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희망이 섞인 왁자지껄한 소리가 왕궁을 채웠다.
성안의 치열했던 전투가 끝나고, 성문이 열리자 풀려났던 궁의 사용인들은 자발적으로 다시 성에 복귀했다.
치료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부상자를 치료하고, 일꾼들은 전투로 망가져 흩어진 건물 잔해들을 날랐다.
에렌의 사병과 북부 연합군, 그리고 뤼미에르 기사단은 서로를 도와 인원을 점검하고 무기를 정리했다.
피투성이가 된 청년들이 찌그러진 갑옷과 투구를 벗어 옆에 내려놓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성의 요리사들은 지친 영웅들을 위해 한편에 간이 조리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부리나케 불을 피워 뜨끈한 스튜와 목을 축일 음료를 만들어냈다.
에렌은 창백한 얼굴로 홀 안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치료사에게 어깨의 상처를 보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먼지투성이가 된 레오가 에렌에게 뜨거운 술이 담긴 컵을 건넸다. 때마침 상처에 부어진 소독약이 쓰라린지 살짝 눈썹을 찡그린 에렌이 레오가 건넨 곡물주를 들이켰다. 따끈한 술에 속이 따뜻해지자 그의 표정도 풀어졌다.
“죽을 정도는 아냐.”
“오스칼… 아니, 아르투아 대공저의 소식은 아직입니까.”
무의식중에 사적인 감정을 앞세워 질문했다는 걸 깨달은 레오가 귓바퀴를 붉혔다. 에렌이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레오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대공비가 우리 병력이 대공저에 들어가는 걸 도왔다더군. 그게 내가 받은 마지막 전갈이야. 그러니, 아마 다른 변수가 없다면 그쪽도 순조롭게 정리되었을 거야. 오스칼도 무사하겠지.”
그제야 레오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 모든 건 전하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아르투아를 잡을 덫을 놓은 덕분입니다.”
레오가 진심 어린 얼굴로 에렌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에렌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자네와 자네 기사단이 목숨을 걸고 싸운 덕분이지. 결국, 북부도 자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전투에 합류한 것 아닌가. 그 공은 당연히 인정될 거야. 물론 칼릭스 가문의 복권도 추진할 거고.”
“모두… 오스칼이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었겠지요.”
그 이름에, 에렌이 잔뜩 헝클어진 자신의 금발 머리를 가만히 쓸어넘겼다. 잔잔한 푸른 눈이 레오를 응시했다.
“그동안 자네를 기만한 건… 사과하지. 하지만 난 그만큼 절박했거든. 자네도 알다시피, 오스칼이 좀 예뻐야지.”
자조 섞인 미소가 에렌의 입가에 피어올랐다. 그 말에 레오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보고 있던 사람은 언제나 자네였어. 난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고.”
에렌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눈에 내려앉은 감정이 무거웠다.
“그러니 오스칼을 행복하게 해줘. 그녀가 사랑하는 건… 자네니까.”
“당연히, 그럴 겁니다.”
흐리게 웃은 에렌이 레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에렌의 사병이 중앙 홀로 달려 들어왔다. 잠시 숨을 고른 병사가 에렌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공 전하, 아르투아 대공저의 일은 무사히 마무리되었습니다. 아르투아와 발사자르를 생포해 궁으로 호송 중입니다.”
만족스러운 듯 에렌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좋아, 잘됐군. 그럼 오스칼과 단테는 무사한 거지?”
“예. 다만, 잔느의 신병이 확보되지 않아… 두 분이 잔느를 쫓아 샤르트르 방향으로 떠나셨습니다.”
“뭐?”
에렌의 입매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레오 역시 당혹감이 서린 얼굴로 에렌의 부하를 바라보았다.
“제가 지금 즉시 뒤따라 가겠습니다.”
레오가 다급한 눈으로 벗어둔 그의 투구를 찾았다. 그가 보호장구를 다시 단단히 조이려던 순간.
휘이잉-
홀 안에 은빛 소용돌이가 일었다. 부서진 돌가루와 나무토막들이 소용돌이를 따라 빙글빙글 돌았다.
“꺄악!”
부지런히 빗자루질하고 있던 하녀 한 명이 도로 엉망이 된 바닥을 보며 망연자실한 비명을 질렀다. 레오와 에렌의 시선이 동시에 소용돌이 안의 인영으로 향했다. 곧이어 두 사람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소용돌이 속에서 나타난 것은, 클로드의 품에 안긴 오스칼과 클로드 곁에 체념한 얼굴로 서 있는 단테였다.
에렌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저 변태 같은 자식이 또! 윽.”
검을 뽑아 들자 치료한 어깨가 욱신거려, 에렌이 곡소리를 냈다. 그 반응에 레오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전하께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을 정리한 것처럼 구시더니, 전부 거짓말이었던 겁니까?”
“그건 그거고! 저놈은 경우가 다르잖아? 자네도 아니고, 저 변태 자식에게 질 순 없다고!”
