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드디어!”
아르투아 대공저의 집무실, 정보원의 보고를 들은 아르투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국왕이 방금 처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마주 앉은 발사자르 역시 입꼬리를 올렸다.
“대공 전하와 함께 이동할 한 소대 정도를 제외하고는, 드레이코가 근위대 병력을 모두 이끌고 성으로 진입한다고 합니다.”
“좋군. 드레이코에게 에르네스트는 반드시 산 채로 잡으라고 해. 난 그 자식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리면 저택에서 출발할 거다. 반역자 녀석의 최후를 감상하도록 하지.”
“예!”
정보원이 고개를 조아리며 자리를 떴다. 아르투아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게다가 에렌이 인질을 잡아 오스칼이란 계집과 맞바꾸었다는 말에는 코웃음이 절로 났다.
남색가로 소문이 날 정도로 에렌이 아끼던 청년이 사실 여인이었다니!
무도회 날 잔느가 찾아와 그 사실을 알려주며 거사에 오스칼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을 때, 아르투아는 반신반의했었다.
설마 냉철한 이성으로 이름난 에렌에게 그런 방법이 통할까? 그러나 이번에도 여지없이 잔느의 계획은 꼭 들어맞았다.
“하여간, 그 대단한 에르네스트 놈도 여자 앞에선 정신을 못 차리는군. 정말 제 욕망에 충실한 놈이라니까.”
“심지어 에르네스트는 세레나에게 차이는 바람에 정신을 놓은 거라면서요? 궁을 점령한 와중에 걜 침실로 부르다니. 그 자식도 정말 멍청하네요.”
“쯧, 사내놈들이 다 그렇지. 나처럼 여인은 철저하게 이용만 해야 왕좌도 차지하고 그런 것 아니겠느냐?”
“하핫, 그런 건 제가 아버지를 닮았나 봐요. 저도 결코 여자한테 이용당하고 그러진 않거든요.”
아르투아와 발사자르가 서로를 추켜세워주며 낄낄거렸다. 이제 곧 라인하트 왕국의 왕좌가 그들 손에 떨어질 것이었다.
***
드레이코가 이끄는 근위대는 수월하게 성안으로 진입했다. 뤼미에르 기사단은 왕실 근위대가 성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았다.
그들은 왕국민들만 무사하다면 국왕이나 에르네스트 대공이 어찌 되든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드레이코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열하게 웃었다.
“제깟 놈이 뭘 할 수 있겠어? 왕국군도 아닌 놈들인데. 왕실 근위대가 성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근위대는 이교도를 진압하는 척 시늉만 했다. 이교도들은 친구라도 맞이하듯 성문을 열어 그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성안에 들어선 드레이코가 이교도 병사를 향해 물었다.
“국왕의 시신은 어디 있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국왕은 탑에 갇혀있습니다.”
“뭐?”
“그렇지 않아도 계획보다 조금 일찍 오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교도 병사의 말에 드레이코가 이맛살을 구겼다. 분명 정보원은 국왕이 처형되었다고 했었는데.
“에르네스트는 어디 있느냐? 아직 인질과 함께 그 침실에 있는 게냐?”
“예. 그 남색가 놈, 취향이 지독하더군요.”
병사의 대답에 드레이코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졸개들은 아직 진실을 모를 테지만, 아르투아와 잔느는 그자가 여인이라고 했다.
천하의 에르네스트 대공도 여자에 빠지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국왕의 처형마저 잊은 모양이었다.
“순서가 좀 바뀌었지만 어쩔 수 없지. 너희는 지금 탑으로 가서 국왕을 처리해라. 난 에르네스트를 잡으러 가겠다.”
“예!”
물론 사람들에겐 근위대가 성에 진입했을 땐, 이미 국왕이 죽은 뒤였다고 공표할 생각이었다.
“이제 그 건방진 에르네스트 놈을 무릎 꿇리러 가야겠군.”
인쇄소와 수확제에서 그에게 당한 수모를 떠올린 드레이코가 기대에 찬 얼굴로 궁을 가로질렀다.
***
드레이코의 명령을 들은 이교도 한 무리가 국왕이 갇힌 탑으로 향했다. 에렌의 사병들이 탑을 둘러서서 탑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이교도들은 에렌의 사병을 향해 오만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비켜라. 국왕을 처형하라는 명령이다.”
