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오스칼이 대공저의 집무실을 덮치기 30분 전.
대공비는 누구보다도 아르투아를 쳐부수는데 진심이었다. 앞장서서 오스칼과 에렌의 병사를 비밀통로로 안내한 대공비는, 오스칼의 손을 붙잡고 신신당부했다.
“그 천하의 나쁜 자식을 꼭 끝장내주세요. 그놈은 분명 저택 2층 가장 안쪽의 집무실에 있을 겁니다. 분명 그 방에서 별관으로 연결된 통로로 빠져나가려 할 거예요.”
대공저의 숨겨진 통로를 통해 오스칼과 단테, 그리고 에렌의 사병들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진입했다.
바깥이 아닌 안에서부터 시작된 급습에, 저택에 남아 있던 아르투아의 졸개들은 우왕좌왕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에렌의 사병은 혼비백산한 아르투아의 호위들을 빠르게 제압했다. 사병들이 아르투아의 병력을 상대하는 동안, 오스칼은 단테와 함께 아르투아의 집무실로 달렸다.
“날 찾고 있었다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오스칼의 얼굴을 마주하자, 아르투아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 되었다. 오스칼이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네, 네놈이 어떻게 여길…!”
아르투아의 공포에 찬 외침과 함께, 방 안에 있던 병사가 칼을 뽑았다. 뒤이어 아르투아의 졸개 몇이 집무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챙- 챙-
오스칼과 단테가 호위병들의 칼을 받아내는 동안, 아르투아는 수하 몇 명의 보호를 받으며 허겁지겁 방에 딸린 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단테! 저들을 쫓아가요!”
오스칼의 외침에 방에 남은 병사를 단숨에 베어버린 단테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의 뒤를 쫓았다.
“아, 아버지!”
발사자르가 사라지는 아르투아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르투아는 아들의 존재 따윈 안중에도 없이 제 몸만 챙겨 달아났다. 발사자르는 아르투아가 사라진 쪽문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스릉-
오싹한 소리에 그제야 고개를 치켜든 발사자르가 이를 딱딱 부딪쳤다. 뭐라도 해보려 쓰러진 호위병이 떨군 검을 주워들어 겨누어 보았지만, 검을 쥔 손만 덜덜 떨릴 뿐이었다.
“세, 세레나. 나야…. 네가 사랑하던 발사자르.”
“웃기고 있네.”
오스칼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검을 든 발사자르의 모습은 어린애가 검을 쥐는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
깡-
오스칼이 검을 내지르자, 발사자르의 검은 맥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세레나! 네가 어떻게 감히 내게 이럴 수 있어? 내가 널 구해줬잖아?! 은혜도 모르는 계집 같으니!”
발사자르가 터무니없는 악을 썼다. 오스칼이 경멸이 담긴 눈동자로 발사자르를 응시하며, 그를 향해 위협하듯 칼끝을 까딱였다. 발사자르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세, 세레나. 내 말 좀 들어봐. 우리 좋았잖아? 응? 나한텐 너밖에 없어. 날 살려주면 너와 결혼해 줄게.”
“미친놈.”
애원조로 바뀐 발사자르의 목소리에 오스칼이 어이없다는 듯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아르투아가 사라진 통로를 흘긋 넘겨다보았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세레나! 세레나! 네가 분명 나 없이는 못산다고 했잖아? 나 대신 죽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
오스칼의 검이 가깝게 다가오자 발사자르가 울먹였다. 아랑곳없이 칼을 치켜든 오스칼이 발사자르를 노려보았다. 이제 그는 오스칼을 향해 연신 손바닥을 비비며 사정하고 있었다.
“글쎄, 내가 세레나였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그 가엾은 세레나는 이제 없어. 네가 죽여버렸잖아.”
“세, 세레나. 무슨 말이야. 내가 왜 널 죽이겠어. 오해야, 세레나. 내 말 좀 들어봐.”
“네 헛소리를 들어주고 있기엔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검이 바람을 갈랐다. 발사자르가 절규하듯 울부짖었다.
“아, 안 돼!”
사락-
발사자르의 탐스러운 검은 머리칼이 뭉텅 잘려 바닥에 내려앉았다.
우당탕-
오스칼이 휘두른 검에 발사자르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푸드덕거리며 제풀에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발사자르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지며 제 바지춤을 붙들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끄아악!”
넘어지며 바닥에 쓰러진 테이블 다리에 영 좋지 못한 곳을 스친 발사자르가 괴성을 질렀다. 오스칼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발사자르를 베기엔 제 검조차 아까워 베어내는 시늉만 해 혼쭐이나 내주려 했건만. 위협만 하는 칼날에 기겁하고 혼자 나동그라지는 통에 그만, 남자의 기능을 상실한 모양이었다.
