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앗! 차가워.”
주방에서 설거지하던 오스칼이 얼음장 같은 물에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건만, 응접실에서 무기를 손질하던 레오가 허둥지둥 오스칼의 등 뒤로 달려왔다.
“나중에 내가 한다니까 왜 네가 하고 있나.”
“고작 접시 몇 개 씻는 건데, 누가 하든 무슨 상관이야. 한가한 사람이 하면 되지.”
“네 손이 꽁꽁 얼었잖나. 물도 데우지 않고 그대로 한 건가?”
“아직까지 불피우는 건 자신 없거든.”
오스칼이 겸연쩍게 웃었다. 여전히 이 세계의 불피우는 방식엔 적응하지 못했다.
레오가 못마땅하다는 듯 빨갛게 부르튼 오스칼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얼른 오스칼의 손을 제 손안에 쥐었다.
커다랗고 뜨거운 레오의 손이 오스칼의 손을 감싸자 얼었던 오스칼의 손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쩐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오스칼이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곧잘 추위를 타는 너 때문이라도 얼른 겨울이 끝났으면 좋겠군.”
레오가 제 손에 쥔 오스칼의 손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 넣으며 말했다.
그는 특별히 좋아하는 계절이 없었다. 어떤 계절이든 간에 그에게 기억할 만한 좋은 추억이 없기 때문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온 탓에 계절감을 느낄 새 따위는 없었다.
그저 흐르는 시간일 뿐이던 그의 나날에, 계절을 불러온 사람은 오스칼이었다. 그에게 계절이란 오스칼과 보낸 특별한 날들로 기억되었다.
오스칼과 노숙을 하며 들었던 여름 풀벌레 소리. 잠을 이룰 수 없던 가을밤, 오스칼이 떠난 빈 의자 위에 내려앉았던 붉게 물든 잎새. 그리고 한겨울 차가운 물에 꽁꽁 얼어 있는 오스칼의 손등까지.
그는 비로소 삶 속에서 계절을 찾아냈다.
“응, 겨울이 끝났으면 좋겠어. 난 계절 중에 봄을 제일 좋아하거든!”
따뜻한 봄을 떠올리기만 해도 즐거운지 오스칼이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에 레오의 눈이 따뜻하게 휘어졌다. 그녀의 웃음에서 봄 내음이 났다.
‘넌 내게 늘 봄이었어.’
레오가 오스칼의 손을 꼭 말아 쥐었다. 그 따뜻한 감각에 오스칼이 눈을 들어 레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토끼 같은 눈망울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레오의 얼굴이 서서히 오스칼을 향해 다가갔다.
벌컥-
“단장님! 정찰 다녀왔습니다!”
“흐업!”
문간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오스칼이 맞잡은 레오의 손을 잽싸게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손을 뻗어 가까이 붙어선 레오를 밀어냈다. 그런데 그만, 과하게 힘이 실리고 말았다.
퍽-
이 상황을 위급상황으로 인지한 오스칼의 뇌는, 뻗은 손을 자연스럽게 말아 쥐게 했다. 결국, 오스칼은 그를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지른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주먹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타격감에 오스칼이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졸지에 오스칼의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게 된 레오가 저만치 떨어져 나가 황당한 표정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아본 것도 처음인데, 그게 오스칼일 줄이야.
“어…. 어! 드미트리, 왔어?”
침을 꿀꺽 삼킨 오스칼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드미트리와 다른 청년들을 맞이했다.
“예 형님. 근데 주방에서 뭐 하고 계셨습니까?”
“어? 거, 검 좀 휘두르고 있었지. 원래 있던 검을 잃어버렸더니, 새 검이 영 익숙지가 않네.”
“우와. 주방에서 검술 연습을요? 역시 고수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군요!”
신입 단원 애버트가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드미트리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듯 한쪽 눈매를 찡그리며 물었다.
“형님, 단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어…. 글쎄? 모르겠는데. 내가 그 녀석이 어디 있는지 알 게 뭐야.”
기사단 녀석들에게 레오와 주방 한가운데 서서 다정히 손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들킨다면…. 상상만 해도 수치스러웠다. 시치미를 뗀 오스칼이 주방 한편에 처박힌 레오를 외면하고 주방을 빠져나갔다.
레오가 그 장면을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그와 다정한 말을 속삭이던 사람이 맞나 눈을 끔뻑거렸다. 황급히 자신을 외면하는 오스칼에게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믿는 토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엇? 단장님, 거기서 뭐 하십니까?”
오스칼에게 떠밀려 주방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레오를 찾아낸 애버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사의 본분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사색하는 중이었다.”
“와! 역시 단장님쯤 되면 언제 어디서나 기사도를 실천하시는군요!”
애버트가 한껏 존경 어린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드미트리도 불쑥 레오가 서 있는 주방 구석을 들여다보았다.
“단장님, 여기 계셨군요. 음? 그런데 볼이 좀 부은 거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이 집에 아주 위험한 토끼가 있다.”
“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레오의 모습에 드미트리와 애버트가 어안이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의아한 듯 눈을 마주치며 레오와 함께 주방을 빠져나왔다.
“어, 레오↗ 거기↘ 있었구나?”
응접실 앞에서 엉거주춤 서 있던 오스칼이 어색한 호들갑을 떨었다. 레오는 대답 없이 눈만 가늘게 떴다.
“흠흠.”
오스칼이 헛기침을 하며 응접실 테이블 의자에 앉자, 레오도 말 없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드미트리가 정찰 보고를 시작했다.
“오늘 시에나와 외곽 인근 지역을 순찰했는데,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조용하다니?”
“최근 이교도 놈들은 많이 줄긴 했었습니다만 종종 마을에 나타나 약탈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요 며칠 새 이교도들이 싹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교도의 움직임이 변했다는 말에 레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근거지를 옮긴 건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근방에선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겨울이라 겨울잠을 자는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하하.”
