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뤼미에르의 아침 식사시간, 곤란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 오스칼이 애꿎은 수프 그릇만 휘휘 저어댔다. 아직 오스칼의 접시 위에 남아 있는 커다란 고깃덩이를 보며 레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입맛이 없는 것 같은데,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아, 그런 건 아니야. 사실 계약서를 어떻게 왕궁에 제출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레오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가 평생 염원하던 일이었다. 평생이 걸리더라도 아버지의 결백을 밝혀 아버지의 이름에 씐 누명을 벗겨내고 싶었다.
그 일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오스칼이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졌다고 고백해왔다.
그는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왕실 재판에서 반역죄를 선고받았어. 그러니 그 증거를 왕실 법원에 제출해 재심을 청구해야 한다. 그러면 가문의 복권도 가능하겠지.”
왕실 법원은 라인하트의 가장 권위 있는 사법기관으로, 그곳에서 열리는 왕실 재판은 국왕의 승인 하에서만 열리게 되어있었다.
레오의 설명에 오스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증거를 무사히 왕실에 제출할 수 있도록 해줄 사람은… 역시 에르네스트 대공뿐이겠지? 궁에 아르투아의 끄나풀이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고….”
오스칼의 입에서 에렌의 이름이 나오자 레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레오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알아챈 오스칼이 말을 덧붙였다.
“대공은 증거를 찾도록 도와준 사람이야. 그 역시 아르투아를 잡을 증거를 원했고. 대공이라면 이 증거를 가지고 국왕을 설득해 왕실 재판을 열 수 있을 거야.”
반박할 말이 없는 답에 레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래서…. 오늘 그 사람에게 이 증거를 전달할까 해. 드레스도… 돌려주고.”
레오의 손에서 단단한 호밀빵이 가루가 되어 파스스 부서져 내렸다.
“정 그자를 만나러 가겠다면 나도 함께 가겠다.”
“음….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닌 거 같은데….”
오스칼이 곤란한 듯 뺨을 긁었다.
가뜩이나 부탁하러 가는 자리에 레오와 함께 갔다가 두 사람이 또 으르렁대기라도 한다면….
오스칼의 미지근한 태도에 레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볼멘소리를 했다.
“나더러 네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남자를 만나러 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으란 건가?”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레오의 직설적인 발언에 오스칼의 귀가 붉어졌다.
“심지어 예전부터 네가 여인이란 걸 알고 있었던 자 아닌가. 난 그자가 맘에 안 들어.”
레오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에렌은 오스칼의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견제하기 위해 도발도 서슴지 않던 자였다.
레오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오스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문제라고! 그에게 네 아버지의 누명을 벗길 재판을 열게 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네가 대공에게 뾰족하게 굴다가 일이 틀어지면 어떡해?”
젠장, 영 내키지 않는데….
레오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역시 별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스칼의 말대로, 오스칼과 동행하여 에렌을 마주했을 때 그를 향해 경계심을 드러내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레오가 한숨을 쉬었다.
“대신 증거만 전달하고 바로 나온다고 약속해. 내가 질투로 미쳐버리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너… 연애 경험도 없었다면서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는 거야?”
노골적인 애정표현에 민망해진 오스칼이 열을 냈다. 레오의 검은 눈동자가 오스칼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어느새 곁으로 바짝 다가온 그가 오스칼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어디긴.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제라드 녀석의 소설이지.”
레오의 얼굴이 또다시 오스칼의 얼굴에 겹쳐졌다.
***
에르네스트 대공저.
오스칼이 대공저를 방문하자 푸석한 얼굴을 한 알랭이 쌍수를 들고 오스칼을 반겼다.
지금껏 그가 오스칼을 맞이하던 모습 중 가장 반가운 표정이었다. 알랭은 한 줄기 희망이라도 붙들 듯 오스칼을 향해 간곡하게 부탁했다.
“무도회에 다녀오신 이후 대공 전하께서 계속 방에만 틀어박혀 계십니다. 오스칼 님의 말이라면 들으실지도 모르니, 제발 식사라도 제대로 하시라고 설득해주십시오.”
알랭의 말에 오스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마, 내가 무도회에서 그의 청혼을 거절했기 때문에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걸까.
그렇다면 에렌이 제 말을 듣기는커녕, 꼴도 보기 싫다고 방에서 쫓아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저도 걱정이 되니, 전하께 말씀은… 드려볼게요.”