난봉꾼처럼 살던 놈에게 알맞은 최후였다. 오스칼이 그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세레나가 아니라 오스칼이야.”
처절한 발사자르의 비명을 뒤로하고 오스칼이 아르투아를 쫓아 달렸다. 오스칼은 쪽문의 통로가 아닌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 자식이 빠져나갈 길은 딱 한군데뿐이에요. 별관을 지나 정원의 호수와 연결된 뒷길이요. 저택의 뒷문으로 바로 향하는 길이랍니다.”
오스칼은 대공비가 그림까지 그리며 설명해 준 대공저의 최단 이동 거리를 떠올렸다.
그녀가 이전에 발사자르의 무도회에서 빠져나왔던 바로 그 길이었다. 오스칼이 무성하게 난 정원의 수풀을 헤치며 지름길을 달렸다.
촤악!
마침내 오스칼이 정원 가장자리에 심어진 덩굴장미를 검으로 베어내고 좁은 뒷길로 뛰어들었다.
“하아, 하아.”
오스칼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뒷길을 이용해 달려오던 아르투아가 제 앞을 가로막은 오스칼의 모습에 크게 당황해 주춤거렸다. 퇴로를 찾는 아르투아를 뒤쫓아오던 단테가 막아섰다.
“젠장!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나타난 거야?”
“여자가 한을 품으면 무섭거든. 게다가 얼마 전 이곳에서 예행연습도 한번 했고.”
오스칼이 아르투아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지긋지긋한 놈들 같으니! 내가 저 계집을 상대할 테니 너흰 저놈을 막아!”
아르투아가 날 선 목소리로 명령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척 봐도 대단한 무사 같은 단테보다는, 가냘픈 계집인 오스칼을 상대하는 게 더 쉬우리라는 판단이었다.
아르투아를 호위하던 병사들이 단숨에 전투태세를 취했다. 단테가 노련한 기술로 그에게 달려드는 병사들을 상대했다.
그 모습에, 단테를 상대하질 않길 잘했다고 안도하며 아르투아가 오스칼을 향해 달려들었다.
휙- 휘릭-
오스칼이 아르투아의 검을 흘리며 옆으로 빠져나갔다. 아르투아 역시 왕실에서 고급 검술을 교육받은 덕분에, 발사자르보다는 나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오스칼과 아르투아 간에 몇 번의 합이 이어졌다. 오스칼의 눈이 매섭게 아르투아를 쏘아보았다. 단 몇 번의 공격으로 아르투아의 약점을 파악한 오스칼의 검이 아르투아를 향해 쇄도했다.
‘마르셰 팡트(전진 공격)!’
아르투아는 오스칼의 검을 받아내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오스칼이 완급조절을 하며 그를 몰아세웠다. 아르투아를 의도대로 몰아붙이자, 어느덧 정원길의 끝이 보였다.
오스칼이 최후의 공격을 준비했다.
채앵-
그러나, 아르투아가 예상 범위로 들어온 오스칼의 검을 방어했다.
“애송이 같으니!”
뻔한 공격에 이죽거리던 아르투아의 얼굴에 안도가 서린 것도 잠시, 이어지는 공격에 아르투아의 눈이 커졌다. 오스칼이 빙긋 웃었다.
“이게 바로 아타크 콩포제(복합공격, 속임수 동작으로 상대를 방어를 끌어낸 후 공격)라는 거야.”
그녀에게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준 기술이었다. 오스칼의 검이 유인 동작에 걸려든 아르투아의 검을 순식간에 튕겨냈다.
쨍그랑-
아르투아의 검이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내 그가 중심을 잃으며 허우적댔다. 오스칼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르투아를 베었다.
“으억!”
풍덩!
아르투아의 몸이 대공저의 자랑거리인 커다란 인공 호수로 추락했다. 살얼음이 낀 호수에서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아르투아가 허우적거렸다. 오스칼이 손나팔을 만들고는 그를 향해 외쳤다.
“물이 꽤 찰 거야! 그리고 호수가 꽤 깊더라고!”
체통도 잊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던 아르투아가 장식용 바위를 끌어안고 호숫물을 웩웩 토해냈다. 이윽고 호위 병사들을 모두 쓰러뜨린 단테가 서둘러 오스칼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르투아 대공저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군요.”
“하지만 잔느는 어디 있는 걸까요?”
오스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멀리서 에렌의 사병 하나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왕궁에 북부 연합군이 합류해 무사히 아르투아 진영을 제압했다고 합니다. 대공 전하와 뤼미에르 기사단도 무사하다고 합니다.”