“우린 그런 명령을 받은 적 없다. 우리에겐 국왕을 지키라는 명이 있었을 뿐이다.”
건장한 에렌의 사병들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이교도들을 내려다보았다. 사병의 태도에 이교도 병사가 눈을 치켜떴다.
“건방진 놈들 같으니! 명이 바뀌었으니 순순히 물러서.”
“누구의 명인가?”
“아르투아 대공 전하의 명을 받드는 근위대장의 명이다.”
에렌의 사병이 가소롭다는 듯 한쪽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부릅뜬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오직 에르네스트 대공 전하의 명을 받들 뿐이다. 전하께서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셨다. 특히, ‘아르투아’의 명을 받은 자들이라면 더더욱.”
“뭐…뭐라고?”
스릉-
휙-
탑 아래를 둘러싼 사병들이 일제히 눈앞의 이교도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젠장! 하, 함정…. 끄엑!”
이교도들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이교도들은 사병들의 칼날 아래 힘없이 쓰러졌다.
쿠콰앙-
그때, 엄청난 폭음이 들렸다. 뤼미에르 기사단이 성문을 부수고 궁으로 진입하는 소리였다. 에렌의 사병이 눈을 번뜩였다.
“드디어 시작된 모양이군. 다들 대공 전하를 위해 탑을 엄호하도록.”
***
“성안에 있는 이교도와 근위대는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
선두에 선 레오가 기사단을 향해 소리쳤다. 순식간에 성문 입구 쪽을 지키고 섰던 이교도 병사들이 쓰러졌다.
기사단의 등장으로 왕궁 내부가 소란해지자, 침실 근처를 순찰하던 이교도 병사들이 두리번거렸다.
“뭐야? 뤼미에르 기사단이 들어온 거야?”
“대공도 이 사실을 아나? 가서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남색가 자식은 이 와중에 침실에서 뭘 하는…. 크억!”
사악-
등 뒤를 가른 검날에 이교도 병사가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쓰러졌다. 쓰러진 동료의 모습에 급히 돌아선 병사 역시 일격에 나뒹굴었다.
“보고는 됐어.”
이교도의 시체 위로 느릿한 목소리가 짧게 울려 퍼졌다. 뒤이어 우아한 발걸음의 긴 다리가 붉은 카펫 위를 빠르게 달렸다. 왕궁의 복도 창으로 들이치는 햇살에 눈부신 금발이 흩날렸다.
***
“이런, 젠장!”
드레이코가 욕을 내뱉었다. 이교도 병사가 에렌이 있다며 안내한 왕궁의 침실은 텅 비어 있었다.
게다가 침실 근처 복도에 쓰러진 이교도들을 보자, 에렌에게 감쪽같이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드레이코가 검을 뽑아 들고 허겁지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성의 중앙 홀로 달렸다.
성의 정원, 복도, 중앙 홀에서는 이교도 병사, 왕실 근위대, 그리고 뤼미에르 기사단과 에렌의 사병이 뒤엉킨 크고 작은 전투가 한창이었다.
가장 큰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은 성의 중심부에 있는 홀이었다. 커다란 홀은 검을 휘두르는 소리, 바닥을 구르는 소리, 누군가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역사에 남을 전투로군.”
빠르게 중앙 홀에 도착한 에렌이 자조 섞인 목소리를 냈다.
터무니없는 광경이었다. 이교도와 근위대가 한편이 되어 싸우는 장면이라니.
그는 아비규환이 된 홀을 헤치고 전장의 한가운데로 향했다. 철갑투구를 쓴 기사가 무차별하게 쏟아지는 검 세례를 위협적인 기세로 막아내고 있었다.
에렌이 다가오자 투구 쓴 남자의 공격에 주춤하던 이교도 병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홱-
에렌이 투구 쓴 남자를 공격하리라는 병사의 기대가 날카로운 검에 잘려나갔다. 에렌의 검은 그대로 이교도 병사를 베었다.
“고맙다는 말은 사양하지.”
눈앞에서 쓰러지는 이교도 병사의 모습에 레오가 시선을 돌리자, 에렌이 고갯짓을 보냈다. 레오가 제게 다가오는 적 하나를 검으로 깊게 찌르고는 대답했다.
“오스칼은 무사합니까.”
“성안에 근위대 놈들이 바글바글한 걸 보니, 아르투아 쪽엔 몇 되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단테까지 함께 붙여 보냈으니, 오스칼은 무사하겠지. 그녀의 실력을 알잖아.”
