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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98)화 (98/138)

98화



 

찬 개울물을 흠뻑 뒤집어쓴 오스칼은 이를 딱딱 부딪쳤다. 바람까지 불어오니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덮쳐왔다.

두 사람은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식당으로 뛰어들었다. 식당 한가운데에 설치된 커다란 난로 덕분에 식당 안은 훈훈했다.

“휴,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데운 포도주에 말린 과일을 썰어 넣은 음료를 홀짝인 오스칼이 온기가 돌아 발그스름해진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제야 새파랗던 얼굴이 제 낯빛을 되찾았다.

“수프도 먹어 둬. 속을 따뜻하게 해야 몸에도 금방 열이 오르니까.”

레오가 금방 나온 뜨끈뜨끈한 양송이 감자 수프가 담긴 접시를 오스칼 앞으로 밀었다.

오스칼은 뜨거운 수프를 후후 불어가며 잘도 떠먹었다. 레오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식당 주인에게 얻은 마른 수건으로 젖은 오스칼의 머리카락을 털어 말렸다.

레오의 손길에 노곤한 눈을 하고 머리를 맡기던 오스칼이 문득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레오 넌 어떻게 날 뒤따라 온 거야?”

“사실 네가 대공을 만나러 간다고 한 뒤에…. 걱정이 돼서 널 쫓아갔었다.”

레오가 머쓱한 듯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린 채 중얼거렸다.

몇 시간 전, 레오는 오스칼이 에렌을 찾아가겠다고 떠난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초조하게 집안을 서성였다. 가뜩이나 요즘은 그들을 노리는 적들도 많았다. 게다가 에렌은 다른 의미로 오스칼에게 좀 위험한 남자 아닌가?

‘이런 때에 오스칼을 혼자 보낼 순 없지!’

결국, 그는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며 몰래 오스칼의 뒤를 쫓았다.

레오는 대공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스칼을 기다렸다. 대공저에서 걸어 나오는 오스칼의 모습을 발견한 레오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나타난 괴한들이 오스칼을 덮치곤 그녀를 낯선 마차로 밀어 넣었다. 레오는 타고 온 말로 곧장 마차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네가 그놈들에게 끌려가는 걸 보고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달렸지. 마차에 올라타려고 했는데, 마차가 전속력으로 달리는 통에 내 말이 마차를 빨리 따라잡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뛰어내렸잖아.”

해맑게 웃는 오스칼을 향해 레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솔직히…. 네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조마조마한 순간이었다.”

“하하, 안 다쳤으면 됐지. 어쨌든 네가 날 따라오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발사자르에게 붙잡혀 감금당할 뻔했어. 그놈 보통 미친놈이 아니야!”

“널 납치한 자가 발사자르였다고?”

레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틀림없이 아르투아 쪽 짓일 거라곤 생각했지만, 발사자르가 직접 나설 줄은 몰랐던 탓이다.

“어? 어….”

오스칼이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차에 탔던 발사자르를 본 줄 알았더니, 빠른 속도 때문에 마차 안의 얼굴은 제대로 못 본 모양이었다.

‘레오에겐 아직 세레나와 발사자르 얘긴 안 했는데….’

오스칼이 식은땀을 흘렸다. 레오는 예리한 시선으로 오스칼을 향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자가 왜 널 감금하려 하는 거지? 그것도 직접 나서서?”

“어…. 음…. 그게….”

오스칼은 더 거짓말을 늘리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밝히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소설 속이며, 너는 등장인물이다’라는 설명은 믿을 것 같지도 않았고, 제대로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오스칼은 최대한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범위에서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그러니까, ‘레오의 어머니를 아는 검술에 능한 영혼’과 ‘카탈리나의 가엾은 백작 가문 영애의 영혼’이 뒤바뀌었다는 정도로.

오스칼이 살롱에서부터 무도회까지의 일을 모두 털어놓자, 레오의 입이 우스꽝스럽게 벌어졌다. 그는 너무 놀라 차마 눈도 깜빡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간신히 오스칼의 이야기를 납득한 후, 가장 신경 쓰이던 대목을 날카롭게 캐물었다.

“발사자르, 그 자식이 너와 알던 사이 같다고?!”

그 어마어마한 이야기 중에 레오가 가장 주목한 대목은 영혼이 바뀌었다는 엄청난 사실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과거 발사자르와 세레나가 모종의 관계였다는 말에 레오가 얼굴을 왈칵 구기며 되물었다.

‘아니, 집중할 포인트가 틀렸잖아! 좀 다른 곳에서 놀라줄 수 없어? 무려 영혼이 바뀌었다는데 왜 거기엔 아무 말이 없어?’

레오의 눈이 흡사 야차의 것처럼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오스칼이 한사코 부정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 그놈 입장에서만 그런 거야! 난 정말 결백해! 그놈은 내게 초면인 미친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하지만 그놈이 무도회에서 네게 추근거렸다며!”

“그땐 그게 오히려 잘된 일…. 아니 그게 아니라, 덕분에 그놈 피도 무사히 얻었고….”

“역시 아까 그 마차를 끝까지 쫓아서 놈을 끝장내버렸어야 했어!”

레오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를 냈다. 오스칼이 가까스로 레오를 진정시켰다.

“레, 레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일단 에렌 경이 증거를 가지고 갔으니….”

“어휴! 이번에도 또 세금을 올린다니 왕실도 너무한 거 아니오?”

오스칼의 뒷말이 옆 테이블의 사나운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오스칼이 그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려 테이블에 앉은 손님을 바라보았다.

