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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104)화 (104/138)

104화



 

평소엔 사람들로 북적이던 성문 앞 광장은 텅 비어있었다. 인질로 잡혔다는 사용인들의 가족들만 모여들어 발을 동동 굴렀다.

성문은 굳게 잠겨 열리지 않았고, 성벽 위엔 이교도 병사들이 줄지어 흉흉한 기세로 성 바깥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곧 온다는 근위대는 왜 나타나질 않는 걸까요?”

“사용인은 그렇다 해도, 국왕도 갇혔다는데 왜 귀족 중에도 나서는 자가 없는 건지!”

“흑흑, 제 남편이 갇혔다고요!”

애타는 심정으로 몇 시간째 기다려보아도 근위대는 물론, 기사나 사병을 거느린 귀족들 역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성 바깥에서 왕국민들은 가족과 친구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눈물을 글썽였다.

뿌우우-

그때, 청명한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성벽에 서 있던 이교도 병사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뒤이어 우렁찬 말발굽 소리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뤼미에르 기사단이다!”

“카, 칼릭스 님이야!”

기사단의 등장에 왕국민들이 안도의 탄성을 내질렀다.

이윽고 뤼미에르 기사단이 모든 전력을 갖추고 굳게 닫힌 성문 앞에 도열해 섰다. 화려한 휘장이나 상징도 없는 기사단이었지만, 늠름한 위용이었다.

그 모습에 이교도 병사들이 당황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성안의 이교도들은 기사단의 등장에 당황한 듯 동요하고 있었다.

“이다음엔 근위대가 들이닥치는 거 아니었어?”

“근위대가 오면 적당히 저항하는 척하다가 항복하면 된다며!”

에렌과 함께 궁을 점령하긴 했으나 객관적으로 그들의 전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막아서는 근위대가 없어 손쉽게 국왕을 제압할 수 있었을 뿐, 기사단과 전투가 벌어진다면 유리할 것이 없었다.

기사단의 선두에 선 레오가 성벽에 선 이교도 병사를 찌르듯 응시하며 외쳤다.

“에르네스트 대공, 민간인들은 모두 풀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기사단은 성으로 진입할 겁니다.”

레오의 전언에, 병사 하나가 허둥지둥 성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다른 이교도 병사들은 그 위협적인 광경에 침을 삼킬 뿐이었다.

***

왕궁의 알현실,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남자가 에렌을 향해 중얼거렸다.

“이제 왕국에 전하의 얼굴을 모르는 자가 없을 겁니다. 반역자로 벽보가 붙었으니까요.”

“뭐, 사실이니까.”

에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긴 손가락으로 그가 앉아 있는 화려한 왕좌의 팔걸이를 쓰다듬었다.

“국왕에 사용인까지 인질로 잡으셨으니, 평판이 엉망이겠군요.”

“뭐,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명예나 체면 같은 게 아니거든.”

그 말에 단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마, 오스칼 님도…. 욕이란 욕은 다 하고 계실 겁니다.”

에렌의 얼굴 위로 씁쓸한 빛이 잠시 스쳤으나, 이내 여상한 얼굴을 하고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겠지. 그래도 욕을 할 수 있다는 건 고무적이야. 적어도 무사하다는 거니까.”

단테에게서 시선을 돌린 에렌이 금빛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댔다. 그리고 기다란 양피지 두루마리에 적힌 이름을 훑었다.

잠시 뒤, 에렌이 왕좌 근처에 선 이교도 병사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래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분류해 두었나?”

“예. 그 명단에 있는 분들은 따로 마련된 연회장에 모셨습니다. 나머지 인원은 지하 감옥에 가둬두었고요.”

“그래. 연회장의 인원은 피해가 없도록 내 사병을 통해 각별히 보호하도록.”

양피지에 적힌 것은 아르투아에게 매수된 관료나 궁인들의 명단이었다.

왕궁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성문을 열어 에렌을 도운 자들이기도 했다. 아르투아는 그들을 살려두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때, 알현실로 이교도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레, 레오폴드 칼릭스가 이끄는 기사단이 성 앞에 진을 쳤습니다! 인질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그 말을 들은 에렌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는 여유롭게 자신의 긴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았다. 양손을 모아 깍지를 낀 채 제 얼굴 앞으로 가져온 그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예상대로군. 역시 인질을 잡으면 정의의 사도들이 나설 줄 알았다니까.”

에렌이 즐거운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리고는 단테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

성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양 진영 사이에 고요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기사단의 전열에서 말의 투레질 소리와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만 드문드문 울렸다.

끼이익-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육중한 성문이 서서히 열렸다.

성문 사이로 무장한 남자가 등장했다. 그는 이교도 병사 넷의 호위를 받으며 기사단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에르네스트 대공 전하께서 뤼미에르 기사단의 레오폴드 칼릭스에게 보내는 전언이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곧이어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레오와 오스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무표정하게 고갯짓으로 중간 지역을 가리켰다.

그 의미를 알아챈 레오와 마티스, 그리고 오스칼이 중간 지역으로 향했다.

어느덧 기사단의 도열과 성문의 사이, 가운데쯤에서 양 진영의 대표자들이 마주 보고 대치했다.

“당신을 보니, 저 안에 있는 게 에렌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는군요.”

오스칼이 단테를 향해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교도들의 호위를 받는 단테를 보니, 절망감이 밀려왔다. 레오 역시 가라앉은 눈으로 단테를 응시했다.

그러나 단테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레오와 오스칼의 반응에도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은 단테는 건조한 음성으로 제 주인의 말을 전달했다.