오스칼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랭은 간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방에 들어선 오스칼이 쭈뼛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에렌은 엉망이 된 테이블 뒤의 기다란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채였다. 그는 눈만 들어 올려 다가오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방 안의 풍경에 놀란 오스칼이 눈을 깜빡였다. 지난번 이곳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흐트러진 곳 없이 완벽한 모습의 집무실은 온데간데없었다.
커튼을 길게 드리워 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실내엔 먼지가 자욱했다. 소파 앞 낮은 테이블 주변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과 빈 술병들이 너절하게 흩어져 있었고, 방 안의 공기에서는 온통 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평소라면 일어나 자신을 맞이했을 에렌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머뭇거리던 오스칼이 그의 맞은편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에렌이 거칠거칠한 얼굴로 오스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껏 이 사람이 원망스러워 숨이 막혔는데, 황당하게도 막상 제 눈앞에 나타나니 숨통이 트여 살 것 같았다.
“오랜만이군. 그날 꽤 추웠을 텐데, 아픈 덴 없어? 피부가 파랗게 질렸던데.”
에렌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나왔다. 그새 체중이 많이 줄었는지 그의 뺨이 해쓱했다.
그의 단정하지 못한 옷매무새나 흐트러진 머리를 제외하고도, 며칠 만에 마주한 그는 어딘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그가 이렇게까지 힘든 기색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살롱에서 과다출혈로 혼절하기 직전에도, 이 남자는 훨씬 더 여유 있는 표정을 하지 않았었나.
오스칼이 입안을 꾹 눌러 씹었다.
“전… 괜찮아요. 오히려 대공 전하께서 더…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식사도 제대로 안 하신다면서요.”
“그대가 내 걱정을 할 때도 있네.”
에렌이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소파 위에 힘없이 올린 그의 오른손에 얼기설기 감긴 붕대가 보였다. 대강 두른 것 같은 붕대엔 피가 잔뜩 말라붙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흩어진 유리 조각에 묻어있는 핏자국을 발견한 오스칼이 낮게 신음했다.
“손의 상처는…. 제대로 치료받으신 거예요? 대공 전하께서 전에도 저 때문에 다쳤던 곳인 것 같은데….”
오스칼의 걱정이 담긴 물음에 그가 픽 웃었다.
“날 이름으로는 영영 불러주지 않을 모양이야. 꼬박꼬박 대공 전하로군.”
어쩐지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이 무거워 오스칼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날은… 고마워요. 덕분에 일도 무사히 해결되었고….”
“무사히 해결되었다라…. 칼릭스가 당신이 여자라는 걸 알게 된 것도 포함해서인가.”
오스칼이 흠칫, 꼼지락거리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에렌의 얼굴에 쓰라린 빛이 서렸다.
“그럼…. 그 남자의 마음도 알게 되었겠군.”
그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스칼이 놀라 눈을 들자, 에렌이 한쪽 입꼬리를 설핏 올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어떻게 몰라? 그 남자가 지금껏 당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리고 당신도…. 하… 됐어. 그만하지.”
차마 말을 잇지 못한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오스칼을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천천히 입매를 쓸었다. 에렌의 시선이 오스칼의 옆에 놓인 꾸러미에 닿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오스칼이 퍼뜩 입을 열었다.
“이거, 돌려주려고요.”
오스칼이 가져온 꾸러미를 에렌에게 건넸다.
내용물을 확인한 에렌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흰 털코트와 가브리엘이 만든 오스칼의 드레스였다.
“그 드레스는… 그대 거야. 돌려줄 필요 없어.”
“하지만 엄청 비싼 것 같은데…. 전 입을 일도 없고….”
“그럼 버려.”
그의 싸늘한 목소리에 오스칼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래도 버릴 수는….”
“그대를 위해 만든 드레스인데 부담스럽다고 돌려준다니. 돌려받은들 대체 그 물건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지? 내게 뭘 어쩌란 건가?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릴 수도 없는데!”
내 마음처럼.
하지 못한 뒷말과 함께 마른 침을 삼키는 에렌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죄송해요. 그런 생각까진… 미처 못했어요.”
오스칼이 눈을 내리깔고 무릎 위에 맞잡아 올린 자신의 손만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에렌은 죄인같이 고개를 수그린 오스칼의 모습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정작 차인 건 나인데,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하는 거야.
오스칼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긴 싫었다. 에렌이 안간힘을 써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미안해. 그대 잘못이 아닌데, 내가 날카롭게 굴었어. 설마, 이걸 주러 여기까지 온 거야? 아니면 다른 용건이 있는 거야?”