레오의 눈썹이 근심으로 살짝 당겨졌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칼이라면 분명 무사할 것이다.
“대공께서 대단한 연극을 준비하셨더군요.”
덤덤히 말을 던지며 내지른 레오의 칼질에 또 한 명의 이교도가 쓰러졌다.
“내가 웬만한 연극배우보다 잘생기긴 했지.”
농담조의 목소리로 대꾸한 에렌이 코앞까지 침투한 근위대원의 칼을 날카롭게 쳐냈다. 그가 옅게 인상을 찌푸렸다. 적들은 지치지도 않고 두 사람에게 달려 들어왔다.
“오스칼을 조금이라도 다치게 하셨다면, 대공 전하를 죽여버렸을 겁니다.”
에렌을 향해 달려드는 이교도와 근위대원을 묵직한 검격으로 밀어낸 레오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레오의 방어에 화답하듯 빠르게 몸을 물려 적의 후속 공격을 걷어낸 에렌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자네가 내 목숨을 구하는 데 진심인 것 같은데.”
“오스칼이 대공께서 죽는 걸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에렌이 코웃음을 치며 옆구리로 날아오는 적의 칼날을 쳐냈다.
“흥. 그건 나와 같은 생각이군. 내가 여기서 귀염성이라곤 없는 자네를 지켜주고 있는 이유가 뭐겠나?”
“전하께서 절 지켜주고 계신 줄은 몰랐는데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를 한 레오가 검을 휘두르자 적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두 남자는 어느새 등을 맞대고 함께 적을 베어내고 있었다. 웃음기 없는 검은 눈동자와 날카로운 푸른 시선이 쇄도하는 검을 빈틈없이 막아냈다.
“이 배신자! 감히 우릴 속여?”
이제야 중앙 홀에 도착한 드레이코가 에렌을 향해 성난 고함을 질렀다. 숨을 헐떡이던 에렌이 조롱 섞인 농담을 건넸다.
“배신자라고 하기엔, 내가 한 번도 당신들과 손을 잡은 적이 없어서 말야.”
“젠장! 모두 레오폴드 칼릭스와 에르네스트 대공을 죽여!”
드레이코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에렌을 생포하라는 아르투아의 명도 잊은 채 드레이코가 근위대원들과 이교도 병사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근위대원과 이교도 병사가 두 사람을 향해 몰려들었다.
에렌이 달려드는 근위대원의 검을 쳐내며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레오 역시 덤벼드는 이교도의 검을 정신없이 막아냈다.
“제길,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군.”
에렌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반짝이는 금발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교도는 둘째치고, 정규 훈련을 받는 근위대는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에렌 역시 검술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왕국군은 벅찬 상대였다.
그때, 에렌의 어깨 뒤로 칼이 날아왔다.
“윽.”
에렌이 어깨를 붙잡고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깊게 난 자상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레오가 재빨리 에렌을 공격하는 근위대원의 검을 막아냈다.
“괜찮습니까!”
레오가 중심을 잃은 에렌의 곁을 엄호했다. 레오가 지친 눈매로 전장을 둘러보았다.
근위대와 이교도는 끝도 없이 꾸역꾸역 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가뜩이나 간밤의 전투로 지쳐있던 기사단의 청년들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병력의 수도, 사용하는 무기의 질도 압도적인 차이가 났다.
에렌의 사병들과 기사단이 실력을 앞세워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지금이 기회다! 총공격해라!”
드레이코의 지시에 근위대와 이교도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공세를 펼쳤다.
챙!
혼돈 속에서, 덤벼드는 에렌의 사병 하나를 베어버린 드레이코가 형형한 눈으로 레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레오가 입술을 짓씹었다. 한번 겨루어본 드레이코는 쉽지 않은 상대였다.
쏟아지는 근위대와 이교도의 검 세례 속에서, 부상이 심한 에렌을 엄호해 가며 드레이코를 상대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레오가 절망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뿌우우- 뿌우-
그 순간, 성문 밖에서 굵직한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레오가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부, 북부의 뿔 나팔 소리다!”
이마가 찢어진 채 피범벅이 된 얼굴로 싸우고 있던 드미트리가 환호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뿔 나팔 소리가 희미해질 무렵, 우렁찬 함성과 전투 군단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로잘린의 전보를 받은 북부 영지의 연합군이 차가운 북쪽의 바람을 몰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