근엄한 단장의 발언에 청년들이 뚝 웃음을 그쳤다.
“에이. 서, 설마요.”
“한 합에 사내놈들 셋쯤은 거뜬하게 썰어버리는 형님이…. 여인이라고요?”
청년들의 표정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한 드미트리가 피가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한 번에 고기 두 사발은 너끈히 드시고, 수틀리면 그렇게 질펀한 욕을 하시던 오스칼 형님이 마드모아젤이라니 말이 됩니까?”
“야. 너 지금 돌려서 나 욕한 거야?”
오스칼이 눈을 부라렸다. 드미트리가 얼른 오스칼의 눈을 피했다.
아무래도 기사단의 청년들은 오스칼이 그들을 속여 왔다는 사실보다 오스칼이 여자라는 현실에 더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청년들은 지금까지의 오스칼의 행보를 분석하며, ‘오스칼 형님’은 도저히 여인일 수가 없다는 취지의 열띤 토론을 펼쳤다.
“전 반대예요! 오스칼 형님이 어떻게 마드모아젤입니까?”
“저도 마찬가지 의견입니다.”
터무니없는 찬반 토론이 펼쳐졌다. 반대 측의 수가 압도적이자 오스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왜 내 성별을 니들이 다수결로 정해?!”
레오는 오스칼의 곁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오스칼이 그를 향해 도끼눈을 떴다.
“크흠.”
슬쩍 오스칼의 눈치를 살핀 레오가 헛기침을 해 기사단 청년들을 집중시켰다. 어느덧 성안에는 붉은 노을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오늘은 다들 지쳤을 테니,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지. 모두 정말 잘해주었다.”
레오가 기사단을 향해 자랑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애정을 담아 오스칼을 내려다본 그가 오스칼의 손을 꼭 붙잡았다.
***
“이보시오! 우릴 좀 내보내 주시오.”
“바, 반역이 모두 진압된 거 아닙니까? 왜 우리를 계속 여기에 두는 거요?”
굳게 닫힌 연회장 문 안에서 불안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에렌의 지시에 따라 안락한 연회장으로 안내된, 아르투아가 건넨 양피지에 이름이 적힌 자들이었다. 에렌의 사병들은 그들을 연회장으로 데려간 뒤, 연회장의 문을 밖에서 굳게 잠갔다.
아르투아에게 매수된 관료와 사용인들은 여유 있게 차를 마시고 잡담을 나누며 일련의 일이 끝나길 기다렸다.
밖에서 위험한 전투가 벌어지거나, 지하 감옥으로 끌려간 인질이 처형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안전할 것이었다.
“역시 줄을 잘 서야 해.”
국왕의 서기관으로 일했던 체자레가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국왕에게 온갖 사치품을 사도록 권유하던 시종 역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그들의 여유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바깥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가 싶더니, 전투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도 연회장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에 하나둘 문 앞으로 모여들어 문을 두들겼다.
쾅쾅쾅-
“이제 바깥이 안전해진 것 같으니 당장 문을 열게!”
“대공 전하의 명이 있을 때까진 불가하오.”
“뭐? 이 건방진 놈! 내가 누군지 알고? 내가 직접 아르투아 대공 전하를 뵙겠네!”
체자레가 문틈으로 연회장 앞을 지키는 에렌의 사병을 향해 역정을 냈다. 사병이 그 호통 소리에 코웃음을 쳤다.
“내가 말하는 대공 전하는 에르네스트 대공 전하요.”
“뭐, 뭐라고…?”
“아르투아 대공 전하를 뵐 거면 지하 감옥으로 가셔야 할거요.”
그때, 단테와 사병을 뒤에 거느린 에렌이 연회장 앞에 나타났다. 에렌이 다가오자 문을 지키고 서 있던 사병이 예를 갖추었다. 고개를 까딱인 에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뇌물을 받고 국왕의 눈과 귀를 흐린 데다, 왕궁의 중요한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지.”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바깥에서 들리는 에렌의 준엄한 목소리에,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체자레의 음성이 갈라져 나왔다. 문 앞에 바짝 붙어선 체자레의 등 뒤로 혼란에 빠진 간신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 방 안의 자들이 모두 숙부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으니, 전부 지하 감옥에 처넣어.”