“왕국군은 세금 징수원으로 둔갑한 지 오래됐지. 치안은 뒷전이고, 국왕의 앞잡이 노릇만 하니까.”

“매번 형제들끼리 왕위 다툼을 벌이는데, 우리 같은 평민들이야 솔직히 누가 왕이 되든 무슨 상관인가?”

“맞아. 누군가가 반역을 저지른다 해도 백성들은 관심 없지. 먹고 살기도 바쁜데 높으신 분들 싸움에 누가 나서겠어. 게다가 우리 국왕은 신의도 없잖나. 충신도 내치는 작자라고!”

왕국민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왕실과 왕국군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간의 일들로 민심은 극도로 험악해져 있었다.

레오 역시 눈을 내리깐 채, 미지근하게 식은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에렌 경이 증거를 가지고 갔으니…. 모든 걸 바로 잡을 수 있을 거야.”

오스칼이 착잡한 표정으로 하려던 말을 마저 중얼거렸다.

***

요 며칠간 폐인처럼 살던 에렌이 정신을 차리고 평소와 같은 생활을 시작한 것은 알랭에게 기쁜 일이었다.

오스칼이 다녀간 이후, 에렌은 제 방의 술병을 모두 치워버리라고 지시한 후, 다시 말쑥한 대공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인정하기 싫긴 하지만, 역시 제 주인에게 ‘오스칼 처방’만큼 효험이 있는 것은 없다며 알랭은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에렌이 결코 ‘평소와 같은 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술독에 빠져있는 일은 그만두었지만, 에렌은 여전히 집무실에 틀어박힌 채였다. 그는 방 안에서 무언가에 골몰하다 단테를 불러 무언가를 지시하곤 했다.

만나기로 했던 사업파트너와의 일정은 모두 취소했으며, 결재해야 할 문서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결국, 쏟아지는 거래처의 민원을 견디지 못한 알랭이 결재 서류 한 뭉치를 들고 에렌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

피로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가 문 너머로 울렸다. 방문을 열자 여전히 잘생긴 그의 주인이 알랭을 맞이했다.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푸른 눈이 알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랭. 마침 잘 왔군. 자네가 해줄 일이 있어.”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주인님께서 해주실 일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알랭이 한 무더기의 서류를 널찍한 마호가니 책상 위에 턱-하고 올려놓았다.

에렌은 서류 뭉치를 흘긋 한번 보더니 이내 그런 것엔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알랭이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을 꾹 참고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정말 추리고 추려서 급한 것만 갖고 온 겁니다. 오늘은 기필코 여기에 서명을….”

“아무래도, 이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당분간 휴가를 좀 주어야 할 것 같아.”

에렌은 단숨에 알랭의 말을 끊고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알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휴, 휴가요? 갑자기요? 이 겨울에?”

“그래. 당분간 대공저를 비울 거야. 그러니 자네는 곧바로 대공저의 사용인들을 모두 내보낼 준비를 해.”

알랭이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그게 무슨…! 정원 수리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별채 보수 공사가 한창인….”

“명령이다. 그러니 토를 달지 않는 게 좋아.”

에렌이 서늘한 얼굴로 그의 말을 잘랐다.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에 알랭이 침을 꿀꺽 삼켰다.

“주인님, 아무리 그래도 지금 당장은 조금….”

알랭은 무리라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이 저택의 사용인만 해도 족히 수십 명은 되었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로 시계를 바라본 에렌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지금부터 18시간을 주지. 그 안에 이 저택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도록 모두 비우도록 해.”

“예…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을 알아챈 알랭이 눈을 질끈 감고는 방을 떠났다. 알랭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에렌이 나지막이 충직한 부하의 이름을 읊조렸다.

“단테.”

“예, 주인님.”

기척을 숨기고 있던 단테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에렌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에렌이 그에게 무언가를 잔뜩 휘갈겨 쓴 종이를 건넸다.

“그 여자가 말한 군대는 이곳으로 집결 중이다. 너는 그들과 접선 한 뒤 여기에 적힌 일들을 준비해.”

받아든 종이의 내용을 확인하던 단테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곧 종이를 접어 소중히 품에 넣고는 날카로운 눈매를 팽팽하게 당겼다.

“예. 주인님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너도 알겠지만, 상대는 만만치 않은 자야. 만반의 준비를 해.”

“물론입니다.”

단테를 바라보는 에렌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가 다짐을 받듯 간절한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오스칼은 결코 다쳐선 안 된다는 걸 명심해.”

“명심하겠습니다.”

“다음번에 우리가 만날 곳은… 왕궁이다.”

“존명.”

결연하게 대답한 단테가 검은 복면을 둘러쓰고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방안에 혼자 남은 에렌이 벽에 걸려있는 오스칼의 재킷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첫 번째 ‘비즈니스 미팅’에서 오스칼이 제게 벗어준 재킷이었다. 재킷 주머니에 꽂힌 마른 작약꽃이 고개를 떨구고 축 늘어져 있었다.

오스칼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소중했었는데. 그가 핏기없는 입술을 악물었다.

“이제, 내게 이런 건 아무 의미가 없어.”

부우욱-

에렌이 재킷을 단도로 베어냈다. 날카롭게 잘린 재킷 자락이 카펫 위로 떨어져 내렸다.

에렌은 천천히 허리를 굽혀 재킷 조각을 손에 들었다. 찢어진 천 조각을 움켜쥔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잘게 떨렸다.

마침내 외면하듯 넝마가 된 재킷에서 눈을 돌린 에렌이 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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