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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95)화 (95/138)

95화



 

에르네스트 대공저.

굳게 닫힌 집무실의 문밖에서, 알랭은 초조한 얼굴로 이리저리 서성였다.

발사자르의 무도회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제 주인이 이틀째 두문불출하며 술독에만 빠져있는 것일까.

달칵-

문이 열리고, 에렌의 식사를 챙기기 위해 방에 들어갔었던 하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랭이 하녀를 향해 눈썹을 치켜떴다.

방 안의 동태가 어떠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착잡한 표정을 한 하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녀의 손에 들린 쟁반에는 빈 술병이 여러 병 올려져 있었다.

“이런.”

알랭이 통탄하듯 내뱉었다. 이번에도 에렌은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술병만 잔뜩 비운 모양이었다.

“벌써 빈 병만 몇 개째인지 모르겠어요. 독한 술만 찾으십니다…. 저러다 주인님이 돌아가시는 건 아니겠죠.”

하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술병을 내려다보았다.

“허튼소리! 그런 재수 없는 말은 하지 말고, 가서 자네 일이나 하게. 이 일은 주위에 단단히 함구하고.”

알랭이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하녀를 꾸짖어 돌려보냈다. 하지만 방안의 에렌이 걱정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아르투아 대공저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스칼과 함께 무도회로 떠났었던 에렌은 혼자 돌아왔다. 분명 떠나기 전만 해도, 에렌은 지금껏 알랭이 본 것 중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무도회에서 돌아온 이후, 에렌은 집무실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걱정된 알랭이 방문을 열고 에렌의 안부를 살필 때면,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던 알랭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오스칼 님이라도 와주면 좋으련만.”

***

두꺼운 아이보리색 커튼이 창을 가려,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한창 볕이 쏟아지는 한낮인데도 에렌의 집무실은 한밤처럼 어두컴컴했다.

시간의 흐름도 멈춰버린 공간에서, 에렌은 벌써 몇 병째인지 모를 독한 술을 비워냈다.

텅 빈 술잔에 술을 따르려던 에렌이 기울여도 술이 나오지 않는 빈 병을 팽개치고, 신경질적으로 새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가 가득 채워진 술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목 안이 알싸해지며 태울 듯 달궈졌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났다. 그가 쓰디쓴 입가를 손 등으로 훔쳤다.

이쯤 되면 정신을 잃고 쓰러져도 좋으련만, 술잔을 비울 때마다 오스칼의 얼굴이 생각났다.

자신을 바라보던 예쁜 눈에 담긴 곤란한 눈빛이 떠올라서, 그 고운 입술로 말하려는 이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에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덕분에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이틀 내내 깨어있던 피로함과 술기운에 설핏 잠이 들 때면, 꿈속의 오스칼은 제게 모진 말을 쏟아냈다. 꿈을 꾸는 것이 더 아팠다.

“왜 날 사랑할 수 없었을까.”

에렌이 소파에 축 늘어지듯 길게 누웠다. 그가 아직 상처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오른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쇄소에서 오스칼의 칼날을 받아내며 생긴 흉터였다. 그 손으로 눈을 가리자, 이틀 새 몰라보게 수척해진 얼굴의 절반이 손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꼭 감은 두 눈 너머 캄캄한 곳에서 오스칼을 안아 들고 사라지던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결국, 두 사람은 연인이 되고 말았을까?

오스칼의 마음이 레오폴드 칼릭스에게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녀를 움직이는 건 그 남자와 관련된 일이었고, 그 어여쁜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언제나 그 남자에게 향했다.

하지만 모른 척 그녀의 곁을 맴돌다 보면 언젠가 그 눈이 자신을 봐줄 거라고 믿었는데.

“한 번쯤은 날 그렇게 바라봐 주면 좋았잖아.”

에렌이 허탈한 듯 웃었다. 그가 눈을 덮었던 손바닥을 쓸어내려 마른세수를 했다.

참 우습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들은 쉽게 가질 수 있었는데.

간절한 것은 결코 제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에렌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다시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푹신한 소파 아래로 푹 꺼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술병을 집어 들었다.

달칵-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내가 부를 때까진 들어오지 말라고 일렀을 텐데. 당장 나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방안에 들어선 인영에게 향했다. 불청객은 에렌의 축객령에 아랑곳없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천하의 에르네스트 대공께서 실연이라도 당하셨나 봅니다.”

오만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에렌이 눈을 찌푸려 제게 다가오는 자를 응시했다. 하녀의 복장을 한 여자. 그러나 여자는 대공저의 사용인이 아니었다.

“넌…!”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에렌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자지도,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내리 독한 술만 퍼마신 그의 몸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핑그르르 현기증이 돈 그가 이마를 짚으며 소파 위로 쓰러졌다.

“힘드실 텐데 앉아 계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다정했다.

“네가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젠장, 대공저의 경비가 이렇게 허술해서야.

