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제라드는 의식을 잃은 부상자들을 2층에 숨긴 뒤, 막 아래층으로 내려온 참이었다.
그는 홀로 층계참을 지키느라 탈진해 검을 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시몬에게 제 보호장구를 벗어 입혔다.
푸시식-
폭약의 불꽃이 양동이에 처박혀 꺼지자 괴한은 좌절했다. 그는 분노로 붉어진 눈을 하고 계획을 망쳐버린 오스칼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라드가 오스칼을 향해 달려드는 괴한을 본 건 그즈음이었다. 제라드는 눈을 부릅떴다. 오스칼의 손에 검이 없었다.
내동댕이쳐진 오스칼의 검은 계단 아래를 구르고 있었다.
제라드는 본능적으로 레오를 찾았다.
문가에서 자객을 베어 넘기던 레오 역시 그 모습을 확인한 게 분명했다. 그가 절박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 멀리 있었다.
제라드의 눈이 괴한과 레오 그리고 오스칼, 세 사람을 번갈아 스쳤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형님!”
적의 위치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의 검으로는 도저히 빠르게 다가오는 괴한의 칼을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제라드는 결국 몸을 던져 오스칼의 앞을 막아서고 말았다.
촤악-!
보호장구조차 없는 제라드는 그대로 칼에 가슴을 베였다.
그는 생전 처음 겪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면 머릿속으로 그동안의 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진짜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땐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되고, 몸 안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듯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한발 늦게 도착한 레오가 자객을 쓰러뜨렸지만, 제라드의 다리는 더 버티지 못하고 힘이 풀려 꺾였다.
“아, 안 돼….”
점점 희미해지는 감각 너머 울음 섞인 오스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점멸하는 의식 속에서 제라드는 흐리게 웃었다.
‘다행이야. 이번엔 내가 형님을 구했어.’
그 생각을 끝으로 제라드는 눈을 감았다.
***
“제라드… 안 돼. 제발… 제발!”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제라드를 끌어안은 오스칼의 몸이 무섭게 떨렸다. 레오가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침입자들이 모두 쓰러진 본부 안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피투성이가 된 마티스가 절뚝거리며 달려왔다.
“기욤! 얼른 치료 도구를! 모두 부상자들을 살펴라!”
마티스의 절박한 지시가 이어졌다.
오스칼은 멍한 눈으로 제라드의 몸을 붙들었다. 귓가에서 삐- 소리가 울렸다. 도통 다른 사람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시야가 흐려져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비교적 몸이 성한 청년들이 오스칼의 품에서 제라드를 떼어냈다.
“오스칼. 정신 차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무너지면 안 돼!”
레오가 오스칼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그의 얼굴 근육이 잘게 경련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참아내고 있었다. 오스칼이 눈을 깜빡여 그를 응시했다.
레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소리를 질렀다.
“부상자를 2층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다시 전력을 갖춰라! 공격이 계속될지도 모르니 경계 태세로 입구를 엄호한다.”
레오의 지시에 단원들이 빠르게 대열을 정비했다. 오스칼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몸을 떨었다. 레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다시 오스칼과 눈을 맞추었다.
“상실의 고통에 빠져서 네가 지킬 수 있는 자들을 구할 기회를 놓치지 마.”
레오의 단단한 목소리에 흔들리던 오스칼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오스칼이 눈을 들어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북부의 눈보라 속에서 많은 동료를 잃었지만, 다른 생명을 구해서 돌아왔다. 레오가 오스칼이 놓쳐버린 검을 건넸다.
쏴아아-
여전히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 낯선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밀려오는 절망감을 참아내듯 입을 다문 레오가 오스칼의 곁을 떠나, 청년들의 가장 앞에 섰다. 그의 눈썹 위에 괴로움이 내려앉았다.
그는 겨우 몇 명만 남은 청년들을 돌아보며 낮게 외쳤다.
“침입자들이 본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엄호한다.”
레오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번째 습격이 이어졌다.
두 조로 나뉘어 움직였던 습격자들은 첫 번째 습격이 실패했다는 것을 직감하고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기사단 청년들은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습격자를 막아냈다.
카강!
어둠 속에서 기사단과 습격자, 양 진영의 검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그 소리에, 본부 안에 주저앉아있던 오스칼이 핏기없이 하얗게 질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붉게 물든 손으로 검을 꽉 움켜잡았다.
