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이걸 가지고 곧장 아르투아 대공저로 가. 이 방의 뒷문으로 나가면 단테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느릿하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 귀에 익은 에렌의 음성에 오스칼이 번뜩 고개를 들어 에렌의 눈을 바라보았다.
깊은 호수 같은 푸른 눈. 분명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몽롱한 시선이 아니다.
“당신….”
오스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오스칼과 눈을 마주친 에렌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
“반역을 일으키고, 방해꾼을 제거하세요. 전하가 왕이 된다면 승리의 대가로 꽃을 손에 쥐게 될 겁니다.”
잔느가 그를 찾아왔던 밤, 눈앞에서 마도구를 확인한 에렌은 잔느가 그를 반역에 이용하리라는 속셈을 단숨에 간파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잔느의 계략을 역으로 이용할 방법을 구상했다.
그러나 마도구의 유혹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 역시, 자칫 검은 구슬에 정신을 빼앗길 뻔했다.
그 마도구가 사람의 욕망과 열등감을 빨아들여 마법을 부린다고 했던가. 구슬은 집요하게 그의 정신을 헤집어 놓았다.
“날 위해 전하가 평생 지켜온 신념을 버리지 말아요.”
점점 흐릿해지는 머릿속에서 반짝, 빛이 떠올랐다.
오스칼은 그녀 때문에 그가 신념을 버리길 원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녀의 올곧은 녹색 눈동자가 그를 붙들었다.
오스칼을 향한 마음을 욕망과 열등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쨍그랑-
에렌은 쓰러지는 척 테이블 위의 술병을 깨뜨려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유리가 살갗을 파고들며 자아내는 고통에 입술을 깨물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쓰라린 감각은 인쇄소에서 오스칼을 지키기 위해 검을 쥐었던 감각을 떠올리게 했다.
‘이번엔, 그대가 날 좀 지켜줘.’
정신이 흐려질 때마다 그는 단단히 손을 말아쥐었다. 덕분에 에렌은 잔느가 떠날 때까지 의식을 유지해 마도구에 정신을 잠식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스칼이 계약서를 들고 그를 찾아온 그 날, 오스칼이 그에게 했던 말은 그의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했다.
“혈통이나 신분이 아니라 신념이 내 가치를 결정하는 거죠. 전하는 제 것이 아닌 걸 탐내지 않겠다는 신념을 평생 지키려 노력해왔고…. 전하야말로 사람의 진짜 가치를 아는 사람이잖아요.”
에렌은 악역을 자처해서라도, 아르투아와 잔느의 모든 것을 끝장내리라 결심했다.
그는 계획을 완성하자마자 대공저를 비우고 사용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냈다.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반역자의 식솔들은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아르투아가 안심하도록 그자의 뜻대로 군사를 움직였다. 단테는 그의 주인이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에렌은 개의치 않았다.
이제 그에게 명예나 체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단테, 평생 지켜온 신념을 내버리는 건 멋이 없잖아. 내 것이 아닌 건, 탐내지 말아야지.”
에렌이 흐리게 미소지었다. 후련한 듯한 목소리였다.
마침내, 그가 의도한 대로 오스칼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아닐 줄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한번쯤은 투정을 부려보고 싶었다.
“내가 고작 나 하나 때문에 정의도 신념도 버리는 남자를 사랑할 리 없잖아요.”
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났다.
‘역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니까.’
이제, 오스칼에게 모든 것을 밝힐 시간이었다.
***
“당신과 교환한 인질 중에 궁에 심은 내 첩자가 섞여 있어, 그가 레오폴드 칼릭스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할 거야. 아르투아에겐 국왕을 죽였다는 거짓말을 흘릴 거고. 드레이코가 이끄는 근위대가 성으로 진입하면, 기사단과 내 사병이 협력해 한 곳에 모인 근위대와 이교도를 칠 거야.”
“그게 무슨…. 이 일을 전부 당신이 계획한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오스칼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거렸다. 에렌이 푸른 눈을 접어 싱긋 웃었다.
“그렇게 해야 이교도 병사와 근위대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아르투아가 궁의 어디까지 장악하고 있는지도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잔느의 저택을 수색할 때도 왕궁에서 정보가 새어 나갔잖아. 궁인 중에 누가 아르투아의 사람인지 확인이 필요했어. 그래서 그와 한패인 척 끄나풀을 가려낸 거야. 그들은 지금 연회장에서 내 사병의 감시를 받고 있지.”
“나는…. 나는 정말 당신이 흑마법에 세뇌당한 줄 알고…!”
에렌에게 속았다는 억울함과 북받치는 안도감에 오스칼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그 모습에 에렌이 양손으로 오스칼의 뺨을 감아쥐었다. 그리고 말랑한 볼을 양쪽으로 쭉 늘려 잡아당겼다.
“이 아가씨야, 날 뭐로 보고. 내가 누군가에게 열등감 따위를 가질 사람으로 보여? 나같이 완벽한 남자가? 그대는 항상 날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에렌이 웃음이 담긴 타박을 했다.
“미리 말을 해줬어야죠! 만약 기사단이 나서지 않았으면 전부 소용없잖아요!”
“내가 왕국민들을 인질로 잡았다고 하면, 달려올 걸 알았거든.”
오스칼의 볼멘소리에 에렌이 입꼬리를 올리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검투 대회 날, 칼릭스는 왕위 다툼에 끼어들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왕국민이 달린 일은 달랐다. 에렌은 칼릭스가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 이 일에 틀림없이 나서리라 확신했다.
“게다가 기사단이 저와 인질을 교환하지 않는다고 했다면 어쩔 뻔했어요!”
“그대라면 분명 내 제안에 응할 거라고 생각했어. 설령 칼릭스가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마드모아젤이잖아.”