다행히 아까보다 목소리가 한결 부드럽게 나왔다. 에렌은 그런 제 목소리에 조용히 안도했다. 오스칼이 에렌의 물음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도회에서, 발사자르의 피를 구했어요. 그리고, 계약서의 마법이 풀렸고요.”
오스칼이 아르투아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진 샤무아의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를 받아든 에렌의 지친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에렌이 차가운 손끝으로 뺨을 쓸었다.
“정말…. 그대가 말했던 대로군.”
“이 증거라면 아르투아를 체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를 조사한다면 지금 그가 꾸미고 있는 일도 밝혀낼 수 있을 거고.”
에렌이 초조하게 셔츠 깃을 두어 번 잡아당겼다. 그의 푸른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대는 누굴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거야?”
“그게 무슨 뜻….”
“역시, 레오폴드 칼릭스 때문인가.”
오스칼이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리고 올곧은 시선으로 에렌을 마주 보았다.
“물론 칼릭스 가문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바로잡고 싶기 때문이에요. 아르투아와 잔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들을 해왔으니까요.”
“그래서, 내게 이걸 넘겨서 아르투아의 죄를 공론화시키겠다?”
“전하께서도 그것을 위해 찾으시던 증거잖아요. 게다가 아르투아가 왕궁의 어디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이걸 보일 순 없었어요.”
오스칼의 대답에 에렌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난 믿을 만한 사람이고?”
“제가 아는 전하는… 그래요.”
오스칼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에렌이 쓴웃음을 지었다.
“잘 생각해. 나도 아르투아나 국왕과 다를 바 없는 알량한 왕족이거든. 게다가 천박한 혈통 출신이고. 날 믿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몰라.”
“전하가 그들과 같았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잔느의 저택을 조사하지도 않았겠죠.”
오스칼이 눈을 또렷하게 떴다. 그리고 깊은 심호흡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전하에 대해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할 권리는 없어요. 물론 본인 스스로를 포함해서요. 혈통이나 신분이 아니라 신념이 내 가치를 결정하는 거죠.
전하는 제 것이 아닌 걸 탐내지 않겠다는 신념을 평생 지키려 노력해왔고…. 전하야말로 사람의 진짜 가치를 아는 사람이잖아요.”
에렌은 어떤 상황에서도 국왕에 대한 신의를 지키려 애썼다. 그리고 자신이 여자란 사실을 알면서도 사업파트너가 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반역자의 후손이자 평민인 레오를 개의치 않고 수확제의 기사로 등용했다.
“전하는 국왕이나 아르투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오스칼의 단호한 음성에, 에렌이 고개를 돌려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않은 속이 쓰려 왔다. 그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여 목소리를 냈다.
“…계약서는 거기 두고 가.”
“고마워요.”
그의 대답에 안심한 오스칼이 활짝 미소지었다. 에렌은 애써 오스칼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려 시선을 돌렸다.
오스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꾸러미에서 에렌의 코트만 꺼내 의자에 얌전히 올려두었다. 오스칼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문이 닫히고, 소파에 꼿꼿이 몸을 세워 앉은 에렌이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오스칼이 두고 간 자신의 코트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오스칼의 체취가 남아 있는 듯했다.
에렌은 멍한 눈빛으로 코트 자락을 손끝으로 쓸었다.
콱-
그가 코트를 와락 움켜쥐었다. 손아귀에서 코트가 구겨졌다. 그리고는 그는 책상의 가장 깊숙한 곳에 계약서를 밀어 넣었다.
“그대에겐 미안하지만, 이걸 지금 공개할 순 없어.”
***
에르네스트 대공저를 빠져나온 오스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에렌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에렌의 초췌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 괜찮은 거겠지?”
오스칼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오싹-
순간, 등 뒤가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오스칼은 위협에 반응하듯 본능적으로 검을 뽑았다.
퍽-
누군가 등 뒤에서 오른팔을 강하게 쳐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검을 놓치자, 순식간에 억센 손아귀가 오스칼의 양팔을 붙들었다. 순식간에 서너 명 정도로 보이는 괴한이 그녀를 제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읍!”
복면을 쓴 괴한이 발버둥 치는 오스칼의 입에 재갈을 물리자, 근처에서 재빠르게 마차 한 대가 달려왔다.
단단히 결박된 오스칼의 몸이 그대로 들려 마차에 처박혔다. 공포에 찬 오스칼의 눈을 뒤로하고 마차의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이랴!”
오스칼을 태운 마차의 마부가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