오스칼이 부들거리는 손으로 바닥의 검을 짚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에서 비를 맞으며 검을 휘두르는 청년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검을 막아내는 청년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지킬 거야.’
눈을 부릅뜬 오스칼이 이를 악물었다. 소맷자락을 힘있게 쥐어 당기자 소매의 천이 뜯어졌다.
곧장, 차갑게 굳어 감각이 없는 손에 검을 쥐고 천을 동여매 고정했다. 그리고 곱아든 손가락 마디로 검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철벅-
마침내, 오스칼이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미친 사람처럼 피하고, 베고, 튕겨내고, 찌르고, 다시 흘려냈다.
오스칼의 검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위압적인 기운이 흘렀다. 기사단의 청년들조차 그 사나운 검격에 몸을 떨었다. 등이 쭈뼛 서는 전율이었다.
하늘에서는 빛 한점 새어 나오지 않는데, 마치 볕이라도 드는 듯 오스칼의 검 끝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오스칼의 손에 묻은 피가 빗물에 씻겨 나갈수록, 그녀의 검날은 붉게 물들었다. 오스칼의 검이 지나갈 때마다, 습격자들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많은 적을 베어 넘겼을까.
그칠 줄 모르던 빗방울이 잦아들고 있었다. 들끓던 신음이 끊기고, 마침내 사위가 고요해졌다. 청년들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우뚝 선 오스칼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검을 묶은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멀리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왔다.
***
빛이 들자,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인 상태의 청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카락엔 끈적하게 피가 엉겨 붙어 있었고, 보호장구와 옷은 원래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검붉게 물이 들어 있었다.
청년들의 몸 곳곳에 베인 자국과 멍이 선연했다.
“나와 마티스가 이곳에 남아 경계를 유지할 테니 부상자들은 모두 2층으로 가도록!”
레오가 여전히 검을 든 채 외쳤다. 밤새 검을 휘둘러 조금 지친 기색이었지만, 그는 꽤 멀쩡한 축이었다.
주위를 살피던 레오의 눈이 오스칼을 향했다. 핏기없이 하얗게 질린 오스칼의 얼굴 위로 연둣빛 눈동자가 도드라졌다. 레오가 입술을 깨물었다.
“형님이 아니었다면 정말…. 간밤을 무사히 넘기기 힘들었을 겁니다.”
다른 단원들을 살피던 드미트리가 비통한 얼굴로 오스칼에게 다가왔다. 그 역시 얼굴이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오스칼은 대답 없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는 오스칼의 코끝에 비린 피 냄새가 스쳤다.
2층에서는 땀범벅이 된 기욤이 오스칼과 레오의 방을 오가며 부상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기욤 역시 다친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다.
오스칼의 침대 위, 피투성이가 된 제라드가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핏기 하나 없는 그의 얼굴은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터져 피가 맺힌 입술을 가까스로 달싹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라드….”
그 소리를 들은 기욤이 다가와 갈라지는 목소리로 오스칼을 불렀다.
“오스칼 형님!”
“제라드는…?”
머뭇거리는 물음에 기욤이 부르튼 손으로 그의 눈가를 쓸었다.
“신이 도왔는지, 급소를 피했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깊어 출혈이 심합니다. 의식이 없어요. 즉시 의원으로 옮겨야 합니다.”
살아 있구나.
오스칼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터벅터벅 방을 빠져나왔다. 몇 시간 전까지 아늑한 보금자리였던 뤼미에르는 이제 없었다.
시체와 피로 범벅이 된 응접실을 건조한 얼굴로 지나, 밖으로 나왔다.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자니, 막 떠오르는 태양 빛에 눈이 시렸다.
오스칼이 잔뜩 눈을 찌푸리자, 등 뒤에서 커다란 손이 불쑥 오스칼의 이마 위를 가려왔다.
“의식을 잃었던 녀석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다는군.”
레오의 낮은 목소리가 오스칼을 위로하듯 귓가에 스쳤다. 오스칼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제라드는… 분명 괜찮겠지? 네가… 분명 아무도 죽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오스칼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괜찮을 거다.”
“나 때문이야. 나를 구하려다가….”
오스칼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레오가 오스칼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눈을 마주하자 참았던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레오가 오스칼을 토닥였다.
“그렇지 않아. 오늘 밤, 네가 많은 사람을 구한 거다.”
