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은빛 소용돌이가 잔느를 감쌌다. 불어온 바람에 잔느의 몸이 휘청였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잔느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은빛 연기가 바람에 흩어지자 마법진 위로 피어오르던 스파크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뭐, 뭐야!”
잔느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등 뒤에서 나른하지만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감히 이 숲에서 내 마력을 사용하다니.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크, 클로드 드보이스!”
그를 돌아보는 잔느를 향해 클로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잔느를 응시하는 섬뜩한 보랏빛 눈동자에는 감정이라고는 없었다.
“오랜만이야.”
“멍청한 자식 같으니. 네 힘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 텐데?”
잔느가 눈을 표독스럽게 떴다. 그리고는 손안의 검은 구슬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 위협을 가볍게 무시하며 클로드는 그저 잔느의 어깨너머로 술식을 넘겨다 볼 뿐이었다.
“아하, 영혼을 빼앗는 술식이라. 구식 악당 같은 수법이군.”
“하! 지난 500년간 수백 명의 영혼을 빼앗은 네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곧 마법진 한가운데에 꽂힌 검을 확인한 클로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가 오스칼에게 사주었던 검이었다. 클로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심지어 술식에 오스칼의 검을 이용하다니. 당신, 단단히 실수한 거야.”
“왜, 그 여자의 영혼을 빼앗는다고 생각하니 너도 겁이 나는 모양이지?”
잔느가 그를 조롱했다. 클로드도 제 심장의 주인이 오스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터. 잔느가 그 여자의 영혼을 뺏겠다는 일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당신, 오스칼이 검을 잃으면 얼마나 슬퍼하는지 알아? 왜 남의 검을 훔쳐?”
순식간에 클로드의 등 뒤에 나타난 양피지와 깃펜이 동의하듯 거세게 몸을 흔들었다. 양피지가 잔느에게 제 몸에 쓰인 글자를 내보이며 파닥거렸다.
〈오스칼은 검을 잃으면 세상이 무너진 듯 통곡함.
※ 참고 : 새로 검을 사줄 땐, 엑스칼리버, 청룡언월도, 드래곤소드는 피할 것〉
잔느가 황당한 듯 양피지 조각을 향해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앙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놈이 헛소리로 내 정신을 흩트리려나 본데, 이미 술식은 모두 완성됐어. 내게 네 마법을 사용하면, 마력은 즉시 이 구슬로 흘러들어와 마법진을 발동시킬 거다! 그럼 그 계집의 영혼은 내 것이 될 거야. 물론 네가 마법을 쓰지 않아도 상관없어. 이미 구슬의 마력은 충분하거든.”
잔느의 말에 클로드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당신까지 오스칼에게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역시 오스칼은 인기가 많아서 큰일이라니까.”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남자는 아까부터 자꾸 엉뚱한 말만 지껄이고 있었다. 잔느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이상한 소린 집어치워! 내가 그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 건, 네 놈 심장의 주인이기 때문이야! 네 놈 심장 때문이라고!”
잔느의 날카로운 외침에 클로드가 크게 놀란 체를 하더니 여유로운 얼굴로 턱을 쓸었다.
“흠. 난 여태껏 당신이 사악하지만, 꽤 영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약간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군.”
그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는 다분히 그녀를 약 올리는 듯했다. 그의 도발에 말려든 잔느가 사납게 대꾸했다.
“뭐라고?”
“내 심장의 주인은 나지. 왜 멀쩡히 내 몸에 붙은 심장의 소유권을 다른 사람에게 멋대로 넘기는 거야?”
“웃기지 마. 분명 고대 마녀의 저주에 의하면….”
“그래. 고대 마녀의 저주로 내가 심장을 돌려받았다는 소리야. 전부 당신 덕분이지.”
잔느의 말을 가로챈 클로드가 싱긋 웃었다.
“하! 내 앞에서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되니, 그 대단한 클로드 드보이스도 혓바닥을 놀려 날 자극하려나 보군. 미안하지만 네 헛소리를 들어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잔느가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는 듯, 검은 구슬을 손에서 굴렸다. 검은 구슬이 빛을 뿜어내자 술식 위로 미세한 스파크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클로드가 한쪽 눈을 찡그리고는 나직하게 대꾸했다.
“원래 난 대가 없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주의지만, 오스칼을 슬프게 했다면 얘기가 다르지.”
클로드가 그의 마력을 개방했다. 순식간에 은빛 폭풍이 숲을 에워쌌다. 클로드의 거대한 마력에 잔느의 입이 탐욕스럽게 벌어졌다. 잔느가 냉큼 그 마력을 향해 검은 구슬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이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잔느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파직-파직-
검은 구슬이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뭐, 뭐야!”
클로드의 마력을 조금도 흡수하지 못한 구슬이 무서운 소리를 냈다. 도리어 구슬 안의 빛이 클로드의 마력 파장에 짓눌려 점점 꺼져갔다. 클로드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안타깝게도 내 마력이 좀 바뀌었어. 심장의 주인이 바뀌는 바람에 말이야.”
빠지직-
검은 구슬이 흑마법과 반대의 성질을 지닌 클로드의 은빛 마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며 힘없이 갈라졌다.
“아, 안돼!”
구슬이 파괴되자 잔느가 절규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클로드의 마력이 잔느에게 달려들었다. 온몸에 달라붙는 생경한 마력에 잔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마력은 그녀가 저항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잔느의 비명에 클로드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자업자득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누가 오스칼의 검을 훔치래?”