싸늘한 목소리로 지시한 에렌이 우아한 걸음을 옮겼다.
***
국왕이 있는 탑 아래에서, 에렌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탑 아래로 이교도와 근위대의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국왕의 안전을 건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에렌의 사병들 역시 모두 무사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 필사적으로 탑을 엄호한 덕분에 국왕은 안전한 모양이었다.
에렌이 무거운 기분으로 첨탑의 계단을 올랐다. 국왕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된 탓이었다.
“에, 에르네스트냐?”
첨탑의 좁은 방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앉아 있던 국왕이 인기척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먼저 설명해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국왕 앞에서 신하의 예를 갖추며 에렌이 눈을 내리깔았다. 에렌을 마주한 국왕이 침통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국왕은 그의 정신을 조종하던 마도구가 소멸하자, 흑마법의 세뇌에서 완전히 풀려났다. 이성을 되찾은 국왕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상황을 파악하고 몹시도 괴로워하던 터였다.
“너는…. 왜 무리해서 날 지켰느냐? 탑 아래에서 숙부가 보낸 자들이 날 죽이려 한 걸 알고 있다. 모른 척 날 죽게 내버려 뒀으면, 반역자인 숙부를 제거한 지금 네가 왕이 되었을 텐데.”
“폐하께서는…. 제 유일한 가족이지 않습니까. 하나뿐인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 나는 널 가족처럼 대해준 적이 없었는데.”
국왕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에렌이 설핏 쓰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저는 형님이 있어서 늘 좋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념을 잃으면 실망할 여인이 있어서요.”
에렌이 애틋한 눈으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못난 내가 널 질투하고 경계한 탓에… 왕좌에만 연연하느라 왕국은 돌보질 못했어.”
“사특한 힘에 정신을 조종당하신 겁니다. 그렇게 자책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국왕이 참담한 얼굴을 했다. 지금껏 에렌에게 모진 말로 상처만 주었는데, 에렌은 여전히 저를 위로하고 있었다. 국왕이 몸을 낮추어 예를 갖춘 에렌과 눈을 마주쳤다.
“나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어. 이제부터 모든 것을 바로잡을 거다.”
***
왕궁의 전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투아와 발사자르의 공개재판이 열렸다.
아르투아가 잔느의 흑마법을 이용해 국왕을 조종해 왔으며, 이교도와 타락한 근위대를 이용해 궁을 장악하려 했다는 사실이 낱낱이 밝혀졌다.
또한, 25년 전 반역의 주범도 아르투아였으며, 국왕을 구한 영웅은 근위대원이었던 원작의 주인공 ‘오스칼’이라는 사실도 알려졌다.
두 건의 반역죄와 인신매매, 이교도와의 결탁 등 아르투아에게 적용된 죄목은 수도 없이 많았다. 아르투아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으며, 그의 귀족작위는 박탈되었다.
지하 감옥 독방에서의 종신형을 선고받은 아르투아는 모든 것을 잃은 충격으로 그만 정신을 놓아 버렸다.
“으히히, 곧 내가 왕이 될 거야. 왕…. 왕….”
그는 비참한 몰골로 빛도 들지 않은 축축한 감옥 안에서 질긴 목숨만을 연명했다.
발사자르는 범죄에 가담했으나 주모자는 아니었다는 점이 참작되어, 맨몸으로 라인하트 북부 국경 지대로 추방되었다.
“내가 고X라니……. 내가 X자라니…!”
그러나, 중요 부위를 크게 다친 후 넋을 잃은 그는 추운 광야를 멍하니 떠돌다 북부 도적떼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선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칼릭스 공작가의 복권 재판에 샤무아의 계약서가 증거로 제출되었다.
원작의 남자 주인공 세드릭은 반역 누명을 벗었고, 칼릭스 가의 유일한 후손인 레오에게 공작위가 돌아갔다. 반역으로 몰수된 칼릭스 가의 재산을 되찾은 것은 물론이었다.
일련의 사건을 밝혀내고, 에렌과 뤼미에르 기사단이 아르투아를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이 널리 퍼졌다.