“인질을 내보내면 무리하게 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지요.”

“무고한 왕국민을 전투에 휘말리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레오가 딱딱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그러자 단테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제 주인께서 전하시더군요. 당신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고, 당신들이 그렇게 당당하게 무언갈 요구할 상황이 아니라고요.”

레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뜻입니까. 인질들은 모두 무사한 겁니까.”

“아직은 그렇습니다.”

“그 말은 곧 그러지 않을 거라고 들리는데요.”

오스칼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신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당신들이 조금이라도 무력을 행사하는 순간 갇혀있는 인질들은 몰살될 겁니다.”

오스칼의 얼굴이 잔뜩 흐려졌다. 그리고는 애원하듯 말했다.

“단테. 당신은 에렌의 가장 충직한 부하잖아요. 제발 에렌을 설득해요. 그는 지금 함정에 빠진 거라고요!”

“충직한 부하의 본분은 주인의 명을 그대로 따르는 거지요. 그리고 이게 바로 제 주인이 원하시는 겁니다.”

단테의 곁에 선 이교도들이 오스칼을 향해 이죽거렸다. 참아내듯 주먹을 움켜쥔 레오가 단테를 노려보았다.

“그자가 당신을 보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는 말을 전한다는 건,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다는 것으로 보이는데.”

단테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해가 빨라서 좋군요. 전하께서 원하시는 건 명료합니다. 인질의 교환이지요.”

단테의 말을 들은 레오의 턱이 불안하게 솟아올랐다.

“교환이라니 그게 무슨…?”

마티스가 눈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 물음에 곧, 단테의 시선이 오스칼을 향했다.

“인질과 오스칼 님의 교환입니다.”

“뭐라고?”

“네?”

마티스와 오스칼이 눈을 크게 뜨고 새된 소리를 냈다. 단테는 그 반응에 아랑곳없이 다시 한번 천천히 에렌이 요구한 조건을 반복해 읊어주었다.

“오스칼 님을 궁으로 들여보낸다면, 인질들을 모두 안전히 풀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마티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그분께서 제안하신 협상 조건은 그것뿐입니다.”

“싫다면?”

레오가 으득 씹어 문 잇새로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제가 빈손으로 돌아간 이후부터 인질들을 10분에 한 사람씩 처형할 겁니다. 물론, 기사단에서 성문을 열고 강제로 진입하는 경우엔 즉시 모두를 사살할 겁니다. 즉, 지금부터 사람들이 흘릴 모든 피는 모두 당신들 때문인 거지요.”

단테의 회색 눈동자가 오스칼을 시험하듯 지그시 응시했다. 오스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왜…. 대체…. 그 사람이…. 그런 요구를 하는 거죠?”

오스칼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단테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말 그 이유를 모르시진 않겠죠. 오히려 그분은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다.”

“자비라니 무슨 헛소리야?”

마티스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솔직히 대단한 요구도 아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요구하신 건 겨우 당신 한 사람뿐입니다. 당신만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궁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이 안전해지겠지요.”

“당신은 생명을 하나, 둘 숫자로 세나? 하나와 여럿의 목숨을 바꾸는 게 자비라고?”

“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오스칼 님의 목숨이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단테가 서늘한 눈으로 레오를 응시했다. 레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으스러질 정도로 움켜쥔 그의 손등 위로 핏줄이 튀어나왔다.

단테가 손끝으로 성벽 아래에 난 쪽문을 가리켰다.

“인질들이 저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오스칼 님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즉시, 인질들은 저 문을 통해 해방될 겁니다. 물론 반대의 상황엔 저 문으로 시체가 던져지겠죠.”

“이 비열한 자식!”

마티스가 울부짖듯 외쳤다. 오스칼의 투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가만히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인사할 시간이 필요해요.”

레오와 마티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오스칼은 담담한 태도로 기사단이 늘어선 방향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게 무슨 말이야? 대공의 제안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기사단이 너와 인질을 교환할 일은 없어!”

마티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분통을 터뜨렸다. 오스칼이 차분한 눈으로 마티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정말 인질들이 위험할지도 몰라. 설령 대공이 인질을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더 지체했다간 아르투아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더러운 자식! 네게 같잖은 수작을 부릴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마티스가 경멸이 담긴 눈으로 성문을 노려보았다.

길거리의 벽보와, 레오의 설명으로 기사단 청년들은 모두 인쇄소의 에렌 경이 에르네스트 대공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참이었다.

오스칼이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아르투아에게 조종당하고 있을 거야. 내가 그를 설득해 볼게. 세뇌가 풀릴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네가 인질들을 대신해 들어가겠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아. 어쨌든 내가 들어가면 인질들은 풀려날 거고, 인질이 없으면 기사단이 움직이기도 편할 거야.”

마티스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서렸다. 오스칼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저들이 성에 무고한 왕국민을 가둬둔 것만으로도 기사단에게 크게 불리했다. 인질만 풀려나면 운신의 폭이 커진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에렌은 다 잡아둔 인질을 오스칼 한 사람과 교환하는 손해 보는 협상을 하는 중이었다.

“흑마법에 의한 세뇌라는 게…. 설득으로 풀어지는 건가.”

잠자코 말이 없던 레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스칼의 눈썹이 기울어졌다.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어떻게든 두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꺼내 본 말일 뿐이었다.

오스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인질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국왕이 처형당하고 아르투아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정말 늦어버리고 말아. 이제 나 때문에 누군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너는? 너는 다쳐도 된다는 건가?”

레오의 목소리가 울컥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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