에렌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붉은 눈에 검은 머리칼, 범죄 기록의 초상화에서 확인한 얼굴. 하녀복을 입은 눈앞의 여자는 분명 잔느였다.

“제가 여기 어떻게 들어왔는지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제가 이곳에 ‘왜’ 왔는지가 중요하지요.”

“사용인을 세뇌한 건가? 날 없애러 온 거라면 기가 막힌 타이밍이군.”

에렌이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으며 으르렁댔다. 아르투아와 잔느는 그를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으니까.

“전 대공 전하를 해치러 온 것이 아니랍니다. 도움을 드리러 온 거죠.”

“네가 도움을 준다고? 허튼소리 할 거면 꺼져. 내가 여기서 널 죽여버리기 전에.”

그가 더듬더듬 손을 뻗어 자신의 검을 찾았다.

“이걸 찾으세요?”

잔느가 어느새 에렌이 찾던 검을 집어 들고는 생긋 웃어 보였다.

“제길.”

에렌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를 죽이려던 여자에게 검까지 빼앗기다니, 한심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 그저 전하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어떨까, 해서 온 것뿐이랍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전하가 갖고 싶었지만 갖지 못한 것.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것.”

“뭐…?”

에렌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균열을 알아챈 잔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르투아에게 국왕을 세뇌한 마도구를 돌려받기 위해 대공저에 들렀던 밤, 잔느가 세 사람을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다.

레오와 에렌을 제거할 방법을 골몰하던 잔느에게, 그날 밤 목격한 일은 완벽한 해답을 주었다.

두 남자는 그녀가 상대했던 사람 중, 누구보다 강한 자들이었다. 암살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고, 권력으로도 누를 수 없었다. 심지어 수확제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두 남자는 협력 관계였다.

그러나, 한배를 탄 줄 알았던 두 사람이 같은 것을 원하고 있을 줄이야!

두 사람이 원하는 그것은 물건이 아니기에 나누어 가질 수 없었다. 강한 자들이 같은 것을 욕망한다. 즉, 그들은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서로를 없앤다면? 잔느가 비릿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의 꽃은 꺾어 오면 되지 않습니까? 설령 그 꽃이 시든다 한들, 여전히 당신 것일 테니까요.”

잔느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울렸다.

“네가 감히 내 앞에서 요사스러운 입을 놀리는구나.”

쉬어버린 목소리로 대꾸하는 에렌의 수척한 얼굴 위로 고뇌가 떠올랐다. 그가 입술을 짓씹었다. 잔느가 꾀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반역을 일으키고, 방해꾼을 제거하세요. 전하가 왕이 된다면 승리의 대가로 꽃을 손에 쥐게 될 겁니다.”

잔느는 무척 간단한 일이라는 듯 공중에서 손가락을 휘휘 돌렸다.

“네 놈들이 어떤 흉계를 꾸미는지 알고 있는데, 그런 말이 내게 통할 것 같나?”

수가 뻔히 보이는 잔느의 제안에 에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잔느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들었다. 잔느는 미동도 없이 에렌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갖고 싶지 않습니까? 이름이… 오스칼이었던가요.”

잔느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에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동요를 알아챈 잔느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 아이를 칼릭스에게 빼앗긴 채 살아가실 겁니까? 오스칼의 모든 것이 전하의 것이 된다고 상상해보세요.”

검을 쥔 에렌의 손이 일순간 허공에서 멎었다. 잔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내내 기다렸다. 그의 약점이 완벽하게 드러나 욕망과 열등감이 생기는 순간을.

잔느가 검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에렌의 시선이 빛나는 물체에 닿았다. 소용돌이치는 듯한 빛에 에렌이 비틀거리며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쨍그랑-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빈 술병이 쓰러져 산산조각이 났다. 잔느가 만족한 듯 눈을 접어 웃었다.

“정의나 명예 같은 건 이제 당신에게 상관없어질 거예요.”

“윽.”

에렌이 테이블을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신음을 삼켰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가끔은 생각을 버리고 인형이 되는 게 좋죠. 욕망과 열등감은 인형을 만드는 좋은 재료니까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에렌의 눈이 검은 구슬을 노려보았다. 윙윙대는 구슬을 바라보며 에렌이 힘겹게 중얼거렸다.

“이게 당신들이 국왕과 루이스터 숙부를 조종한 술수였군….”

에렌의 오른손 아래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잔느가 에렌을 향해 다정하게 속살거렸다.

“국왕과 칼릭스를 없애 버리세요. 이교도 병사를 내어드리지요. 아, 국왕을 지키는 근위대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은 나서지 않을 겁니다.”

에렌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방 안의 어둠이 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마침내 구슬을 소중하게 품속에 넣은 잔느가 그에게서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승리감에 찬 웃음을 지은 잔느가 방을 빠져나가기 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형을 죽이는데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답니다. 결국은 당신 역시 반역자로 죽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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