에렌이 다정한 눈으로 오스칼을 응시했다.
늘 예상할 수 없는 행동으로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던 마드모아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오스칼을 잘 알았다. 정의롭고, 올곧은 여인. 그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오스칼.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코끝이 새빨개진 오스칼이 원망 섞인 눈빛으로 에렌을 바라보았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당신이란 사람은 역시 나 하나 때문에 정의도 신념도 버리는 남자는 아니었군요!’라고 하려던 거 아니었어?”
“윽.”
오스칼의 볼을 달래듯 살짝 꼬집은 에렌이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이제 시간이 없어. 이런 상황에서 침실에 종일 처박혀 있으면 이교도들도 의심할 거라고. 물론 혈기왕성한 남색가로 소문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 이런 상황에서 그런 농담이 나와요?”
오스칼이 얼굴을 붉히며 볼을 부풀렸다. 그 반응에 에렌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오스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르투아와 발사자르는 겁쟁이들이니 왕궁이 정리되기 전까진 아르투아 대공저에 있을 거야. 그대가 대공저에 가서 그들을 끝장내. 국왕이 죽었단 소리가 들리면 이교도와 근위대는 모두 궁으로 올 테니, 그곳엔 소수의 병력만 남아 있을 거야.”
오스칼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렌을 향해 다짐을 받듯 말했다.
“몸조심해요. 당신이 세뇌되지 않았다는 걸 알면 그들이 당신을 가장 먼저 공격할 테니까요.”
“내 걱정은 하지 마. 그대야말로 조심해. 물론 누구보다 잘하겠지만.”
에렌이 코를 찡긋해 미소를 지으며 침실에 딸린 뒷문을 가리켰다.
오스칼과의 만남에 이 방을 고른 이유 역시, 성 바깥과 연결된 통로가 있는 방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에렌.”
오스칼이 문을 나서기 전 뒤돌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에렌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그는 문을 나서려는 오스칼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오스칼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잠깐 머뭇거리던 에렌이 오스칼의 뺨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오스칼이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정도는… 하게 해줘. 친구 사이에 작별인사로도 하는 거니까.”
오스칼이 기분이라도 상할까, 에렌이 변명하듯 말했다. 그의 말에 오스칼이 단호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작별이라고 하지 말아요. 당신, 혹시라도 잘못되면 가만히 안 둘 거니까.”
몸조심하라는 말을 살벌하게도 하는 오스칼의 말에 에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알았어.”
미소로 화답한 오스칼이 에렌의 검을 손에 쥐고 바깥을 향해 달렸다.
***
기사단의 청년들은 조금 전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대혼란 상태였다.
“바, 방금…. 단장님과 오스칼 형님이 뭘 한 거지…?”
“뤼미에르 기사단은 이제 남색가 기사단으로 불릴지도 모릅니다!”
“아아, 기사단장님이 남색가라는 건 조금 창피한 것 같기도….”
청년들을 다독여야 할 마티스 역시, 그가 목격한 상황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코앞에서 남색가들의 키…키…를 목격하게 될 줄이야.’
차마 그 단어를 전부 떠올리지 못한 마티스가 머리를 헤집었다.
레오 녀석의 마음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이 쌍방향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에르네스트 대공이 인질로 오스칼을 요구했다는 건….
‘요컨대, 칼릭스 공작가의 누명, 에르네스트 대공의 반역, 이교도 군대 그리고 흑마법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이 엄청난 상황의 중심에 남색가들의 삼각관계가 있다는 거잖아?’
마티스가 아찔한 현실에 식은땀을 흘렸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다더니, 이건 제라드의 소설보다 더 매웠다.
이윽고, 오스칼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고 서 있던 레오가 등을 돌려 저벅저벅 기사단을 향해 걸어왔다. 레오가 단원들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입에서 과연 무슨 말이 나올까? 이대로 오스칼 형님과 결혼 발표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성안의 이교도들과 대치 중이라는 현실도 잊은 청년들이 레오의 입을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곧 성에서 인질들이 나올 거다. 인질의 신원을 철저히 확인하도록. 인질들의 안전이 확보되면 언제든 성안으로 진입할 준비를 한다.”
짧은 지시를 마친 레오가 뚜벅뚜벅 제 위치로 향했다. 단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폭풍 같은 상황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구는 사람은 사건의 당사자, 레오뿐이었다.
두 사람의 입맞춤에 잠깐 정신이 빠져 멍하니 서 있던 마티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는 단원들을 향해 상황을 설명했다.
“…이런 이유로, 오스칼은 인질을 구하기 위해 자진해서 성으로 들어갔어. 그러니 다들 오스칼의 결심이 헛되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도록!”
그러자 기사단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두 분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왕국민을 구하기 위해 헤어져야 했던 거군요! 그게 작별의 입맞춤일 줄이야!”
“그런데도 어쩜 단장님은 그렇게 의연하게 끝까지 왕국민을 걱정하시고….”
“역시 두 분은 진정한 기사도 정신을 가진 기사들이십니다.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아요!”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한 청년들은 제라드 없이도 레오와 오스칼의 비극적인 로맨스 스토리 한편을 뚝딱 만들어냈다.
끼이익-
그때, 성벽의 쪽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단테의 약속대로 성벽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이교도 병사들은 어딘가 찜찜해하면서도, 에렌의 지시에 따라 인질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초조하게 인질들을 기다리던 왕국민들은 성문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연신 기사단을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사들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인질들의 신분을 하나씩 확인했다. 인질 사이에 이교도가 숨어들어 그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신분을 확인받던 인질 중 한 사람이 마티스를 향해 은밀히 속삭였다.
“에르네스트 대공께서 레오폴드 칼릭스 경께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