“하지만… 내가… 내가 너희 앞에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 소설의 끝을 보려 하지만 않았어도. 다른 방법으로 레오를 도왔다면. 아르투아와 잔느를 자극하지 않았다면. 내가 주위를 더 경계했다면.
숱한 회한과 자책이 오스칼의 마음을 괴롭혔다.
내가 레오를 남자주인공으로 엮어 기사단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오히려 이들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널 만난 건 우리에게 다시 없을 행운이었다. 내게도, 제라드에게도 마찬가지야. 네 덕에 소설가가 되었다며 신이 난 녀석이었잖아.”
레오의 목소리에 어느새 넘쳐흐른 눈물이 시야를 흐리고 서러운 울음이 터졌다. 레오가 오스칼을 품에 안았다.
오스칼이 레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레오의 손이 위로하듯 오스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덕 너머, 잿빛 눈동자의 남자가 몸을 낮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 바람결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모습이 스르르 사라졌다.
***
아르투아 대공저의 집무실.
화가 나 어쩔 줄 모르는 남자가 잔뜩 머리를 조아린 남자를 향해 폭언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젊은 청년은 어딘가 따분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집무실의 유일한 여자는 한심하다는 듯 세 남자를 봤다.
“이 멍청한 것들! 고작 오합지졸 몇을 상대하지 못해? 칼릭스 그놈이 없으면 그 기사단도 별 것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그게… 처음엔 우리 쪽이 우세했는데…. 중간에 레오폴드 칼릭스가 합세하는 통에….”
“아무리 그래도 이교도에, 큰돈을 들인 용병까지 지원했는데 실패해?”
“반격이 워낙 거셌다고….”
와장창-
아르투아는 죽을상을 하고 습격의 결과를 보고하는 드레이코를 향해 있는 힘껏 꽃병을 집어 던졌다.
검투 대회 날 아르투아에게 맞아 생긴 드레이코의 상처 위로 커다란 혹이 하나 더 생겼다.
“이제 우리 일을 방해할 만한 자들은 그 빌어먹을 기사단 놈들뿐인데! 그걸 처리를 못 하다니, 그러고도 자네가 근위대장인가!”
아르투아가 부아가 치민다는 듯 소리를 질러댔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잔느가 고개를 저었다.
‘일이 이리될까 봐 칼릭스가 자리를 비운 틈에 습격하라고 일러주었건만.’
칼릭스는 강한 자이니, 오스칼을 미끼로 해 에르네스트 대공의 손을 빌려 제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미리 자객을 보내 기사단의 힘을 뺄 작정이었는데, 처음부터 일이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잔느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스칼이란 자는 어찌 되었습니까?”
“일단 무사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다행이군요. 그자는 에르네스트 대공이 일을 마무리할 때까진 미끼로 이용해야 합니다.”
“그 기사단 놈들이 아무리 실력이 좋다 해도, 간밤의 습격으로 전력이 온전하진 못할 겁니다. 그러니 근위대와 이교도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아르투아가 잔뜩 인상을 쓴 채 드레이코에게 쏘아붙였다.
“에르네스트 그놈이 왕궁에 들어가 국왕을 죽이면 자네가 그놈 저택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근위대를 이끌고 궁에 진입해. 에르네스트를 생포해 두라고.”
“그, 그럼 대공 전하께서는….”
드레이코가 우물쭈물 말을 건넸다.
“난 자네가 그놈을 생포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발사자르와 함께 병사를 이끌고 들어갈 거야. 반역자의 목숨을 거두는 건 내가 직접 해야 하지 않겠나.”
결국, 위험한 상황은 저 멀리 피해 있겠다는 소리였다. 드레이코가 불만 어린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연신 하품을 하며 그들의 대화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던 발사자르가 그제야 불쑥 끼어들었다.
“일이 끝나면 어쨌든 세레나, 아니 오스칼은 제가 차지하면 되는 거죠?”
“허튼소리 말아라.”
눈치 없는 발사자르의 발언에, 잔느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리고는 남자들을 향해 차갑게 지시했다.
“여러분들은 시에나에 남아 이번 일을 철저히 처리하도록 하세요. 난 이제 샤르트르로 갈 겁니다. 따로 알아볼 것이 있어요.”
서슬 퍼런 잔느의 목소리에 세 남자가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