그 소식에 오스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뒤따라 달려온 에렌의 사병들이 호수에서 아르투아를 질질 끌어냈다. 아르투아의 몰골은 흡사 시들어 빠진 물미역 같았다. 머리칼은 젖어 축 늘어져 있었고 오스칼의 검에 잘려나간 옷은 물을 잔뜩 먹어 후줄근한 꼴이었다.
에렌의 사병들은 온몸이 시퍼렇게 되어 사시나무 떨듯 떠는 아르투아를 단단히 묶었다. 그는 추위와 충격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식을 전하던 사병이 그 모습을 흘긋 보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붙잡은 저택의 병사들을 심문했는데, 잔느는 샤르트르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병력을 보냈습니다. 여인 한 명뿐이니 뒤따라 잡는 대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오스칼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단테 역시 걱정스러운 듯 오스칼과 눈빛을 교환했다.
“잔느는 흑마법을 쓰는 여자예요. 섣불리 덤볐다간 사병들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함께 가보죠.”
단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
검은 로브를 쓴 여자가 숲길을 달렸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춤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잔느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부릅뜬 붉은 눈에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심지어 이제 25년 전처럼 가짜 악역으로 내세울 자도 없었다. 모든 것이 드러난, 완전한 패배였다.
이교도 부하로부터 에렌이 국왕을 처형했다는 것이 헛소문이었다는 전갈을 받자마자 잔느는 상황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결국, 모든 걸 잃은 걸까.
“아니, 난 아무것도 잃지 않았어.”
혼잣말을 중얼거린 잔느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원래 가진 것이 없었다.
잔느는 미련 없이 아르투아와 발사자르를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에게 있어서 아르투아와 발사자르는 도구일 뿐이었다. 마치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검은 구슬과도 같은.
잔느가 손안의 마도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검은 숲 깊은 곳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후우.”
마침내 말라붙은 큰 버드나무 앞에 멈춰 선 잔느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예가네초프와 발사자르의 말을 떠올렸다.
“나도 그, 그런 건 처음 봤어. 평범해 보였지만 다른 이들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어….”
“정말 다른 사람의 영혼이라도 씐 줄 알았다니까요?”
천천히 버드나무의 검붉은 몸통을 올려다본 잔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땅의 영혼은 저주를 깰 수 없을 것이니, 저주는 영원하리라.〉
그녀가 오랫동안 이 버드나무를 조사해 왔지만, 저주받은 심장에 걸린 고대 마녀의 주술은 완벽했다. 오직 완벽한 조건만이 완벽한 주술을 깰 수 있으리라.
“그래. 그 계집의 영혼이 해답이었어.”
발사자르는 오스칼이 자르제 백작가의 여식, 세레나가 틀림없다고 했다. 그러나 발사자르가 틀렸다. 분명, 세레나의 몸에 다른 영혼이 깃들었던 거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마녀의 피를 물려받은 할머니가 말했다. 간혹, 신의 장난으로 세계율에 틈이 생기고 그 틈을 통해 다른 세계의 영혼이 흘러들어오기도 한다고.
잔느가 버드나무에 쓰인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불멸의 저주를 끝낸 자, 심장의 주인이 되리라.〉
‘저주를 끝낸 자’인 오스칼의 영혼을 차지하기만 하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흑마법의 원천이 제 것이 될 것이다.
잔느가 품 안에서 염소의 피가 담긴 붉은 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버드나무 주위를 돌며 피로 복잡한 술식을 새겼다. 그녀의 일족에서 전해 내려오는 흑마법의 비기 중 하나였다.
영혼을 빼앗는 술식.
흑마법은 사람의 영혼을 빼앗을 수 있었다. 클로드 드보이스가 피의 맹약을 통해 사람의 영혼을 취하는 것처럼. 물론 그는 강력한 흑마법을 부리는 자였기에, 복잡한 술식 따위를 그리지 않고서도 영혼을 빼앗을 수 있었다.
“이제, 그 강력한 마법은 내 것이 되겠지.”
잔느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마법만 가지면 아르투아 따위와 상관없이 세상을 그녀의 아래에 둘 수가 있었다.
마침내 술식을 완성한 잔느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내 들었다. 발사자르가 가져온 오스칼의 검이었다. 술식 한가운데에 영혼을 빼앗을 자의 소유물을 제물로 바치고 마력을 불어 넣으면 마법진이 발동할 것이다.
잔느가 술식에 힘껏 오스칼의 검을 꽂아 넣었다.
파직-파직-
제물을 감지한 술식에서 붉은 스파크가 일었다. 잔느가 광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검은 구슬에는 클로드에게서 빼앗은 마력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잔느가 구슬을 손에서 굴리자 검은 구슬이 파르르 떨리며 공명했다. 마법진에서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잔느의 얼굴이 환희로 벅차올랐다.
휘이잉-
그때 마법진의 스파크 위로, 은빛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