기사단 전원에게 정식 기사 작위가 내려졌다. 오스칼은 라인하트에서 여인의 몸으로 작위를 받은 최초의 기사가 되었다.
부패한 근위대는 해산되고, 새롭게 왕국군이 개편되었다. 뤼미에르 기사단 중 원하는 자들은 왕실 근위대의 일원이 되었다. 정당한 대련을 거쳐 실력으로 근위대장의 자리를 차지한 자는 바로, 마티스였다.
근위대를 선택하지 않은 기사들은 칼릭스 공작가의 기사단으로 남았다. 그들은 레오의 곁에서 공작가를 지키기로 했다. 드미트리가 칼릭스 기사단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오스칼은 그 어디에도 지원하지 못했다. 드미트리와 마티스가 펄쩍 뛰었기 때문이었다.
“형…. 아니 누님. 곧 공작 부인이 되실 텐데, 칼릭스 공작 부인이 칼릭스 기사단의 일원이라니요!”
“네가 근위대에 들어오면 실력으로는 근위대장이라고! 공작 부인이 근위대장을 겸한다니 말도 안 돼.”
마지막으로 국왕은 각료회의를 열어 왕국법에 대한 대대적인 손질을 시작했다.
그는 아르투아처럼 상속을 위해 혼외아들을 후계자로 입적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아들에게만 작위와 재산을 물려주도록 하는 제도를 폐지했다.
노이어 남작은 그보다 분명히 훨씬 뛰어난 딸, 로잘린에게 일찌감치 영주 자리를 물려주고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것을 선택했다. 로잘린이 얼마나 유능한지 아는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국왕의 뜻으로 장자승계법이 폐지된 사건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능력과 관계없이 태어난 순서로 왕위를 정해왔기에 지금껏 왕실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국왕 라인하트 10세는 새로운 승계법이 시행되던 날, 에렌이 더 뛰어난 군주가 될 자질이 있다는 말과 함께 왕좌를 에렌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시종 하나 없이 한적한 시골로 거처를 옮겨 스스로 유배 생활을 하며 몸을 낮추었다.
많은 사람에게 속죄하고,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에렌은 뜻밖의 양위에 당황했으나, 왕국민들의 열렬한 지지에 왕위를 받아들였다. 끝내 왕좌를 탐내지 않은 자에게 왕좌가 돌아가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라인하트 왕국은 카탈리나의 침략을 받은 사르데나에 지원군을 보냈다. 마침내 사르데나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카탈리나의 전범 귀족들이 모두 처형되었다.
그중 가장 먼저 처형된 자들은 바로, 가장 악랄한 수법으로 전쟁에 가담한 자르제 백작가의 일원이었다.
그 과정에서 납치되어 죽은 줄 알았던 자르제 백작가의 딸이 오스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스칼이 카탈리나의 자르제 백작 영애였다니! 깜짝 놀랐어요.”
“저도 최근까지 몰랐으니까요.”
호들갑을 떠는 로잘린을 향해 오스칼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왜 자르제 백작가의 재산을 거절하신 거예요? 대공비…. 아, 이제 아니지. 사르데나의 올리비아 공녀님께서 오스칼에겐 특별히 신경을 써주셨잖아요!”
세레나는 전범인 자르제 백작가의 일원이기는 하나, 백작이 저지른 악행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세레나로서의 삶은 모두 끝났거든요. 오스칼로 살아갈 제가 그걸 받을 순 없어요. 그래서 백작가의 모든 재산은 전쟁 복구에 써달라고 했어요.”
오스칼이 싱긋 웃었다.
폭정을 일삼던 국왕은 물러났으며, 국왕을 조종하던 흑막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원작의 여자 주인공은 영웅으로 인정받았으며, 남자 주인공은 반역 누명을 벗었다. 외전의 남자 주인공 역시 잃어버린 것들을 모두 되찾았다.
처음 이 소설 속에 뚝 떨어졌을 때 오스칼이 바랐던 대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매서운 추위가 물러가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소설은 끝나지 않았다. 오스칼은 여전히 소설 속 세계에 머무른 채였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 봄이 올 때까지, 제라드는 깨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