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기사단이 습격당했다는 전갈을 받은 로잘린은 부랴부랴 사용인 몇 명을 데리고 달려왔다.
처참한 뤼미에르의 모습에 로잘린은 크게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로잘린은 이내 능숙하게 수습을 돕고는, 서둘러 제라드를 의원으로 데려갔다.
곧바로 마티스의 인솔에 따라, 중요한 짐만 챙긴 기사단이 빠르게 새 본부를 향해 이동했다.
건물 안은 꽤 널찍했다. 뤼미에르 가옥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따뜻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로잘린 영애께서 인원이 늘어나면 새 본부가 필요할 거라고 해서 준비해 오던 곳인데….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이야.”
마티스가 착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새로운 본부 안으로 기사단의 모든 기사가 소집되고, 드미트리가 보고를 시작했다.
“다행히 신입 기사들은 오전에 훈련을 마치고 돌아갔고, 본부엔 노련한 기사들만 남았던 터라 피해가 적었습니다. 폭발에 정신을 잃은 기사들 역시 제라드가 빨리 다른 곳으로 옮겨둔 덕에 큰 부상이 없습니다.”
“제라드 녀석이 보호장구를 착용하라고 한 덕분에 살았지…. 폭발에 우리 모두 정신을 잃었다면…. 생각하기도 싫군.”
마티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역시, 제라드 덕분에 보호장구를 착용해 정신을 잃지 않았다. 폴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껏 단장님을 노린 국왕 쪽 자객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대규모의 인원을 동원해 본부를 노린 경우는 없지 않았습니까?”
“습격자들의 시체를 살폈는데, 이교도와 일반 용병이 섞여 있었습니다.”
드미트리의 보고에 마티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교도와 용병이 협력해서 기사단 본부를 노렸다고? 대체 이유가 뭐야?”
“모든 것이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레오가 굳은 얼굴로 청년들을 돌아보았다. 의아한 얼굴로 단장을 바라보는 청년들을 향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레오의 설명을 들은 단원들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너희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단장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정말… 미안하다.”
“레오, 난 네게 정말 실망했어.”
짐짓 화가 난 듯 마티스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의 말에 본부 안의 공기가 차게 식었다.
레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그 일을 네 개인적인 일이라고 할 수가 있어? 그동안 그렇게 위험한 일들을 너와 오스칼 둘이서 했단 거야?”
“맞습니다, 단장님! 개인적인 일이라니요. 단장님의 일은 우리 기사단의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기사단을 사지로 몰아넣고, 위협해 온 게 그 사악한 자들이란 것 아닙니까.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어두운 힘을 이용해 왕국을 차지하려 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당연히 우리 기사단이 막아야 하는 일입니다.”
“뤼미에르 기사단은 왕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까? 왕국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면 지금보다 더 심한 폭정이 있을 겁니다.”
청년들이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거들었다.
“우리 모두 널 따라 왕국민을 지킬 거야.”
마티스의 단단한 목소리가 본부에 울려 퍼지자 다른 단원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를 향해 진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레오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위험할지도 모른다.”
“위험을 두려워하면 진정한 기사가 아니지요!”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 그게 기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며 단장님께서 늘 강조하시지 않았습니까.”
청년들이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오스칼 역시 먹먹한 얼굴로 단원들을 바라보았다.
쾅!
그때, 본부의 문이 벌컥 열리고, 기사단의 이목이 쏠렸다. 급히 뛰어들어온 신입 단원, 패트릭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에르네스트 대공이… 왕궁을 점거했답니다!”
***
우아한 걸음 뒤로, 거친 군홧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왕궁 복도에 깔린 화려한 붉은 카펫은 무지막지한 걸음에 짓밟혀 엉망으로 찢겨나갔다.
평생 애써 외면해왔던 그 자리는, 너무도 쉽게 손에 굴러들어왔다.
잔느가 알려준 장소에 결집한 이교도 군대를 이끌고 왕궁에 들어서기까지, 그의 앞을 막아서는 자가 없었다.
아르투아가 미리 매수해 둔 자들 덕분에 성문은 별다른 저항 없이 열렸고, 성을 지킬 병사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침내 국왕의 침실 앞에 선 에렌이 피식, 조소를 머금었다.
콰앙-
이교도 병사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침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술에 취해 잠들어 있던 국왕은 갑자기 들이닥친 에렌의 반역군에 혼비백산해 일어났다.
잠옷 차림으로 에렌을 마주한 국왕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었다. 에렌의 등 뒤에는 이교도 병사와 에렌의 사병이 죽 늘어서 있었다.
“네, 네놈이 기어코…! 여봐라. 아, 아르투아 대공, 그리고 근위대는 어디 있느냐?”
국왕의 의미 없는 부름에, 에렌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글쎄요, 텅 빈 제 저택을 지키고 있으려나요.”
“그, 그래! 네놈을 잡으러 간다고 하셨는데. 곧 숙부님이 널 응징하러 올 거다!”
“형님. 왜 아직도 모르십니까. 숙부는 제가 형님을 죽이기 전까진 오지 않을 겁니다.”
“뭐, 뭐라고?”
“제게 반역자가 될 방법을 알려준 자가 누구겠습니까?”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숙부께서 제가 왕궁에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셨더군요. 숙부께서 절 체포하기 위해 모든 군사를 성 밖으로 내보낸다고 하시지 않던가요.”
“너…. 너와 숙부가 함께 꾸민 일이란 말이냐?”