드미트리가 실없는 농담을 하고는 웃었다.
“단장님의 명성 때문에 모두 두려워 꽁무니를 뺀 게 아닐까요?”
애버트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스칼이 턱을 쓰다듬었다.
“갑자기 하나도 안 보이는 건 좀 수상한데?”
레오도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덕분에 마을 주민들은 걱정을 덜었다고는 합니다만, 분명 얼마 전까지 나타나던 놈들이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처럼 보이지 않더군요.”
“흠. 갑자기 집에서 바퀴벌레가 안 보인다면 전부 박멸되었거나, 어디 모여 숨어있다는 건데.”
오스칼이 눈썹을 찡그리며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일단 수색 반경을 넓혀보도록 하지. 혹, 그들이 다른 지역에 나타나는지 주시하도록 하고.”
“예 알겠습니다. 단장님!”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든 오스칼이 제 손을 맞잡아 주물렀다.
***
요 며칠간 놀랍도록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기사단이 순찰하는 동안에 이교도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수도의 범죄마저도 끊긴 듯 고요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뭔가 일을 꾸밀 것만 같았던 아르투아나 발사자르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낯선 평화는 오히려 불안감을 가져왔다. 지나치게 고요한 탓에 들려와야 할 소식조차 들리지 않았던 탓이다.
“설마 에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기사단의 정기 훈련 시간, 오스칼이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다 말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을 때, 그의 파리했던 안색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중병이라도 걸려 앓아누운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쯤이면 그가 무슨 연락을 해와야 하는데.
“무슨 생각 중인가.”
다른 단원들의 자세를 살피던 레오가 오스칼에게 다가와 살짝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고 근심 어린 표정으로 허수아비만 바라보는 오스칼이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아, 훈련 중에 미안. 에렌 생각을 하느라고.”
“뭐?”
오스칼은 기사단 청년들이 일련의 사건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사람들 앞에서는 에르네스트 대공을 지칭할 때 여전히 에렌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오스칼 입에서 나온 에렌의 이름에 레오가 미간을 구겼다. 그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오스칼을 봤다.
“계약서를 에렌에게 맡긴 지도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아무 소식이 없어서. 설마 아르투아가 에렌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지금은 그 계약서가 유일한 희망인데….”
레오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오스칼이 자꾸 그자의 생각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정 걱정되면 함께 그를 찾아가지. 직접 확인하면 해결될 일이다.”
오스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훈련 중인 단원들을 뒤로하고 연무장을 빠져나온 오스칼이 에르네스트 대공저 앞의 낯선 풍경에 미간을 찌푸렸다.
항상 대공저는 경비원, 사용인, 그리고 드나드는 상인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오늘은 마치 유령의 집처럼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딘가 불안해진 오스칼이 굳게 닫힌 철제문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 아무도 안 계세요?”
그러나 오스칼의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질 뿐이었다. 저택은 겨울잠에라도 빠져있는 듯 고요해 대답이 없었다.
까악 까악-
오직 스산한 까마귀 울음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오늘따라 구름이 잔뜩 껴 검은빛을 띠는 하늘 탓에, 텁텁한 공기조차 음울함을 자아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오스칼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레오 역시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그가 달래듯 말을 붙였다.
“그자가 네게 별다른 말은 없었나?”
“응. 그날 다른… 말은 없었어.”
이 커다란 저택에 이토록 사람이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오스칼이 다시 한번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저기요! 누구 없어요?”
“거, 조용히 좀 하시게. 지금 대공저엔 아무도 없소.”
근처를 지나가던 노인이 지팡이를 허공에 휘두르며 역정을 냈다. 오스칼이 노인에게 달려갔다.
“혹시 대공저에 무슨 일이 있나요?”
오스칼이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노인의 대답을 기다리는 오스칼의 얼굴이 긴장해 빳빳하게 굳었다.
“며칠 전에 저택을 싹 비웠어. 이 근방에 대공저에서 일하는 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거든. 전부 휴가를 받아서 다 같이 남쪽 나라로 떠났대.”
“갑자기요? 대공 전하도 함께요?”
“전하가 함께 간단 소린 못 들었어. 다들 대공저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휴가도 좋은 곳을 간다며 부러워했지.”
오스칼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했다. 이런 시기에 휴가라니?
곁에서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오 역시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듯 표정을 굳혔다. 그때 대공저와 멀지 않은 거리에서 군중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오스칼이 문득 소란의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건….”
“왕실 행정관들이다. 왕궁 소속 관료들이지.”
레오가 관료의 정복을 보고 그들의 신분을 알아보았다. 행정관들은 두세 명씩 조를 이루어 분주히 거리를 돌아다니며 벽마다 무언가를 붙이고 있었다.
“왕실 행정관들이 이곳엔 무슨 일이지?”
오스칼의 눈빛이 흔들렸다. 곧 큰 비라도 쏟아질 것 같이 회색빛을 띤 공기가 더욱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오스칼이 다급하게 거리를 향해 내달렸다.
사람들이 행정관이 붙여 둔 벽보 근처에 몰려들어 수군거렸다.
“헉헉.”
오스칼이 가쁜 숨을 내뱉으며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헤집고 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숨을 헐떡이는 오스칼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벽보를 향해 빠르게 눈을 깜빡인 오스칼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굳었다.
오스칼을 쫓아 달려온 레오가 사색이 된 오스칼의 얼굴과 벽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왕실에서 내려온 공고였다.
에르네스트 대공이 반역을 도모하여 왕국을 어지럽히려 하니, 그를 발견한 자는 즉시 사살하거나 왕실 근위대에 신고할 것을 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