“제겐 전하나 저 자식이나 똑같습니다만?”
두 사람이 어린아이들이 할 법한 입씨름을 하는 동안, 오스칼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클로드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재빠르게 달려가 옥신각신하는 두 남자를 한 번에 꽉 끌어안은 오스칼이 기쁜 목소리를 냈다.
“두 사람 다 무사해서 정말, 너무너무 다행이에요!”
동시에 오스칼에게 목을 끌어안긴 두 남자가 당황해 눈알을 굴렸다. 두 남자를 놓아준 오스칼이 가쁜 숨을 내쉬며 쉴새 없이 조잘거렸다.
“아르투아와 발사자르를 끝장냈어요. 곧 붙잡혀 왕궁으로 올 거예요. 그리고, 잔느도 마도구와 함께 사라졌어요. 클로드가 검은 숲에 나타난 잔느를 해치웠대요. 잔느가 훔쳐 간 제 칼도 찾아줬고요.”
검을 슬쩍 들어 보인 오스칼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뿌듯한 얼굴이었다.
환히 웃는 오스칼을 바라보는 레오의 눈동자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일렁였다.
“이런 엄청난 작전을 생각해 내다니 에렌은 정말 대단해요. 게다가 로즈와 대공비 전하의 도움도 완벽했죠. 단테의 검술 실력도 말할 것도 없이 대단했고, 또 에렌의 사병들도 얼마나 훌륭하던지! 마지막으로 클로드가 마법으로 잔느를 해치운 건 그야말로 최고….”
오스칼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레오가 오스칼의 팔목을 당겨 와락 끌어안았다.
“넌 또 다른 사람들 이야기만 하는군.”
레오의 가슴팍 안에서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오스칼이 이내 눈을 접어 웃었다. 피와 땀으로 엉망이 된 몰골이었지만, 레오에게선 평소와 같은 달큰한 체향이 났다. 오스칼이 그의 품에 안겨 속삭였다.
“그야, 다들 정말 대단하니까!”
“모두 네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 네가 가장 대단해. 고마워, 오스칼.”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레오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고소한 바닐라 향이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 단전까지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레오가 오스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먹먹하게 바라보던 에렌이 눈을 돌렸다. 클로드와 눈을 마주친 그가 까딱 고갯짓으로 감사를 전했다. 클로드 역시 화답하듯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클로드 역시 후련한 한편, 복잡한 얼굴이었다.
에렌이 피식 웃었다.
비슷한 처지의 남자들은 이쯤에서 사라져야겠지.
“단테, 우리가 할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탑으로 가서 형님부터 만나야겠어.”
하인이 건넨 새 재킷을 걸쳐 어깨의 붕대를 가린 에렌이 담담한 목소리로 단테를 채근했다.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는 에렌의 곁을 단테가 조용히 따랐다. 두 사람 뒤로 은빛 연기가 아스라이 흩어졌다.
“흠흠.”
굵직한 헛기침 소리에 문득,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오스칼이 레오의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등 뒤에서 청년들이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단장님이 얼굴 근육을 저렇게 쓸 줄도 아셨나?”
“역시 에르네스트 대공이 차인 거지? 우리 단장님이 사랑의 승자가 되어 다행이야. 그래, 기왕이면 이기는 남색가가 되어야지.”
“쉿! 조용히 해. 다 들린다고!”
붕대를 두른 기사단 청년들이 애틋하게 서로를 끌어안은 레오와 오스칼을 흘끔거렸다. 청년들은 두 사람을 노골적으로 쳐다보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썼지만,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
문득 오스칼은 레오의 어깨너머로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기사들을 발견했다.
그제야 몇 시간 전 기사단 청년들이 다 보는 앞에서 ‘키스쇼’를 벌였던 일이 떠올랐다. 오스칼의 얼굴이 순식간에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당황한 오스칼이 얼른 눈앞의 레오를 밀어내자 그가 불만스러운 듯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남색가라니?! 그, 그런 게 아니야!”
레오의 품에서 빠져나온 오스칼이 청년들을 향해 허겁지겁 변명하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청년들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광대를 한껏 끌어 올려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님, 형님. 저희는 두 분의 관계를 의연하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몸 건강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그럼요. 전 형님이 남색가라 해도 여전히 존경할 겁니다.”
“그래, 오스칼.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마티스마저 어딘가 흐뭇한 얼굴로 야릇하게 미소를 짓자, 오스칼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리고 그녀와 레오에 대해 잔뜩 오해하고 있는 청년들을 향해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마침내, 오스칼이 긴장을 가라앉히려는 듯 심호흡을 한번 하고 입을 열었다.
“사, 사실… 내가 지금까지 모두를 속였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얼굴까지 붉히며 고개를 숙인 오스칼을 향해 마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스칼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맑은 눈동자로 청년들을 응시했다.
이제는 모든 것을 고백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