에렌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색이 된 국왕을 향해 에렌이 씁쓸하게 웃었다.
“대공 전하, 국왕을 즉시 처형할까요?”
이교도 병사가 국왕을 향해 검을 겨누며 눈을 번뜩였다. 국왕이 겁먹은 얼굴로 에렌을 응시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에렌이 그런 국왕에게 잠깐 눈길을 주다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니, 숙부가 너무 일찍 등장하면 곤란해. 이번엔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줬으니, 나도 내가 원하는 걸 얻어야 하지 않겠어?”
한쪽 입꼬리를 설핏 올린 에렌이 고갯짓을 하자, 그의 사병이 국왕을 단단히 포위했다.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북쪽 탑에 가두고 감시해.”
“존명.”
국왕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에렌을 바라보았다.
에렌은 사병에게 끌려나가는 국왕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에렌이 국왕을 바로 처형하지 않아 약간 당황한 기색이 된 이교도 병사들을 서늘하게 응시했다.
“너희는 지금부터, 왕궁 안을 정리해 줘야겠어.”
***
에르네스트 대공이 군사를 이끌고 왕궁을 점령했다는 소식은 수도 전체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 소식을 들은 기사단 역시 침통한 분위기였다.
“에르네스트 대공이 이교도 군대를 움직였다고 합니다. 궁의 경비는 터무니없이 허술해서 대공이 순식간에 궁을 장악하고 국왕을 탑에 감금했답니다.”
“젠장! 솔직히 국왕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형제들의 왕위 다툼에 우리가 끼어들 필요가 없는데….”
마티스가 갈등하듯 머리를 헤집었다. 레오 역시 생각이 복잡한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이미 기사단은 어젯밤의 전투로 전력이 정상이 아니었다.
설령 에렌이 잔느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해도, 굳이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국왕을 구하러 나설 이유는 없었다.
곧, 패트릭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왕궁의 사람들이 모두 인질로 잡혀있다고 합니다.”
“뭐? 병사도 아니고, 일반 왕국민을 인질로 잡았다는 건가?”
뜻밖의 이야기에 레오가 눈썹을 일그러뜨리고는 으르렁거렸다.
“궁에서 일하는 대신, 관료, 시종을 포함해서 잡역부나 사용인들까지 모두 포로로 삼았답니다.”
오스칼 역시 눈을 크게 뜨고 패트릭을 바라보았다. 에렌이 그런 짓을 하다니. 정말 그녀가 아는 에렌이 맞는 걸까?
오스칼이 휘청이듯 이마를 짚었다. 마티스가 분통을 터뜨렸다.
“젠장, 왕국민을 인질로 삼다니! 제정신이야?”
마티스가 욕을 중얼거렸다. 드미트리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공이 국왕을 바로 죽이지 않고 민간인을 인질로 삼은 이유가 뭘까요?”
“반역을 일으키는 김에, 본격적으로 악당이 되기로 작정한 모양이지. 아니면 누군가와 협상을 할 일이 남았거나.”
마티스가 눈을 사납게 뜨고는 언성을 높였다. 그 말에 레오의 눈매가 불안한 듯 미세하게 떨렸다.
설마, 대공이 원하는 게….
레오가 마른세수를 했다. 하지만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표정의 레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위 다툼에 왕국민이 휘말리게 둬선 안 돼. 무고한 왕국민을 인질로 잡았다면 그냥 둘 순 없는 일이다.”
기사단원들이 동의하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레오가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인질들의 안전이다. 그러나 반역을 꾸민 자들이니, 그들도 전력을 다하겠지. 죽을 수도, 다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저희는 싸울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싸울 겁니다.”
“그자들이 왕국을 지배하게 되면 저희도 다 죽을 목숨 아닙니까. 어차피 죽을 거라면 싸우다 죽겠습니다.”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단원들이 결의에 찬 목소리를 냈다. 레오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오스칼 역시 동의한다는 듯 또렷한 시선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스칼의 얼굴을 보자 다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가 바짝 마른 입술을 짓이겼다.
***
“제라드 작가님…….”
시에나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의원의 병실에 앉아 로잘린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로잘린은 겨우 차분해진 머릿속을 가다듬었다.
이른 아침, 기사단 본부를 수습하며 오스칼로부터 아르투아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땐, 놀라 손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세상에! 에르네스트 대공이 왕궁을 장악해서 인질을 가두었대요!”
“쯧쯧. 언제까지 형제들끼리 왕위 다툼을 할 셈인지….”
병실 바깥에서 치료사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반역이라고?!”
놀란 로잘린이 창밖을 내다보자, 어수선한 풍경이 펼쳐졌다. 왕국민들은 반역의 불똥이 튈까 봐 상점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고, 시민들은 허둥지둥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에 로잘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오스칼과 뤼미에르 기사단은 분명 위험을 무릅쓰고 나설 텐데.”
걱정스럽게 중얼거린 로잘린이 다시 시선을 돌려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있는 제라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라벤더 빛 눈동자에 단단한 각오가 서렸다.
로잘린은 급히 몇 장의 종이에 글씨를 휘갈겨 써 내려갔다.
그리고는 단단히 봉인한 봉투 몇 개를 심부름꾼에게 전해주며 가장 빠른 전보로 보내 줄 것을 주문했다.
“나도 이렇게 있을 순 없지.”
다짐하듯 주먹을 쥔 로잘린이 어여쁜 입술을 야무지게 다물었다. 종종걸음을 한 그녀가 어느새 텅 비어버린 거리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