잔느의 몸이 조금씩 은색 빛에 먹혀들어 갔다. 잔느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발악했다.
“그 여자의 영혼은 이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야! 그래서 네 저주를 풀어낸 거야! 그 여자의 영혼은 다른 사람 몸에 기생하고 있는 거라고! 날 살려주면 그 계집의 비밀을 알려줄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잔느의 말에 클로드의 눈이 커졌다.
엄지와 중지를 튕겨 딱-소리를 낸 그가 잔느를 향해 까딱 고갯짓을 보내 인사를 건넸다.
“오! 오스칼이 어떻게 내 저주를 풀었는지 궁금했는데, 덕분에 내 오랜 궁금증이 풀렸군. 고맙다고 해두지.”
그의 등 뒤로 둥실 떠오른 깃펜이 기뻐하며 열심히 양피지 위로 그의 말을 받아썼다.
말이 통하지 않자, 잔느가 악을 쓰며 저주를 퍼부었다.
“그 여자의 영혼은 이곳에 있어선 안 돼! 다른 사람과는 다른 별종이야, 괴물이라고! 사실 너도 분명 알았을 거야, 네가 모를 리가 없잖아. 그렇지?”
“글쎄, 그런가? 내게 그 사람의 영혼은 항상 특별하게 느껴져서 말야.”
클로드가 밝은 빛에 서서히 잠식되는 잔느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잔느가 핏발 선 눈으로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몸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있었다.
“아악!”
펑-
은빛 섬광이 숲 한가운데서 솟아올랐다. 지축을 울리는 굉음에 잔느의 비명이 묻혀 사라졌다.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사이로 산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잔느의 육신은 클로드의 마법에 바스라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클로드가 바람에 나부끼는 은발을 차분하게 쓸어 넘겼다. 그가 망가진 술식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땅에 꽂힌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물끄러미 검을 바라보았다.
“분실물은 직접 가져다줘야겠지?”
오랜만에 만나게 될 오스칼의 얼굴을 떠올리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아르투아 대공저에서 잔느의 뒤를 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
단테는 갑작스럽게 정신을 잃은 오스칼을 두고 새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어느 순간 오스칼의 몸 근처에서 붉은 섬광이 이는가 싶더니 오스칼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채고 단테가 재빠르게 오스칼의 말 근처로 이동하지 않았다면 큰 사고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스칼 님! 정신을 차리십시오!”
젠장. 단테가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오스칼의 몸에서 느껴지는 붉은 기운은 분명 잔느의 저택에서 마주했던 흑마력과 같은 것이었다. 어느덧 붉은 기운은 사라졌지만, 오스칼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제길, 설마 그 여자 짓인가!”
동행한 에렌의 사병들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오스칼 주위에 몰려들었다.
휘이잉-
그때, 인적이 드문 들판 위에 은빛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사병들과 단테가 놀라 검을 빼 들었다.
팅! 팅! 팅!
순식간에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가 멀리 튕겨 나가고, 소용돌이 안에서 검을 쥔 은발의 남자가 나타났다.
“당신들의 검은 사양하지. 내게 검을 들이댈 수 있는 건 오스칼뿐이라.”
“다, 당신은!”
은빛 머리칼의 낯익은 남자는 샤무아의 수장, 클로드 드보이스가 틀림없었다. 지난번 잔느의 저택을 수색할 때 그에게 목숨을 구했던 단테와 에렌의 사병들이 당황해 눈빛을 주고받았다.
눈앞에 나타난 ‘재앙의 상징’이 과연 이번에도 그들 편인지 확신할 수 없는 탓이었다.
그 사이, 옅은 웃음을 머금은 클로드가 고민에 빠진 그들 곁을 유유히 지나쳤다.
쓰러진 오스칼에게 다가간 그가 오스칼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윽고 그가 마력을 불어넣자 오스칼이 눈을 번쩍 떴다.
“으아악!”
오스칼이 드래곤이라도 삶아 먹은 것 같은 소리를 지르며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클로드가 쿡쿡대며 웃었다.
“씩씩한 건 여전하네, 당신.”
“바, 방금 뭐였어? 엄청난 게 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고!”
오스칼이 온몸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끔찍한 기분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걱정하지 마. 영혼을 빼앗는 마법진이 잠깐 발동하며 당신 영혼이 충격을 받은 것뿐이니까.”
“뭐, 뭐라고…? 영혼을 빼앗아?”
“당신 영혼은 잘 있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오스칼이 눈을 끔뻑이며 점잖은 얼굴로 아찔한 소리를 해대는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어쨌든 걱정할 것 없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이 났다.
정신이 들자 오스칼은 오랜만에 만난 남자를 향해 착실히 안부 인사를 건넸다.
“당신,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난 그동안 잘 못 지낸 거 같아. 엄청난 일들이 있었거든.”
일련의 일들에 질려 버렸다는 듯 오스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클로드가 그녀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기, 당신 걸 찾아왔어.”
클로드가 내민 검을 받아든 오스칼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는 오스칼을 향해 눈을 접어 웃으며 클로드가 오스칼을 번쩍 안아 들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에 오스칼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오랜만인데, 만나자마자 또 야?”
“움직일 기력도 없을 거 아냐. 이번엔 당신이 가장 가고 싶어 할 곳에 데려다줄게.”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은색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